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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향교와 가학루(駕鶴樓)

안천 조각환 2025. 4. 19. 23:02

황간향교(黃澗鄕校)는 1394년(태조 3)에 황간현감 하첨(河詹)이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황학루(黃鶴樓)를 세우고, 황간현(縣)의 뒷산에 창건하였다.

 

황간향교 전경

 

그 후 1666년(현종 7)에 토성(土城) 안으로 이건하였고,1752년과 1755년,

1901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872년(고종 9)에는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홍살문

 

대성전에는 5성(五聖)과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고있다.

 

외삼문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 대제를 봉행(奉行)하고 있으며

소장전적은 판본 14종 116책, 사본 3종 4책 등이 있다.

 

명륜당(明倫堂)

 

명륜당 측면

 

명륜당 뒤에서

 

명륜당 편액

 

대성전 오르는 계단

 

내삼문(신문,神門)

 

대성전(大成殿)

 

이곳 대성전에는 5성(五聖)과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5(五聖) : 공 자(孔子), 안 자(顔子), 증 자(曾子),  자사(子思), 맹 자(孟子)     

송조 4(宋朝 四賢) : 주돈이(周敦), 정 호(程顥), 정 이(), 주 희(朱熹

한국 18 : 신라 최치원(崔致遠),  설 총(薛聰), 고려 안 유(安裕), 정몽주(鄭夢周) 

조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 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 이(李珥), 성 혼(成渾), 조 헌(趙憲),

 김장생(金長生), 김 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俊吉), 박세채(朴世采)

 

은행나무와 측백나무

 

고직사와 협문

 

고직사

 

협문

 

황간향교 앞뜰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孔子)

 

매봉 안병찬(安秉讚)  송덕비와 전교 곽정균(郭貞均) 공적비

 

명륜당 앞뜰의 성생대(省牲臺)

 

성생대 제향 때 사용할 양이나 돼지를 올려놓고

제물의 영양상태와 건강상태를 살피는 성생의를 행하는 곳

 

공자의 근본사상 "인의예지(仁義禮智) ~ 매봉 안병찬(梅峰 安秉讚,1930~ ) 쓰다

 

황간향교 경내의 가학루(鶴樓)

 

가학루는 1393년(태조 2) 황간현감 하첨(河詹)이 처음 창건하여

황학루라 하고 선현들을 배향하였는데, 당시 경상도 관찰사

남재(南在,1351~1420)가 세월과 세상이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하다는 뜻에서 가학루(鶴樓)라 하고 편액을 달았다.

 

가학루 측면

 

그 뒤 1490년(성종21 년)7월, 당시 황간 현감 손번이 중수(1차)하였으며

이 때 매계 조위(梅溪 曺偉)선생이 가학루 중수기를 썼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타 광해군 때에 현감 장번(張蕃)과 구장원(具長源)이,

숙종 때에는 현감 황도(黃鍍)가, 정조 때에는 현감 이운영(李運永)이,

그리고 1930년에는 군수 김석영(金錫永)이 각각 중수하였다.

 

가학루 앞면

 

황간 가학루 중수기(黃間 駕學樓 重修記)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

 

황간 고을은 드높은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동남쪽의 모든 계곡의 물들이 그 아래로 돌아 꺾이어 서쪽으로 가는데 세차게

흘러 돌에 부딪치면 거문고와 비파, 피리 같은 소리가 주야로 끊어지지 않는다.

 

가학루 측면

 

고을 서쪽 오리쯤 되는 곳에 서너 봉우리가 우뚝 솟아 들여 볼 듯 섰는데,

그 가운데 청학굴이 있다. 바윗골은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객관 모퉁이에 성가퀴가 있어 푸른 언덕에 임해있고,

그 위에 옛날부터 누대가 있었는데, 이것이 가학루라고 한다. 영락 연간(永樂年間)에

상공을 역임한 귀암 남재(南在)가 현판을 달았다. 그 뒤에 불에 타서 객관과 함께

모두 재가 되었고, 다만 주춧돌만 남아 있은 지 사십 여년이나 되었다.

 

누대 마루

 

성화 병오년(1486년, 성종17년)에 밀양 손번(孫蕃)이 청아하고 통달한 재주로써

교서관에 뽑혀 들어갔다가 어버이가 늙음을 이유로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해서

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부임 하자마자 기강이 일신해지고

한 해도 되지 않아 고을 안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에 아전 및 백성들과 의논하여 공장(工匠)들을 모아서

객관을 중수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기유년(1489년, 성종20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1490년, 성종21년) 7월에 완성하였다.

 

누대에서 보는 황간 소재지

 

먼저 정청(政廳)을 세우고 다음으로 익실(翼室)을 지었으며, 익실 동남쪽에는

옛터에다 누대 세 칸을 나란히 짖고 그리고 나서 가학(駕鶴)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비록 이것은 기왓장과 들보가 서로 연해서 따로 지은 것은 아니나 바라다보면 날아가는듯하고

난간과 문 가운데 강산을 맞아들이고, 책상과 자리위에 항해(沆瀣)를 일으키는듯하며

허공에 매달린 듯한 빼어난 경치가 실로 이한도(충청도)에서 제일이었다.

 

 

여기 오르는 자는 표연히 낭원(閬苑)과 단구를 밟는 듯하다.

손 현감이 이 누각을 중수한 대강을 글로 적어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컨대 경(境)이 스스로 명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서 명성이 되는

것이니, 폐하고 흥하는데 경과 사람이 만나고 합하는 운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누대에서 보이는 향교

 

우주에 이 강산이 생긴 이후로 반드시 구안자(具眼者)를 기다려야만 능히

 그것을 발휘되고 이름을 드러내어서 문자로 적어 무궁하게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니,

황강(黃岡)이 소동파를 만나지 못했으면 적벽이 어찌 이름을 나타냈을 것이며,

무이(武夷)가 주회암을 만나지 못했으면 운곡이 어찌 이름이 알려 졌겠는가?

 

가학루 중수기와 시 편액들(1)

 

그러나 소동파의 필력과 주회암의 도화도 반드시 적벽과 무이의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니, 경치와 사람이 서로 만나고 서로 도움을 주는 유익함을 어찌하겠는가?

이제 황간의 시내와 산과 문물은 처음에는 귀암(남재)을 만났고, 두 번째는

손 현감을 만나서 하늘이 능히 숨기지 못하고 땅이 능히 감추지 못해서,

그 맑은 경치를 더욱 더하게 하고, 그 정채를 발하게 되었으니,

어찌 천고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학루 중수기와 시 편액들(2)

 

손 현감이 정사를 보는 여가에 여기 올라가 바라보면, 청산은 스스로 푸르고,  

백운은 스스로 희어 마음 가운데 조그만 티끌도 일어나지 않아서, 소연히 세상 근심의

시끄러운 것을 잊고, 유연히 도체의 유행함을 보아서 학문이 날마다 고명 광대한 지경에

나아갈 것이니, 어찌 한갓 그 문장을 크게 드날리고 그 생각하는 것을 도울 뿐이겠는가?

그러면 이것은 황간의 다행함이겠는가? 또한 손 현감의 다행함이겠는가?

 

가학루 시비(1)

 

나는 티끌 속에 파묻혔으면서 남쪽나라의 강산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한지 오래되었다.

훗날 어떤 일이 있어 남쪽으로 가게 되면 이곳에 가서 놀며 누각에 올라 한번 취해

임고도사의 꿈을 다시 잇고, 구령자 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최호와 이태백의 시를

읊으며 가학의 뜻을 자세히 토로하여 묵은 소원을 풀어볼까 하노라. 라고 하였다.

 

가학루 시비(2)

 

            서거정(徐居正,1420~1488)

 

황간고을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떠나려다 머물러 앉았네.

학은 날아가고 누각만 남아있는데

산은 높고 물은 유유히 흘러간다.

 

누각이 높아 굽어보면 날으는 새등을 보고

이곳은 거북머리 같은 곳에 누각이 서있네.

기쁜 마음으로 누각에 오르는 즐거움에

노래와 시를 읊으며 오래동안 놀았네.

 

가학루 시비(3)

 

퇴계 이 황(退溪 李滉,1501~1570)

 

지세는 높고 넓은 곳이라서

산을 좋아하는 나그네 머물고 싶어하네.

잔설이 석양빛에 비쳐 더욱 밝게 빛나고

봄 강물 흐르는 곳에 접동새 날아가네.

 

이 좋은 경치보고 놀라 눈 크게 뜨고

글을 지으려고 머리 돌려 보았네.

신선은 말보다 날으는 것이 좋아

                             구름위에서도 마음껏 놀고 있을 것이다.                            

 

가학루 시비(4)

 

회곡(晦谷) 허온(許蘊)

 

높은 언덕에 학으로 인해 학처럼 생긴 누각 가학루

학은 어디로 날아가고 누각은 비었지만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구나.

구름 개인 외로운 성 황간읍은 삼백가구쯤 사는가?

산들로 둘러쌓인 견훤의 옛 도읍지엔 오랜 세월이 흘렀네.

 

하늘가 쳐다보며 선녀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하니

이제 이 땅에 누가 있어서 모든 이의 늙음을 걱정하랴.

옛 태수의 잔치 노랫소리를 기록하지 말아다오

지금은 바람과 달만이 누다락에 가득할 뿐이니.

 

벗꽃이 질무렵인 가학루와 황간향교 앞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