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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박응훈의 호랑이 이야기와 흥학당

안천 조각환 2025. 4. 21. 22:02

영동군 황간에서 물한리계곡쪽으로 가는 매곡면 길가 언덕에는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1539∼1590)의 효자문과 바로 옆에는

통덕랑(通德郞) 박수현(朴守玄)의 처 열부 선산 김씨 열녀문이 있다.

 

효자문과 열녀문이 동시에 있는 쌍려문(雙閭門) 

 

오촌 박응훈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박이룡 장군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는데, 부모상을 당하여 장지를

구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소를 정해 주었으므로 이를

호점산소(虎占山所)라 하며, 묘소는 황간면 소계리 안산에 있다.

 

효자 오촌 박선생 응훈 지려(孝子 梧村 朴先生 應勳 之閭)

 

박응훈은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공을 지켜 주었다고 하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 34년(1601년) 정려가 내려졌고, 현종때 송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효자각 안의 호랑이그림

 

열부 통덕랑 박수현처 공인 선산김씨 지려

(烈婦 通德郞 朴守玄妻 恭仁 善山金氏 之閭)

 

열려문은 통덕랑(通德郞) 박수현(朴守玄)의 처 열부 선산 김씨를

표창하는 문으로 경종 3년(1723년)에 정려되어 쌍려문이 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 둥근기둥의 맞배 기와집으로

1976년 도로확장 공사시 약간 위로 옮겨져 다시 세워진 것이다.

 

쌍려문 옆에 세워진 호랑이 석상

 

매곡면 내동마을 충주박씨 종중서당(재실)인 흥학당 앞 호랑이 상

 

한편 호랑이는 박응훈이 아침저녁으로 성묘할 때에도

앞장서서 이슬도 털어주고 꼬리로 흰 눈도 쓸어 주기도 했다.
박응훈은 3년동안 갖은 정성을 다해 시묘살이를 마치고,

아버지곁을 떠나 집으로 내려올 때 같이 있었던 호랑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호랑이는 고개만 끄덕이면서 깊은 산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효자 박응훈의 호랑이 이야기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꿈속에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산을 달려 가다

커다란 함정에 빠져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 보니 한밤중이었는데 옷을 주섬주섬 입은 후 말을 몰아

백여리가 넘는 산길을 달려 가까스로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 있고 은공의 호랑이는 쓰러져 죽은 채 함정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충주박씨 종중 서당인 흥학당(興學堂)

 

 이 건물은 1520년(중종 15)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당시 황간 현감이던 박영(朴英,1471~1540)선생의 지시로 처음 지었다.

 

박응훈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면서 관가로 즉시 달려가서 호랑이와

관계된 사연을 원님께 아뢰었으며, 윈님도 출천지효라고 말하면서

관군을 동원하여 호랑이를 운반하여 그의 집까지 옮겨주엇다.

 

흥학당 정문인 흥덕문(興德門)

 

오촌은 그의 아버지 산소 맞은편 선산에 호랑이를 묻어줬다.

실제 황간면 소계리 상주골에는 호랑이 무덤인 호총(虎塚)이

남아 있으며, 호총은 봉분에 비석까지 사람의 묘와 동일한 형태다.

 

대수선중인 흥학당

 

효자 박응훈에게 후손이 없어 방손들이 400여년간 제를

정싱껏 모시며 호랑이의 묘인 호총에도 술, 포, 과일 등

모든 음식을 정성껏 차리고 제를 올리고 있다.

 

흥학당 뒷면

 

세덕사(世德祠) ~ 사당

 

봉유재(奉裕齋)

 

이 건물은 안주목사 박성량(朴成樑)량을 기리기 위해 1632년에 건립한 재실로

처음에는 현판도 없이 소종재라 불렀으나 뒤에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는

의미로 봉유재라는 현판을 설치하고 재실과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봉유재 정문

 

흥학당 앞 학유헌(學裕軒)

 

학유헌 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