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31)유극기와 함께 단속사를 유람하며
조위선생이 유극기(호인)와 함께 유람한 단속사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 줄기가 힘차께 뻗어 내려오다가 멈춘 옥녀봉 아래에 있는데
때는 1485년 성종 16년 늦가을이라 무서리가 내리고 단풍도 짙게 물들어 있었다.
534년전 그때의 단속사 건물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절터에는 동.서 삼층석탑과
주춧돌이 어지러이 놓여있어 고색찬연했던 당시의 풍경를 상상속으로 그려볼 뿐이다.
또 정적속의 고요한 밤, 풍경소리만 울리는 단속사에 유극기와 함께 머물면서
지리산 깊은 숲속을 힘들게 올랐던 추억들이 담긴 시도 올려본다.
단속사지 동.서 석탑(보물제 72호)
-단속사가 있던 자리에는 돌탑만 남아있는데
이곳 어딘가에서 옛 선비들의 시 읊는 소리가 들려 오는듯-
유극기와 함께 단속사를 유람하며(與兪克己同遊斷俗寺)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문외귀부세월심(門外龜趺歲月深) 문밖의 귀부는 오랜 풍상에도 굳건하고
명승고촉재선림(名僧高躅在禪林) 명승의 높으신 자취는 선림에 남아있다.
상풍수수착가색(霜楓樹樹着佳色) 무서리에 단풍나무는 아름답게 물들고
풍탁시시유묘음(風鐸時時遺妙音) 처마 끝 풍경은 때때로 묘한 소리를 낸다.
방고나감다소감(訪古那堪多少感) 옛날 놀던 곳을 찾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랴
비추공유단장음(悲秋空有短長吟) 가을에 슬픈 마음이 들어 부질없이 장단구를 읊는다.
야래산우명초엽(夜來山雨鳴蕉葉) 간밤의 산비에 파초 잎이 울고
자명구등여불금(煮茗篝燈與不禁) 등불아래 차를 끓이니, 가을 흥취를 자제할 수 없구나.
*유호인(兪好仁,1445~1494)의 자가 극기(克己)이다
본관은 고령.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 아버지는 음(蔭)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부봉사가 되었다.
1478년 사가독서를 했으며, 1480년 거창현감이 되었다.
이어 공조좌랑·검토관을 거쳐, 1487년 노사신 등이 찬진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다시 정리해 53권으로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으나,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는다 하여 파면되었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개월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단속사지 뒷쪽에는 수령 650여년의 "정당매"가 있었는데
태풍으로 쓰러지고 이렇게 그루터기와 조그만 2세들이 자라고 있으며,
옆에는 정당매가 살아있을 때 세운 표지석과 비각만 등그렇게 남아있다
정당매 표지석
여기 있던 정당매(政堂梅)는 우리나라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였다.
인재 강희안(1419~1464)의《양화소록(養花小錄에)》에 보면 통정공이
소년시절에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 공부를 할 때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뜰 앞에 심어놓고,
시 한 수를 읊었다고 씌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통정공(通亭公)은 고려 말기의 문신인
강회백(1357~1402)으로 우왕2년(137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점점 높아져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성과 문하성의 종2품 벼슬)겸 대사헌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된 뒤 진양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다.
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강희안의 조부가 되며 통정이 소년시절 정당매를 심고 시를 읊었다.
단속사의 스님들이 공의 재덕(才德)을 생각하고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공을 본 듯 하였다고 하는 바로 그 매화나무인데 안타까울 뿐이다.
정당매각
통정 강선생 수식 정당매비(通亭姜先生手植政堂梅碑)
지리산의 가을
유극기(호인)가 궁궐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
-送兪克己(好仁)赴闕-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억석근궁경개년(憶昔芹宮傾蓋年) 옛날 성균관에서 다정하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중간취산양망연(中間聚散兩茫然) 중간에 만나고 헤어져 서로 아득하였구나.
동추효일금란전(同趨曉日金鑾殿) 새벽이면 함께 금란전으로 내달렸고
공섭추풍방장전(共躡秋風方丈顚) 갈바람 맞으며 함께 지리산에도 올랐었지.
원백상사통루체(元白相思筒屢遞) 원.백은 서로 그리워 시통이 자주 오고 갔고
서진별후탑공현(徐陳別後榻空懸) 서.진은 이별 뒤엔 탑상만 부질없이 걸렸었지.
곤붕일거부요익(鯤鵬一去扶搖翼) 곤붕이 한번 부상하여 날갯짓을 하면
표묘봉래재일변(飄渺蓬萊在日邊) 아득히 먼 봉래산도 하루거리에 있으리.
*원.백(元白) : 당나라 시인인 원진과 백거이를 말함, 우정이 돈독했다.
*서진(徐陳) : 후한서의 서치전의 서치와 진번을 말함.
*이 시는 유극기가 1488년 의성현령에서 파면된 후
초야에서 지내다가 다시 복직하여 궁궐로 들어가게 되자
전송하면서 지은 시로 1489년 이후 일것으로 보인다.
천왕봉 오르는길
유극기(호인)에게 좋은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붙이다
-寄聞韶兪克己(好仁)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자신오조도기궁(自信吾曺道豈窮) 스스로 믿는 우리의 도가 어찌 다하랴?
비환출처약상동(悲歡出處略相同) 슬픔과 기쁨의 출처는 대략 서로 같다네.
초문란액초양억(初聞鑾掖召楊億) 처음으로 대궐에서 양억을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우견저산착취옹(又見滁山着醉翁) 또다시 저산에서 취옹만 사는 것을 보겠네.
구비구비 바윗길을 오른다
심사공관강하침(心事共關江夏枕) 마음속에 생각했던 일은 함께 강하침에 관심을 두었지만
편장구절월주통(篇章久絶越州筒) 시편을 짓는 일은 오래도록 월주의 시통에 끊겼네.
하시오마시형곡(何時五馬嘶荊谷) 어느 때 수령의 말은 형곡에서 우나?
후자추풍람수동(候子秋風蘫水東) 가을바람 속에 남수의 동쪽에서 그대를 기다리라.
*양억(楊億) : 중국 북송의 문학가, 시문에 뛰어났다
*저선(滁山) : 송나라 구양수의 시에 나오는 술취 한 늙은이만
남았다는 것을 자신에 비유하여 말함
*강하침(江夏枕) : 중국 송나라 강하사람인 두감을 비유하여 한 말
*월주(越州) : 송나라 육유는 월주 사람으로 일찍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 후
파직되어 시문을 짓다가 다시 조정에 나가 바쁘게 된 것을 비유함
천왕봉이 보이는 곳
지리산 천왕봉 (해발 1915m)
천왕봉에서 보는 산하
-다음의 시는 단속사 주지스님이 문도를 시켜
1485년에 지은시 2수를 가져와서 전운의 시를 써 줄것을 부탁했다는 점과
시의 마지막 구절에 "함께 놀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내용으로 볼때
아마도 유호인(극기) 사후인 1494년 이후에 쓴 시로 보인다.
단속사 주지 스님인 계징이 문도를 보내어
내가 을사년(1485년 성종 16년)에 지은 시 두 수를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이어 전운으로 시를 써 주기를 구하므로 써주다.
(斷俗寺住持僧戒澄遣門徒, 持示余乙巳所題詩二首, 仍乞詩用前韻寄之)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연좌관공고의심(宴坐觀空古意深) 한가롭게 앉아 하늘을 바라보자 옛 생각이 간절하여
표연종적재운림(飄然蹤迹在雲林) 표연히 종적은 구름에 쌓인 숲 속에 있다.
세심빈시조계수(洗心頻試曺溪水) 마음을 씻으려 자주 조계수를 찾으니
상이편련지뢰음(爽耳偏憐知籟音) 한편으로는 듣기에 상쾌한 댓바람소리가 좋았다.
송광연하공노안(松廣烟霞供老眼) 솔숲에 펼쳐진 안개는 늙은이의 눈에도 보기 좋고
두류원학화고음(頭流猿鶴和孤吟) 두류산의 원학은 내 노래에 화답한다.
일지공장쌍망교(一枝笻杖雙芒屩) 지팡이 하나 들고 짚신신고 찾아드니
도골추래수불금(到骨秋來瘦不禁) 뼈 속까지 스미는 가을 기운을 막을 수 없구나.
억석등거동학심(憶昔登攀洞壑深) 옛날 깊은 골짜기를 타고 오른 것을 생각하니
백운홍수영상림(白雲紅樹映霜林) 백운과 붉게 물든 나무가 서리 숲에 어린다.
승잔구폐필추실(僧殘久閉苾蒭室) 스님도 없는 승방은 오래도록 닫혀있고
야정유문종경음(夜靜惟聞鍾磬音) 고요한 밤이면 오직 풍경소리만 들린다.
지리산의 산그리메
대탑처량경단몽(對榻凄凉驚短夢) 탑상이 쓸쓸하여 놀라 잠도 설치고
도등강개동고음(挑燈慷慨動高吟) 등불을 돋우며 강개하여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
구유회수인하처(舊遊回首人何處) 생각하니 옛날 함께 놀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촉발비회누불금(觸撥悲悔淚不禁) 슬픈 회포를 다스리려니 눈물을 금할 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