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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매계 조위(曺偉) 선생

율수재와 마암재기 편집자료

by 안천 조각환 2026. 3. 7.

율수재와 마암재기 편집자료

율수재(매계구거)

목록

 

1.율수재의 뜻

2.율수재기 ~ 권진응

3.율수재중수기(관찰사 조시영)

4.도덕문

5.지도재

6.유예재

7.율수재 시판(詩板) ~ 1)

8.장초교화우쇄금(墻草喬花雨灑襟) ~ 시판(詩板) ~ 2)

9.근차매계정사중건운(謹次梅溪精舍重建韻) ~ 시판(詩板) ~ (3)

10.율수재 주련

11.율수재 중수 기공기(聿修齋 重修 紀功記) ~ 문장공파 대종회

12-1.마암재상량문(원문)

12-2.마암재상량문(馬巖齋上樑文) ~ 원문(한문)

12-3.마암재상량문(해설)

13.마암재 주련 해설

14.증이조참판휘계문 배정부인문화류씨비문 ~ 묘지석

15.매계선생 신도비와 사적비문 요약

16.호조참판 증이조판서 시문장공매계선생신도비병서

17.만분가

18.임청대기

19.임청대비음

20.두시서

21.두시언해 일부

22.매계 조위선생 영정과 친필시

23.문장공 매계 조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교지

24.매계선생 문인록

 

율수재 편액

 

1,율수재(聿修齋)

 

율수재( 聿修齋)의 율수( 聿修)란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시에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德)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天命)에 합함이 스스로 많은 복(福)을 구하는 길이니라

(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즉 성대한 복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상의 덕을 닦으면

저절로 구해진다는 의미이며, 여기에서 "조상의 덕을 닦는다"는

의미를 취하여 율수(聿修)라는 말을 가져 왔다

 

율수재기 ~ 권진응

 

2.율수재기(聿修齋記) ~ 권진응

 

정유(丁酉)년 정월(正月)에 개수(改修)하였다.(1747-영조.英祖 23)

 

이 금산(金山)의 매계당(梅溪堂)은 곧 문장(文莊) 조(曺)선생이 학문을

전력하던 유허(遺墟)로 그 수석이 그윽하고 깨끗하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노닐만한 곳이다. 내가 일찍이 한번 찾아가 놀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작년 가을에 선생의 후손(後孫) 박이 나에게 글을 보내어 

“나의 선조 문장공(先祖 文莊公)이 사화(史禍)를 입은 뒤로

매계당(梅溪堂)이 폐허(廢墟)된지 이미 백여년이 흘렀다.

 

그때에 나의 조부 우졸당공(祖父 愚拙堂公,휘 유,諱 逾)이 그곳에

움집을 짓고 글을 읽다가 불행이 일찍 별세하시고 집도 따라서 무너졌으므로

중부(仲父) 인제공(認齋公,휘 세룡, 諱 世龍)과 계부(季父) 경지재공(敬知齋公,

휘 세붕,諱 世鵬) 뒤를 계승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내가 모든 제질(弟侄)과 의논하여 집을 지으니모두 아홉칸으로

중부(仲父)와 계부(季父) 두 분의 유지(遺志)를 어느 정도 이루어드린 셈이다.

마침 선사(先師) 구암(久菴) 윤선생(尹鳳九)의 유상(遺像)이 이곳을 지나기에

당중(堂中)에 모신다음 사자(士子)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이어 제질(弟侄)과 마을의 수재(秀才)들을 거느려 날마다 학문을 강독(講論)하니

지금 감히 조여부(祖與父)의 유지(遺志)를 원만히 계승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자네는 이 기()를 써 달라. 고 하였다.

! 사람이 그 조상의 어짊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불명(不明)이요

어짊을 알고도 천양(闡楊)하지 않는 자는 불인(不仁)이니

불명(不明)과 불인(不仁)은 불효(不孝)라 이른다그러므로

사전(思傳, 중용,中庸)에 효()하는 자는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며

조상의 일을 잘 서술한다. 하였고 또 승전(曾傳, - 대학,大學)

선대(先代)의 어진 이를 어질게,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긴다. 하였다.

지금 문장(文莊)선생의 도덕 문장(道德 文章)과 우졸당공(愚拙堂公)

독지역학(篤志力學) 다 세상의 준칙이 될 만하고 그대의 제부(諸父) 

그 미적(美蹟)을 계승하였는데 그대가 또 여기에 전력일체 

모습대로 당()을 중건(重建)한 다음 시경(詩經)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여

스스로 덕을 닦아야 한다. 는 뜻에 경경(競競-두려워하고 삼가는 것)하여

더욱 근면하고 그 자제들에게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으니,

이는 그 어진 이를 어질게,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의()를 알았고

또 그 뜻을 계승, 이를 서술하는 효()를 다한 것이다.

 

내가 다행히 이 다음 병이 낳아 그곳에 가서 노닐게만 된다면그곳에

있는 이들이 다 독서 수신(讀書 修身)하여 능히 그 가업을 계승하는가 하면

혼가(婚嫁), 상장(喪葬), 음식(飮食)에 예절이 맞고 읍양(揖讓), 진퇴(進退),

제사(祭祀) 질서가 정연한 것을 구경하고 나서 그 교화(敎化)의 성취를

즐거워하며제군자(諸君子)의 말석에 앉아 향음주례(鄕飮酒禮)

 

노래 소리를 듣고 헌수(獻酬,술잔을 주고받는 것)하는 술을 마시고 나서

()를 지어 선생의 덕을 찬양하고 계산(溪山)의 절경(絶景)을 기록해도

기회는 늦지 않을 것이다아직 이만 쓰며 다음을 기다린다.

 

 "숭정왕 계사중춘 안동 권진응 기(崇禎王 癸巳仲春 安東 權震應 記)"

 17732  안동 권진응이 쓰다" 

 

 율수재기를 쓴  권진응(權震應,1711~177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이며,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명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자이다.

또한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독서에 전념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의정부 대신들과

이조의 당상관들이 모여 인재를 추천하는 초선(抄選)으로

시강원의 정7품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율수재중수기 ~ 조시영

 

3.율수재중수기(聿修齋重修記) ~ 관찰사 조시영(1891년,신묘)

 

상낙(商雒:尙州)의 웅이산(熊耳山)이 서쪽으로 달려 문암(文巖)이 되고 또 서남쪽으로 꺾여서 사인봉(舍人峰)이 되며 사인봉 아래 조금 남향으로 아름답게 감돌며 스스로 일국(一局)을 이루고 있으니, 곧 나의 선조 매계(梅溪) 선생의 구거(舊居)이다. 선생의 서제(庶弟) 적암공(適庵公)이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고 선생의 자씨(姊氏)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배우(配偶:아내)로 또한 문장에 능숙하였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삼문장(三文章)의 터라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중엽에 이르러 참봉공(參奉公) 네 분 형제가 긍구(肯構) 생각에 능하여 모옥(茅屋)을 지어두고 책상에 마주 앉아 공부하였다. 나의 고조부와 증조부의 항렬에 이르러 모옥을 기와집으로 고치고 제도를 또 넓혀서 대대로 자손들의 장수(藏修)하고 유식(遊息)할 곳으로 삼았었다. 지금 100년에 가까워 재목이 부패하여 마치 다가오는 아침저녁에 무너질 것 같거늘 이에 문중의 부로(父老)들에게 알리고 목수에게 맡겨 새는 곳을 고치고 종중의 힘을 보충함에는 넉넉한 사람들이 의연금을 내어 도와 한 달 만에 일을 마치고 지극히 깨끗하여 서당의 모습이 일신(一新)하니, 산골짜기 안에 소나무, 대나무, 오동나무와 화초(花草)와 수석(水石)이 모두 우리 물외(物外)의 간직함이 되어 마을에 떨어지는 물 방물과 살아나는 안개가 서로 통하여 그윽하게 막혀 있는 것을 무엇으로도 이름을 지을 수 없으니, 진실로 숨어 사는 사람이 노닐 곳이니, 시경(詩經)에 위풍편(衛風篇)의 고반(考槃) 이원(李愿) 반곡(盤谷)이 금고(今古)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움이다. 이달 보름에 마을의 수재(秀才)들을 거느리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낙성(落成)하니, 독서(讀書)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다시 들리고 선부형(先父兄)의 숙덕(淑德)과 영망(令望)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소자 후생이 본받을 곳이 없어져 문장에 임하여 문조(門祚)의 천박(淺薄)하여 짐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릇 선조의 후손들이 율수(聿修) 뜻을 척념(惕念)하고, 선조의 서업(緖業)을 떨어트릴 것을 두려워하며 오직 학문에 힘쓰면 군신(君臣) 간의 의리와 부자(父子)간의 자애를 배워서 취합하고 물어서 변별하고 관대함으로 살며 인후(仁厚)를 행함에 게으르지 말고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 은택은 사물에 미칠 수 있으니, 각각이 힘써야 할 것이다. 신묘(辛卯,1891년 고종28) 10월 일에 불초(不肖)한 후손(後孫) 시영(始永)이 삼가 기록하다.

 

[商雒 熊耳山 西馳爲文巖하고 又西南으로 折爲舍人峰하니, 峰之下少南  縈廻窈亮하야 自成一局하니 卽我先祖梅溪先生之舊居. 先生之庶弟適庵公 以文章으로 鳴于世하고 先生之姉 爲畢齋金先生配하여 亦嫺於文句하니 世所稱三文章墟者是也. 在中葉參奉公四昆季 克於肯構之思하야 結茅爲屋하고 對床讀書러니 逮高曾行하여 改茅用瓦하고 制又廣之하니 世世爲子姓藏修遊息之所矣. 今近百稔 腐敗漫漶하여 若將朝暮焉仆하니 於是 告于門父老하고 任匠氏而架漏補罅하여 宗中之力 優者出義助之하여 首尾一朔而功訖하니 極其精灑하여 堂貌改觀이라. 一壑之內 松竹梧檟 花卉水石 盡爲吾物外之藏이라. 村居滴瀝吠煙 若相通而幽闃阻夐 不可名狀하니 儘隱者之所盤旋而衛人之考槃이며 李氏之盤谷 可匹美於今古也. 是月之望 率村秀才하여 行鄕飮禮而落之 하니 絃誦之聲 依俙復聽이어늘 而先父兄之宿德令望 次第零落하니 小子後生 無所考德하니 臨文嗟悼하여 未嘗不流涕於門祚之淺薄이라. 凡爲先祖之後者 惕念聿修之意하고 墜緖爲懼하야 惟學是懋하니 君臣之義 父子之仁 聚辨居行하여 無怠無忽則 澤可以及物이니 其各勉之어다

辛卯十月 日 不肖後孫 始永 謹記하노라

 

율수재중수기 요약

율수재는 1891(신묘,辛卯) 10월에 다시 중수하게 되며,

관찰사 조시영(曺始永,1843~1912) 중수기를 썼는데 이를 요약하면

1).매계 선생의 자취인 율수재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자 영남

사림의 거두였던 매계 조위 선생이 거처하던 곳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고 허물어진 안타까운 상황을 먼저 언급하였다.

2).중수를 하게된 계기와 과정은 매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지키기

위해 후손들과 뜻있는 분들이 마음을 모아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집을 다시 번듯하게 세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3).정신적 계승과 단순히 집을 수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곳에서 선생의

높은 기개와 유풍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관찰사)

 

도덕문

 

4.율수재 도덕문(道德門)

 

율수재의 도덕문(道德門)은 매계선생이 사망한지 204년이 지난

1707년(숙종 34)에 나라에서 문장(文莊)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자 그 기념으로 세운 문이다.

 

시법(諡法)에서는 도덕박문으로 가로대 ()이라 하고,

행함이 바르고 뜻함이 온화하므로 가로대 ()이라 하여

"도덕박문왈문 이지화왈장(道德博文曰文 履志和曰莊)으로

줄여서 도덕문(道德門)이라 했다. 문장(文莊) 시호의 근원이다.

 

 시법(諡法)이란  시호, 묘호, 존호 등을 붙이는 데 쓰는

법칙을 말하며, 시호법(諡號法)이라고도 한다.

 

 

지도재

 

5.율수재 지도재(志道齋)

 

 지도재란 도에 뜻을 두는 집이라는 의미로 논어의 술이편에 나오는

...지어도(志於道)...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단순히 지식을 쌓는곳을

넘어 올바른 삶의 길이나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유예재

 

6.율수재 유예재(遊藝齋)

 

 유예재란 "끊임없이 수양을 통해 도달한 즐거움을 누리는 공부방"

이라는 의미로 논어 술이편의 "지어도 거어덕 의어인유어예"에 나오는

구절로 학문과 수양의 마지막 단계로 군자가 육예(六藝) 즉 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서예. 수학을 익혀 그 경치가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가 노닐듯 자유롭고 즐거운 경지에 아르는 것을 말한다.

 

율수재시판(1607년) ~ 김영, 조신, 김희수, 유경심

 

7.율수재 시판(詩板) ~ 1

 

이 시판에는 삼당 김영(三塘 金瑛)과 적암 조신(適庵 曺伸),

몽정 김희수(夢禎 金希壽), 구촌 유경심(龜村 柳景深) 등이

1607(선조 40) 6월 상순에 한자리에 모여 읊은 ().

 

성주목사와 저녁노을이 깃든 매화나무 가에서 함께 마시며

성목군재공음서하매상(星牧郡宰共飮栖霞梅上 

 

                               삼당 김영(三塘 金瑛)

 

 회포를 풀려고 처서가 지났어도 높은 누각에 오르니

 태수의 오늘 아침은 점 쾌가 한가롭게 좋게 풀렸네.

인사를 나누고 바둑을 두는데 엎치락뒤치락

 연못 속의 연꽃은 오동나무 대나무 가린 틈으로 보이네.

 

개회도서고루상(開懷度暑高樓上) / 태수금조호점한(太守今朝好占閑)

인사수담번복희(人事手談翻覆戱) / 지하오죽폐휴간(池荷梧竹蔽虧看)

 

 노래는 슬픈 곡조가 되고 잔을 돌리라고 재촉하고

 산에 가린 저녁노을에 물 기운도 싸늘하네.

십리 황혼 길을 말을 걸터타고 돌아오는데

 숲 바람 개울물 소리가 패옥소리처럼 울리네.

 

가성고조배행촉(歌成苦調盃行促) / 산엄잔양수기한(山掩殘陽水氣寒)

십리황혼과마반(十里黃昏跨馬返)  / 임풍거류향산산(林風渠溜響珊珊)

 

 삼당 김영(三塘 金瑛,1475~1528)

사헌부 감찰, 영천군수,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김응교 영의 시에 차운하다 / 차김응교영지운(次金應敎英之韻) 

 

                                         적암 조신(適庵 曺伸

 

 세월 따라 누대도 다시 오래된 것을 새롭게 짖고

 높은 곳에 오르니 감회가 새로워진 시인이 있네.

 저녁노을은 물속에 닿아 연꽃을 밝히고

 빗 기운은 온전히 나무의 몸통까지 적셨네.

 

수세누대갱고신(隨世樓臺更故新) / 감회등척유소인(感悔登陟有騷人)

하광도침명연작(霞光到浸明蓮芍) / 우의전침습수신(雨意全沈濕樹身)

 

 이앙한 모가 모두 뿌리를 내린 논 두둑을 어슬렁거리다가

 거울처럼 잔잔한 물을 흡족한 마음으로 막고 서있네.

 부들자란 마당에 매화와 대나무는 진실로 나의 익우이니

문서를 깨끗하게 쓸어내고 복건을 벗으리라.

 

추무농공개착본(趍畝農功皆着本) / 의란수감흡전신(倚攔水鑑恰傳神)

포정매죽진오익(蒲庭梅竹眞吾益) / 소정문서탈폭건(掃靜文書脫幅巾)  

 

 매번 높은 누각에 오르며 한 번 씩하고 웃으니

 고을 안의 늙은이들은 우리들 친구

일곱 차례나 연경에 갔다 왔어도 아직도 혀가 남아있고

 세 차례나 성난 바다를 건넜어도 아직 죽지 않은 몸

 

매상고루일소신(每上高樓一笑新) / 군중유로속오인(郡中遺老屬吾人)

칠분연새유존설(七奔燕塞猶存舌) / 삼섭경파미사신(三涉鯨波未死身

 

주인장이 때대로 불러주는 잔치에 참여하고

 원옹과 약속하고 토지신에게 제를 올리네.

 지금의 왕찬이여 부를 짓지 마라.

돌아가 거친 책상을 쓸어내고 갈건을 써보네.

 

지주시초참객연(地主時招參客宴) / 원옹유약새전신(園翁有約賽田神)

지금왕찬휴제부(至今王粲休題賦) / 귀불조상시갈건(皈拂糟床試葛巾

 

 적암 조신(適庵 曺伸,1454~1529)은

  사역원정, 통신사군관을 역임하였으며, 조위선생의 동생이다.

 

제목없음(무제,無題)

 

                            관찰사 김희수(觀察使 金希壽)

 

 늦봄도 지나 고향땅은 애석하게 꿈속에서나 돌아오고

 나그넷길에 또다시 자만한 사이 사월이 왔네.

 온종일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는 코에 가득하고

푸른 숲 여기저기엔 팥배나무꽃만 붉게 피어있네.

 

삼촌감석몽중회(三春堪惜夢中回) / 객로환과사월래(客路還誇四月來)

진일풍훈향옹비(盡日風薰香擁鼻) / 청림처처야당개(靑林處處野棠開) 

 

몽정(夢禎) 김희수(金希壽,1475~1527)는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

글씨에 능했음

 

운을 따옴(차, 次)  ~  적암 조신(適庵 曺伸)

 

 태평성대의 한해도 돌아 다시 봄이 오게 하니

죽마 탄 아이처럼 자사(관찰사)가 오시는 것을 맞이하네.

 떠난 후에도 자사를 사모하는 마음이 아직도 연연한데

 하물며 향안을 품평하고 화개시를 짓기까지 하셨으니

 

남훈화축사성회(南薰化逐使星回) / 기죽아영자사래(騎竹兒迎刺史來)

거후감당유연연(去後甘棠猶戀戀) / 황제향안부화개(況題香案賦花開)

 

또 (又)  ~  적암 조신(適庵 曺伸)

 

 청춘시절은 되돌리기가 어려워라

 70먹은 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네.

 대를 심고 꽃에 물을 주며 한가한 일로 만족하니

 다만 인간 세상에 나처럼 좋은 흥취 열린 사람 없구나.

 

청춘백일만난회(靑春白日挽難回) / 칠십리옹귀거래(七十裏翁歸去來)

종죽요화유사족(種竹澆花幽事足) / 독무인간호회개(獨無人間好懷開)

 

 

운을 따서(차, 次)

 

                        구촌 유경심(龜村 柳景深, 1516~1571)

 

 만고의 영웅이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높은 하늘엔 오직 달만 돌아왔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앞산의 막힘을 깎아내어

 술 취함 속에 두 눈을 유쾌하게 한 번 떠 보리라.

 

만고영웅거부회(萬古英雄去不回) / 장천유유월귀래(長天唯有月歸來)

하방잔각전산옹(何方剗却前山擁) / 취리쌍모쾌일개(醉裏雙眸快一開)

 

*삼당 김영(三塘 金瑛,1475~1528) : 사헌부 감찰, 영천군수,사헌부 장령을 역임

적암 조신(適庵 曺伸,1454~1529) :  사역원정, 통신사군관을 역임(조위의 동생)

몽정(夢禎) 김희수(金希壽,1475~1527) :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 글씨에 능했음

구촌 유경심(龜村 柳景深,1516~1571) :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장초교화우쇄금(墻草喬花雨灑襟) 

 

8. 장초교화우쇄금(墻草喬花雨灑襟) ~ 시판(詩板) ~ 2)

 

장초교화우쇄금(墻草喬花雨灑襟) / 담장의 풀과 큰 나무 꽃에 내린 비가 옷깃을 적시는데

주옹좌재환성암(主翁坐在喚惺菴) / 주인옹은 환성암(喚惺菴)에 앉아 있구나.

노적정오상봉무(露滴庭梧翔鳳舞) / 뜰 오동나무에 이슬 떨어지니 날아 오른 봉황이

                                                     춤추는 듯하고

송풍허동유우남(松風噓動有虞南) / 솔바람 불어오니 순()임금이 남풍시(南風詩)

                                                     노래함이 들려오는 듯

()

억작동년성채금(憶昨童年成彩襟) / 지난 어린 시절 색동옷 입고 재롱부리던 때를 생각하니

제형사부좌신암(諸兄師父坐新菴) / 여러 형님들과 스승을 모시고 새 암자에 앉았었지

약령선자중신향(若令先子中身享) / 만약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살아생전 이를

                                                     누리셨더라면

금일추정학이남(今日趨庭學二南) / 오늘날 뜰을 종종걸음으로 지나며 주남(周南)

                                                    소남(召南)을 배웠으리라

()

반생허부습유금(半生虛負襲儒襟) / 반평생 헛되이 선비의 옷깃 물려받은 본분 저버렸으니

혼사치선입정암(渾似癡禪入定菴) / 온통 어리석은 선승(禪僧)이 암자에서 선정(禪定)

                                                     들어간 것 같네

담박홍진명리택(澹泊紅塵名利擇) / 어지럽고 속된 세상에 명예와 이익을 가림에

                                                     담박(澹泊) 했으니

한간시사례성남(閑看試士禮省南) / 과거 시험 치르는 예조의 남쪽을 그저 한가로이

                                                      바라보네.

 

주석 :

이남(二南) : 시경(詩經)의 국풍 중 '주남''소남'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도리를 의미함.

선정(禪定) :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

담박(澹泊) :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계축 3(癸丑 三月) / 계축년(1733) 삼월

 

 

근차매계정사중건운(謹次梅溪精舍重建韻)

 

9.근차매계정사중건운(謹次梅溪精舍重建韻) ~ 시판(詩板) ~ 3)

                                      / 삼가 매계정사 중건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매계선생 구택황폐백여년(梅溪先生 舊宅荒廢百餘年) / 매계선생의 옛 집이 황폐해진 지

                                                            백여 년이라,

사림지재한구의(士林之齎恨久矣) / 사림들이 안타까워 한지 오래되었다.

금자선생후손조사문박씨(今者先生後孫曺斯文) / 지금 선생의 후손인 유학자 조박씨가

갈력경기(竭力經紀) / 온 힘을 다해 일을 경영하여

잉구기 구성리숙(仍舊基 構成里塾) / 옛 터에 마을 서당을 세우고

솔자질향수(率子姪鄕秀) / 아들과 조카들과 고을의 우수한 인재들을 이끌고

위강업장수지지(爲講業藏修之地) / 학업을 강론하고 마음에 항상 학업을 품고 닦고

                                                     익히기를 그만두지 않는 곳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공고흘(工告訖) / 공사를 마쳤음을 고()하고

회사우향음이낙지(會士友鄕飮而落之) / 선비와 벗들을 모아 향음주례를 행하며

                                                            낙성식(落成式)을 하였는데

이회중초 상시청화(以會中初 相示請和) / 모임 초에 이 시를 서로 보여주며 화답하는

                                                           시()를 청하였다 .

 

다사우우각정금(多士于于各整襟) / 선비들이 많이 모여 각각 옷깃을 정돈하고

녹명제회하신암(鹿鳴齋會賀新菴) / 녹명의 시를 읊으며 함께 모여 새로 지은 집을 하례하네.

매계구업능무추(梅溪舊業能無墜) / 매계의 옛 업적을 능히 떨어뜨리지 않아

현송유풍복영남(絃誦遺風復嶺南) /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든 유풍이 영남에서 회복되었네.

 

               계사(癸巳, 1773, 영조49) 춘일(春日) 동강산인(東江散人) 권형숙(權亨叔)

 

주석 :

*녹명(鹿鳴) : 시경의 소아(小雅)의 편명(篇名). 군주가 신하에게 연향(宴享)을 베풀고

                    신하들이 은혜에 감복하여 충성을 다한다는 내용을 담은 시()

*산인(散人) : 벼슬을 버리고 자연을 즐기며 지내는 사람

*권형숙(權亨叔) : 권진응(權震應, 1711~1775)의 자()로 수암 권상하의 증손자이며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었다.

 

율수재 주련

 

10.율수재 주련(柱聯) ~ 재백련사 차서형자진 운(在白蓮 次庶兄子眞 韻)

                           / 백련사에서 서형인 자진의 시에 차운하다

 

고갯마루 나무는 새벽바람에 윙윙거리고 / 영수명잔야(嶺樹鳴殘夜)

산매화 꽃이 핀 이른 봄이라 / 산매후조춘(山梅候早春)

푸른 댕댕이 덩굴 있는 곳을 떠나려니 / 욕사록라거(欲辭綠蘿去)

원숭이와 학이 성낼까 조바심 든다 / 원학공생진(猿鶴恐生嗔)

 

시의 뜻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한다 / 시의소후인(詩意沼後人)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4개의 주련은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 선생이 백련사에서

서형인 조전(佺), 자(字)는 자진(子眞)의 시에 운을 따서

오언절구 시를 읊은 것으로 매계문집에 실려 있는 시(詩)다.

마지막 왼쪽 주련은 매계의 시를 후세에 전한다는 내용이다.

 

율수재 중수 기공기 ~ 문장공파 대종회

 

11.율수재 중수 기공기(聿修齋 重修 紀功記) ~ 문장공파 대종회

   ~ 중수 기공기 내용 생략

 

매계구거와 매계유허 편액

 

마암재

 

12-1.마암재상량문(馬巖齋上樑文) ~ 원문

 

사계선세지미황(事係先世之未遑) 고의절어근간(固宜切於勤榦)

성영후예지추원(誠濚後裔之追遠) 거감완어경영 (詎敢緩於經營) /

즉 황간현남(卽 黃澗縣南) 야수암하(也須嵒下) 복유(伏惟)

 

울진령증이조참판(蔚珍令贈吏曹參判) 문장공매계선생(文莊公梅谿先生)

양조고부군(兩祖考府君)

조승예법가훈모(早承禮法家訓謨) 울위성명조명철(蔚爲聖明朝名哲)

구의점필 추후최고(摳衣佔畢 推詡最高) 려택두한문장여사(麗澤蠹寒文章餘事)

 

규정기우애군우국지침백계(葵亭記寓愛君憂國之忱栢溪)

청대강론륭사친우지도함절(淸臺講論隆師親友之道咸切)

적의(逖矣) 서토사론무공(西土士論無公) 석호(惜乎) 남주전철유루南州前腏有漏)

 

수록변권병춘추지당당이(首錄弁卷秉春秋之堂堂而)  흉얼구무(凶孽構誣)

혼초붕창애부인지자자이(魂招鵬窓哀夫人之子子而)  량명치송(良明治送)

 

천양화급인송갑자삼소지참(泉壤禍及忍訟甲子三宵之慘)

추오연독서해병인구재지왕(楸梧兗涋庶解丙寅九載之枉)

상봉선고비조역윤의부자동귀(上封先考妣兆域允矣父子同歸)

하렬래운손분영전야척강상호(下列來雲孫墳塋展也陟降相護)

기산명이수저(旣山明而水姐) 호지비이천간(胡地秘而天慳)

소이(所以) 종친순모(宗親詢謀) 기구협언(耆龜協言)

 

내어(逎於)

숭정기원세무자(崇禎紀元歲戊子) 삼월초삼일임인(三月初三日壬寅)

열초동서(列礎東西) 인자자오(引磁子午)

승수영이약연탄교제공(繩數楹而約椽殫巧諸工)

동일방이길거돈사합족(動一方而拮据敦事合族)

고산앙지영무후인사흥탄(高山仰止寧無後人士興嘆)

지주흘여가회왕윤지기도(砥柱屹如可回枉潤之既倒)

이금일송죽지포무(伊今日松竹之苞茂)

서백세화수지돈화(庶百世花樹之敦和)

 

자등지요(茲騰知謠) 거승양려(擧升梁欐) 앙원착보(仰園錯輔) 초수양령(艸樹揚靈)

 

포량동(拋梁東) 읍전장간부광풍(挹前長澗浮光風)

거민선소한천렬(居民鮮少寒泉冽) 산치봉비암불공(山峙鳳飛岩不空)

 

포량서(拋梁西) 상망령호십리계(相望嶺湖十里谿)바라 뵈누나!

세일묘정첨소지(歲一墓庭瞻掃地) 한무재우수리혜(恨無齋宇受釐醯)

 

포량남(拋梁南) 어금숙립야수암(於今焂立也須巖)

백년이후초영사(百年以後初營事) 감왈선인불가담(敢曰先人不暇覃)

 

포량북(拋梁北) 윤언환의여휘익(輪焉奐矣如翬翼)

빙매설국향양개(氷梅雪菊向陽開) 산색총룡재수색(山色蔥龍齋水色)

 

포량상(拋梁上) 광명도의수능상(光明道義誰能狀)

긍긍유수세기구(兢兢惟守世箕裘) 유본종지지엽창(有本從知枝葉暢)

 

포량하(拋梁下) 원소요금산월야(遠泝瑤琴山月夜)

기수춘풍천재여(沂水春風千載餘) 일반청취유수사(一般淸趣有誰寫)

 

복원상양지후(伏願上梁之後) 화풍일광(和風日廣) 선업망두(先業罔斁)

 

채채빈번천추지인사물체(采采蘋蘩千秋之禋祀勿替)

제제현송일당지과갑상련(濟濟絃誦一堂之科甲相聯)

어약연비선생지지리유저(魚躍鳶飛先生之至理有著)

운행우시오조지류방무궁(雲行雨施吾祖之流芳無窮)

 

유왈도자(惟曰塗茨) 율수궐덕(聿修厥德)

 

12-2.마암재상량문(馬巖齋上樑文) ~ 원문(한문 수정분)

 

事係先世之未遑固宜切於勤榦

誠濚後裔之追遠詎敢緩於經營 卽 黃澗縣南 也須嵒下 伏惟

蔚珍令贈吏曹參判

文莊公梅谿先生 兩祖考府君

早承禮法家訓謨

蔚爲聖明朝名哲

摳衣佔畢推詡最高

麗澤蠹寒文章餘事

葵亭記寓愛君憂國之忱栢溪

淸臺講論隆師親友之道咸切

逖矣 西土士論無公

惜乎 南州前腏有漏

首錄弁卷秉春秋之堂堂而 凶孽構誣

魂招鵬窓哀夫人之子子而 良明治送

泉壤禍及忍訟甲子三宵之慘 楸梧兗涋庶解丙寅九載之枉

上封先考妣兆域允矣父子同歸

下列來雲孫墳塋展也陟降相護

旣山明而水姐

胡地秘而天慳

所以 宗親詢謀

耆龜協言 逎於

崇禎紀元歲戊子

三月初三日壬寅 列礎東西 引磁子午

繩數楹而約椽殫巧諸工

動一方而拮据敦事合族

高山仰止寧無後人士興嘆

砥柱屹如可回枉潤之既倒

伊今日松竹之苞茂

庶百世花樹之敦和

茲騰知謠

擧升梁欐

仰園錯輔 艸樹揚靈

拋梁東

挹前長澗浮光風

居民鮮少寒泉冽

山峙鳳飛岩不空

拋梁西

相望嶺湖十里谿

歲一墓庭瞻掃地

恨無齋宇受釐醯

拋梁南

於今焂立也須巖

百年以後初營事

敢曰先人不暇覃

拋梁北

輪焉奐矣如翬翼

氷梅雪菊向陽開

山色蔥龍齋水色

拋梁上

光明道義誰能狀

兢兢惟守世箕裘

有本從知枝葉暢

拋梁下

遠泝瑤琴山月夜

沂水春風千載餘

一般淸趣有誰寫

伏願上梁之後

和風日廣 先業罔斁

采采蘋蘩千秋之禋祀勿替

濟濟絃誦一堂之科甲相聯

魚躍鳶飛先生之至理有著

雲行雨施吾祖之流芳無窮

惟曰塗茨 聿修厥德

 

마암재 편액 ~ 마암재, 야수암, 여재암

 

12-3.마암재상량문(馬巖齋上樑文) ~ 해설

 

사계선세지미황(事係先世之未遑) / 일이 선대(先代)의 미황(未遑,미처 하지 못한 것)에 관계되었으니

고의절어근간(固宜切於勤榦) / 의당 근간(勤幹)을 더해야 하고 

성영후예지추원(誠濚後裔之追遠) / 정성이 후손의 추원(追遠, 선대를 추모하는 것)

 깊었으니

거감완어경영 (詎敢緩於經營) / 어찌 경영(經營)을 지체 시키겠는가?

즉 황간현남(卽 黃澗縣南) / 위치는 바로 황간현(黃澗縣) 남쪽

 

야수암하(也須嵒下) / 야수암(也須巖) 아래일세.

 

복유(伏惟) / 삼가 생각 하건데,

울진령증이조참판(蔚珍令贈吏曹參判) / 울진현령 증이조참판과

문장공매계선생(文莊公梅谿先生) / 문장공 매계(文莊公 梅溪)선생

양조고부군(兩祖考府君) / 두 분 조고부군(祖考府君)

조승예법가훈모(早承禮法家訓謨) / 일찍부터 예법가문(禮法家門)의 모훈(謀訓)

이어받아

울위성명조명철(蔚爲聖明朝名哲) / 울연(蔚然)히 성명 조정(聲明 朝廷)의 명()

되었으며,

구의점필 추후최고(摳衣佔畢 推詡最高) / 점필재(占畢齋) 사문(師門)으로

 추앙이 가장 높았고,

려택두한문장여사(麗澤蠹寒文章餘事) / 일두(一蠹,정여창선생), 한훤(寒暄,

김굉필선생)을 사우(師友), 문장(文章)은 여사(餘事)로 여겼네.

 

규정기우애군우국지침백계(葵亭記寓愛君憂國之忱栢溪) / 규정(葵亭)의 기문에는

애군(愛君우국(憂國)하는 정성이 깊었고,

청대강론륭사친우지도함절(淸臺講論隆師親友之道咸切) / 청대(淸坮)의 강론(講論)에는 융사(隆師친우(親友)하는 도()가 간절했건만

적의 서토사론무공(逖矣 西土士論無公) / 막연할사 . 서토에 사론(士論)이 공정하지

못하고

석호 남주전철유루(惜乎南州前腏有漏) / 애석할사. 영남에 향사(享祀)가 누락되었네.

수록변권병춘추지당당이(首錄弁卷秉春秋之堂堂而) / 첫머리에 수록된 조의제문

(弔義帝文)에는 춘추(春秋)의 의리 당당하건만

혼초붕창애부인지자자이(魂招鵬窓哀夫人之子子而) / () 부르던 붕창(鵬窓, 강소) 에는 그 처지 고단(孤單)한데

흉얼구무(凶孽構誣) / 흉얼(凶孼)들이 죄를 모함하였고

량명치송(良明治送) / 양붕(良朋,김굉필을 이름)이 상사(喪事)를 치송(治送)하였으니

천양화급인송갑자삼소지참(泉壤禍及忍訟甲子三宵之慘) / ()가 지하에까지

 미쳤어라. 어찌 갑자(甲子, 연산군 10, 1504)년에 겪은 사흘 밤의 참혹을 말하겠으며

 

추오연독서해병인구재지왕(楸梧兗涋庶解丙寅九載之枉) / 원한이 오추(梧秋, .墓木)에 깊었어라. 병인(丙寅, 중종 1, 1506)에 비로소 9년 동안의 억울함이 풀렸네.

상봉선고비조역윤의부자동귀(上封先考妣兆域允矣父子同歸) / 위에는 선고비(先考妣)의 묘()가 모셨으니 참으로 부자(父子)가 한 곳에 돌아갔고,

하렬래운손분영전야척강상호(下列來雲孫墳塋展也陟降相護) / 아래는 자손들의 무덤이 벌려졌으니 진실로 척강(陟降, 혼령.魂靈)의 오르내리는 것을 말함)하는데 서로 보호하리.

기산명이수저(旣山明而水姐) / 이곳은 산이 좋고 물이 곱거니

호지비이천간(胡地秘而天慳) / 어찌 땅이 비장(秘藏)하고 하늘이 아끼겠는가?

 

소이(所以) / 이에

종친순모(宗親詢謀) / 종친(宗親)이 합의(合議)되고

기구협언(耆龜協言) / 점사(占辭)가 대길(大吉)하므로

 

내어(逎於) 즈음하여

숭정기원세무자(崇禎紀元歲戊子) / 숭정기원(崇禎紀元) 이후 무자(戊子,1648)

삼월초삼일임인(三月初三日壬寅) / 33일 임인(壬寅)

열초동서(列礎東西) / 동서로 주추놓고

인자자오(引磁子午) /  자오(子午)로 방향(方向)잡아

승수영이약연탄교제공(繩數楹而約椽殫巧諸工) / 두 어 채를 기획하여 장원(墻垣)

쌓으니 모든 공인(工人)이 기교(技巧)를 다하고

동일방이길거돈사합족(動一方而拮据敦事合族) /  한 지방을 동원하여 공사를

 계속하니 온 종족(宗族)이 독려하네.

고산앙지영무후인사흥탄(高山仰止寧無後人士興嘆) / 산처럼 우러르니 어찌

후인들의 감탄이 없겠으며,

지주흘여가회왕윤지기도(砥柱屹如可回枉潤之既倒) / 지주(砥柱)처럼 우뚝하니

 걷잡을 수 없는 광란(狂瀾)을 돌이키리.

이금일송죽지포무(伊今日松竹之苞茂) / 이제 송죽(松竹)처럼 포무(苞茂,집터가

다복한 대나무처럼 공고.鞏固 하고 구조가 무성한 소나무처럼 우밀 하라는 뜻)하니,

서백세화수지돈화(庶百世花樹之敦和) / 거의 백세(百世)의 화수(花樹)가 돈 돈독(敦睦)하리.

자등지요(茲騰知謠) / 이에 짤막한 노래로써

거승양려(擧升梁欐) / 포량(抛梁, 대들보 올리는 것)을 도우니,

앙원착보(仰園錯輔) / 구원(丘園) 보필(輔弼)을 맡고,

초수양령(艸樹揚靈) / 초목이 영령(英靈)을 발양(發揚)하네.

포량동(拋梁東) / 어이여차 대들보, ()으로 향하니

읍전장간부광풍(挹前長澗浮光風) / 전면 긴 시내에 광풍이 떴구나.

거민선소한천렬(居民鮮少寒泉冽) / 민거(民居)는 희소(稀少)하고 찬 샘물 맑은데,

산치봉비암불공(山峙鳳飛岩不空) / 산 우뚝하고 봉(날으니 바위가 비지 않았네

 

포량서(拋梁西) / 어이여차 대들보, (西)로 향하니

상망령호십리계(相望嶺湖十里谿) / 영호(嶺湖, 경상도와 충청도)의 십리계곡 바라 뵈누나!

세일묘정첨소지(歲一墓庭瞻掃地) / 해마다 한 차례씩 세향(歲享) 드릴 적에는

한무재우수리혜(恨無齋宇受釐醯) / 신이 내리는 복 받을 재실(齋室) 없이 한이 없네

 

포량남(拋梁南) /  어이여차 대들보 남()으로 향하니,

어금숙립야수암(於今焂立也須巖) / 이제야 야수암(也須巖) 아래 우뚝 섰네.

백년이후초영사(百年以後初營事) / 백년 이후 처음 경영(經營) 바이라.

감왈선인불가담(敢曰先人不暇覃) / 감히 선대(先代)의 미처 못 한 바이라 하겠구나

 

포량북(拋梁北) / 어이여차 대들보 북()으로 향하니,

윤언환의여휘익(輪焉奐矣如翬翼) / 윤전(輪奠,건물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양)하여

꿩이 나는 듯하네,

빙매설국향양개(氷梅雪菊向陽開) / 빙매(氷梅)와 설국(雪菊) 햇빛을 향해 피었는데,

산색총룡재수색(山色蔥龍齋水色)/ 총룡(蔥龍, 맑고 푸른빛의 표현)한 산 빛이

물빛과 하나일세.

 

포량상(拋梁上) / 어이여차 대들보 위로 향하니,

광명도의수능상(光明道義誰能狀) / 광명(光明)한 도의(道義)를 어느 누가 표현할까?

긍긍유수세기구(兢兢惟守世箕裘) / 삼가 선대(先代)의 유업(遺業) 고수하니,

유본종지지엽창(有本從知枝葉暢) / 그 뿌리에 지엽(枝葉) 무성한줄 알겠네.

 

포량하(拋梁下) / 어이여차 대들보 아래로 향하니,

원소요금산월야(遠泝瑤琴山月夜) / 먼 산 달밤에 거문고 소리 흘러오네,

기수춘풍천재여(沂水春風千載餘) / 기수(沂水)의 봄바람 천여 년의 일(기수에서 몸 씻고

무우에서 바람 쏘인다는 증점. 曾點의 고사.故事)

일반청취유수사(一般淸趣有誰寫) / 똑 같은 청취(淸趣) 어느 누가 묘사하랴.

 

복원상양지후(伏願上梁之後) / 삼가 상량(上樑)한 이후로

화풍일광(和風日廣) / 화풍(和風)이 날로 확산되고

선업망두(先業罔斁) / 선업(先業)이 추폐(墜廢)되지 않아서

채채빈번천추지인사물체(采采蘋蘩千秋之禋祀勿替) / 빈번(蘋蘩,제물을 뜻함)을 마련하여

천추(千秋) 향사(享祀)를 끊이지 말고

제제현송일당지과갑상련(濟濟絃誦一堂之科甲相聯) / 현송(絃誦, 공부를 뜻함)이 끊임없이

일당(一堂)의 과갑(科甲)이 서로 이어지며,

어약연비선생지지리유저(魚躍鳶飛先生之至理有著) / 물고기 뛰고 솔개 날듯선생의

지리(至理) 드러나고

운행우시오조지류방무궁(雲行雨施吾祖之流芳無窮) / 구름일고 비 내리듯 조상의

류방(流芳그지없는가하면,

유왈도자(惟曰塗茨) / 마치 건물에 벽() 바르고 지붕 덮듯이

율수궐덕(聿修厥德) / 저마다 그 덕() 닦기를 바라네.

 

마암재 주련(한메 조현판 글씨)

 

13.마암재 주련 해설

 

1.택조천년지(宅兆千年地) 집터는 천 년을 이어갈 명당이며

                               (천년의 세월을 품은 영원한 안식처여)

2.배감상로절(倍感霜露節) 서리와 이슬 내리는 계절(제사 때)에 감회가 더욱 깊네.

                              (서리 내리고 이슬 맺히는 계절마다 그리움은 더해가네.)

3.매종승선음(邁種承先陰) 부지런히 씨 뿌려 조상의 덕택을 잇고

                              (부지런히 씨 뿌려 조상이 남기신 그늘을 이어받으니)

4.취벽송음전(翠壁松陰轉) 푸른 벽에는 소나무 그림자가 옮겨가네

                              (푸른 절벽 위로 솔그늘이 고요히 몸을 뒤척이는구나)

5.도덕백세사(道德百世師) 도덕은 백 대를 이어갈 스승이 되고

                              (일생의 도덕은 백 대를 이어갈 스승의 길이며)

6.가비풍우시(可庇風雨時) 비바람 몰아치는 때를 가히 가려주네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라)

7.부영대후기(敷榮待後期) 영화로움이 퍼지기를 뒷날에 기대하며

                              (찬란하게 꽃필 앞날의 번영을 기다리노니)

8.주란화영달(朱欄花影達) 붉은 난간에는 꽃 그림자가 비치네.

                              (붉은 난간 너머로 꽃그림자 화사하게 깃들고 있네)

 

정부인 문화류씨 묘지명

 

14.증이조참판 휘계문 배정부인문화류씨비문 ~ 묘지석

(贈吏曹參判 諱繼門 配貞夫人文化柳氏碑文)

 

부인(夫人)의 성()은 류()씨요, 문화인(文化人)이다. 조상(祖上)인 휘차달(諱車達)은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녹훈(錄勳)이 대승(大丞)에 이르렀고 그 뒤로 휘공권(諱公權)과 아들인 휘택(諱澤)은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승지(承旨)로 모두 명성이 있었고, ()의 아들인 문정공(文正公) 휘경(諱璥)은 최충헌(崔忠獻)의 손자인 의()를 베고 고려(高麗)의 왕실을 바로잡아 위두공신(衛杜功臣)에 녹훈되었고 경()의 아들 휘승(諱陞)과 승()의 아들 휘돈(諱墩)은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돈()의 아들 휘량(諱亮)이 우리 태조(太祖)를 도운 공로로 좌의정(左議政)이 되었고, ()의 형() 휘신(諱信)도 높은 벼슬에 이르렀는데 바로 부인의 증조(曾祖)이고 신()의 아들 휘흡(諱洽)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의 아들 휘문(諱汶)은 행주기씨(幸州奇氏)를 맞이하여 부인을 낳았고 부인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창녕 조계문(昌寧 曺繼門)

게 출가하여 일남(一男) ()를 낳았는데 문장(文章)에 능하여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여 제6(第六位)로 합격하고 성종(成宗)의 지우(知遇)를 만나 현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있다. 부인이 연산주 원년(燕山主 元年.1495) 10월 일에 69세를 일기로 금산 옛집에서 별세 이해 모월 모일에 황간에 있는 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의 묘에 부장(祔葬)하게 되자 위()가 서울로 편지를 보내어 이제는 그만이요, 내가 다시는 어머님을 뵐 수 없게 되었소, 나의 어머님은 일생동안 많은 부덕(婦德)을 남기셨는데 이대로 인멸되어 버릴까 걱정이요. 숨은 덕행을 드러내 먼 후세에 보이려면 문헌이 없고는 아니 될 것이오. 더욱이 우리집안의 일을 잘 알기로는 공()만한 이가 없으니 공()은 부디 어머님의 명()을 지어 달라. 고 부탁하였기에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애도(哀悼)해 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부인은 천성이 온화(溫和), 인자(仁慈)하여 여러 종친을 대하는 데는 멀고 가까운 차별이 없이 일체 은()과 신()을 위주로 하였고, 여러 측실(側室)을 거느리는 데는 조금의 질투도 없었고 여러 서출(庶出)을 양육(養育)하는 데는 친생(親生)과 똑같이 하여 은애(恩愛)를 조금도 소홀이 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화사한 것을 싫어하여 의복이나 음식이 검소하였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집에 저축될 여유가 없었고 제사를 모시는 데는 의례 손수 장만하여 그 성()과 경()을 다하였다. 노복(奴僕)들은 그 인자(仁慈)에 감화되어 아무리 부인(夫人)이 모르고 있는 일이라도 감히 속이려하지 않았고 이웃에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아무리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의례 부인에게 먼저 드린 뒤에 먹곤 하였으니, 어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러하겠는가? 이 몇 가지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명()을 지어 찬양할 만하다.

()은 다음과 같다.

문화(文化)에서는 류씨(柳氏), 창녕(昌寧)에서는 조씨(曺氏), 은 쌍미(雙美)를 이루었고 한 아들은 명성이 높았으니 큰 벼슬로 문벌을 부흥시키고 조상을 빛낸 이는 곧 관찰사이지만 부인(夫人)의 숨은 덕() 들어내고 맑은 행() 전파시켜 오랠수록 보존하는데 나의 글까지 있고 보니 금릉의 옛집과 황간(黃間)의 새 무덤은 그 광채 인멸되지 않고 천년만년 유지하리.

허백당 홍귀달 서(虛白堂 洪貴達 撰)

 

매계 조위선생 신도비(우)와 사적비(좌)

 

15.매계선생 신도비와 사적비문(요약)

 

조위(曺偉,14541503)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로 아버지는 울진 현령 조계문(曺繼門)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3(1472)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첫번으로 뽑혔다.

 

그 후 홍문관의 정자 저작 박사 수찬, 사헌부 지평,

시강원 문학, 홍문관 교리 응교 등을 거친 뒤 함양 군수가 되었다.

그 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사헌부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 참판 충청도 관팔사 동지중추부사, 한성우윤,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 시고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체포, 투옥된 후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이배)진 뒤 병으로 별세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金宗直)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중종 6년 정묘년(1507년), 원통한 죄를 거슬러 올라가 풀어주고,

공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경연춘추관성균관사

(經筵春秋館成均館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예문관(藝文官) 제학(提學),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하였으며, 자손에게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황간 송계서원, 금산 경렴서원, 순천 옥천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매계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매계 조위선생 신도비

 

16.호조참판 증이조판서 시문장공 매계선생 신도비병서

(戶曹參判 贈吏曹判書 諡文莊公 梅溪先生 神道碑幷書)

 

본조(本朝)의 문치(文治. 문억으로 다스리는 정치)로는 성종조(成宗朝)만한 시대가

없어서 도학문장(道學文章)의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당시 매계 조선생(梅溪 曺先生)의 은우(恩遇)가 특이하였다가 혼조(昏朝)를 만나 그 화()가 가장 참혹하였으니 군자(君子)들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의 휘()는 위(), ()는 태허(太虛), 본관(本貫)은 창녕으로 신라태사(新羅太師) 휘 계룡(諱 繼龍)의 후예(後裔)

이고, 중간에는 보첩이 유실되었다. 고려 초기에 와서는 휘 겸(諱 謙)은 태조제이녀

(太祖第二女)의 부마(夫馬)로 벼슬이 태락서승(太樂署丞)에 이르렀고, 뒤에 8대가 대대로 평장사(平章事)가 배출되었다. 고조(高祖) 휘 우희(諱 遇禧)는 시중(侍中), 증조

(曾祖) 휘 경수(諱 敬修)는 밀직부사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이고 조() 휘 심(諱 深)은 일찍 별세(別世)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고 고() 휘 계문(諱 繼門)은 현령(縣令)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2대의 추증은 공으로 말미암아 내려진 은전이었다. ()는 문화류씨(文化柳氏)로 경태(景泰.명나라연호) 57월 경신(庚申)일에 금산(金山) 봉계리에서 공()을 낳았다. ()은 겨우 5세에 글자를 알고 재사(才思)가 뛰어났으며, 7세에 이미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점필재 김문충공 종직(宗直)은 공의 자형(姊兄)이었으므로 10세적부터 점필재에게 가서 배웠고, 참판공을 따라 상경하였을 적에는 종숙부인 충간공 석문(錫文)이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는 손수 소학(小學)을 가르쳤으며, 성장하여서는 다시 함양으로 점필재를 쫓아 사사(師事)하여 그 강론이 해박하고 원만하였으므로 점필재가 늘 내가 대허와 강론해보면 마치 강하(江河)를 터놓은 듯 통쾌하니, 태허는 진정 나의 스승이다, 라고 칭찬하곤 하였다. 신묘(辛卯)년 향시(鄕試)에 세 번이나 장원(壯元)하였다가 임진(壬辰)년에는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고 갑오(甲午)년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을 거쳐 사국(史局)에 있다가 이윽고 한림원(翰林院)의 잔치에 관련되어 금산(金山)으로 적귀(謫歸)하였으며 병신(丙申)년에는 임금이 특명으로 채수(蔡洙), 유호인(兪好仁)6명과 함께 휴가를 받아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었고, 그 이듬해에는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 남상(南床)에 선발되었다. 또한 일찍이 채수등과 함께 송경(松京)에 놀면서 수창(酬唱)한 시십(詩什)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니 공은 성세(盛世)에 나서 명성(名聲)을 잘 드날렸다 이를만하다. 계유(癸卯,1483))년에 시강원(侍講院)을 신설, 공으로 문학관(文學官)을 삼았다가 응교(應敎)로 옮겼는데 연로(年老)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함양군수로 나가서는 학풍을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으로 주무(主務)를 삼았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공에게 평소지은 시들을 초록(抄錄)하여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번에 올린시도 임금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공의 부모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도록 하고 이어 어찰(御札)을 보내어 포론(褒論) 하기를, “그대가 문장으로 발신(發身)하여 경연(經筵)에서 나를 가까이 시종(侍從)하였으므로 내가 그대를 장래의 재기(才器)로 여겨 온지가 오래되었는데, 어버이가 연로하다하여 본직(本職)을 마다하고 봉양을 목적으로 고향에서 가까운 고을로 나갔으니, 이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지금 그대가 나를 시종하였던 정리가 생각나기에 본도감사(本道監司)에게 일러서 그대의 부모에게 곡물을 선사하여 그곳 향리사람들로 하여금 그대의 문학에 힘썼던 그 영광이 부모에게까지 미쳤음을 알도록 하는 바이니, 그대는 그리알라,” 하므로 공이 답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그때 일두(一蠹) 정문헌공 여창(鄭文獻公 汝昌)이 본군(本郡)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공()과는 동문의 도학문우(道學交友)이다. 이에 공무가 끝날 적마다 문헌공과 함께 경전(經傳)을 강마(講磨)하였고 문헌공이 상()을 만났을 적에는 공()이 치상(治喪)을 주관, 장구(葬具)를 일체 마련하였다. 본군(本郡)에서 막 질만(秩滿)이 되었을 무렵에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임금이 특명으로 쌀과 콩을 하사하였으니, 지방관으로써 부의를 하사 받기는 공이 그 처음이었다. 공은 일체 가례(家禮)에 따라 집상(執喪)하였고 복()을 마친 뒤에는 검상(檢詳)에 제수되었다가 장령(掌令)으로 옮겨지고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되었으며, 이해 겨울에는 대부인(大夫人)을 서울 동편 낙봉(駱峯)아래 있는 집으로 모신다음 돌을 모아 제단을 만들고 화초를 심어 아취(雅趣)를 도왔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매계동(梅溪洞)이라 지칭하였다. 임자(壬子)년에 도승지(都承旨)로 옮겨지고 이해 가을에는 점필재의 상을 만났으며 계축(癸丑)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승진되고 이해 가을에는 대부인(大夫人)이 연로(年老)하다하여 글을 올려 말미를 청하고 대부인의 수연(壽宴)을 치루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되게 여기었다. 갑인(甲寅)년에 호서관찰사(湖西觀察使)로 나가서는 형정(刑政)을 쓰지 않고도 덕화(德化)가 온 도내(道內)에 원만하였고, 이해 겨울에 성종(成宗)이 승하(昇遐), 생명을 불구하고 애통해하면서 시를 지어 애모하는 뜻을 붙였으므로 그 시가 사림(士林)에 전해져 있다. 을묘(乙卯)년에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전임되었다가 곧 대사성(大司成)으로 고쳐졌고, 이해 가을에 다시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로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모친의 상을 만나 삼년동안 여묘(廬墓)하였으며, 무오(戊午)년에 동지중추부사겸부총관(同知中樞府事兼副摠管)에 제수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들어갔는데, 마침 혼주(昏主. 연산군.燕山主)가 위에 있는 시기이라 사화(史禍)가 크게 야기 되었다. 점필재가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공()이 점필재의 문집을 편찬할 때 그 글을 실었고 탁영(濯纓) 김공 일손(金公 馹孫)이 국사(國史)를 편수할 때 또 그 글을 수록한 때문에 적신 유자광((賊臣 柳子光)등이 점필재를 대역죄로 몰아 그 관을 쪼개고 탁영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일시의 명유(名流)들이 거의 다 당화(黨禍)에 걸렸고 공()도 여기에 연좌(連坐)시켜 연산주(燕山主)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처형하라는 명이 내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요동에 도착하였을 때 비로소 이 소문이 들렸는데 일행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어찌할줄을 몰랐으나 선생은 여전(如前)한 표정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압록강에 당도하자마자 경옥(京獄)으로 압송 수감하였다가 의주로 귀양 보냈다. 공은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규정(葵亭)을 짓고 기()를 지어 임금을 그리는 뜻을 붙였으며 일년만에 죄를 감등(減等)하여 다시 순천으로 이배되었는데, 마침 한훤당 김문경공 굉필(宏弼)도 희천(熙川)에서 이곳으로 이배되어 왔다. 공은 본시 문경공과 동문우(同門友)이라 함께 종유(從遊)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한편 본부서편에 수석이 절승(絶勝)한 곳을 가려 돌을 모아 대()를 만들고 이름을 임청(臨淸)이라 하여 그 사이에 소요(逍遙)하면서 화색(禍色)이 필측(匹測. 예측하기 어려움)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다가 끝내 계해(癸亥)1126일에 50세를 일기(一紀)로 적소(謫所)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에 한훤당이 치상(治喪)을 주관하고 서제 신(庶弟 伸)이 영구(靈柩)를 받들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그 이듬해 3월에 황간 마암산 선산(先山)에 안장(安葬)하였는데 이해 가을에 사화(史禍)가 다시 일어나 천양(泉壤)의 화()를 만나 유해를 삼일동안 드러내게 되었다. 일찍이 요동의 점술가가 공의 길흉을 점치면서 천길 물속에서 솟구쳐 나왔다가 사흘 밤 바위 밑에 지내게 되리하는 시구(詩句)를 써주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그대로 맞아 들었다고 한다.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고 나서 맨 처음 공()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특별히 이조참판을 추증하는 한편, 자손을 기용하도록 하였으며, 숙종(肅宗)에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문장(文莊)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부인 평산신씨(夫人 平山申氏)는 장절공 숭겸의 후손이요, 현감 윤범(允範)의 따님으로 일찍이 아들은 있었으나 양육하지 못하고 종제(從弟)인 군수 척(郡守 倜)의 차자 사우(士虞)로 후사(後嗣)를 삼았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사우(士虞)는 가문(家門)의 화난(禍難)을 마음아프게 여기어 두차레나 별제(別提)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세 아들중에 윤희(胤禧)는 시정(寺正), 윤신(胤申)은 군수(郡守), 윤지(胤祉)는 현령(縣令)이며 그 후손은 워낙 많음으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은 위인이 영특하고 기우(氣宇)가 관홍(寬弘)하여 본래 장자(長者)의 풍도(風道)가 있다고 알려졌으며, 일찍부터 대현(大賢.김종직을 이름)을 만나 사사하였고 종유(從遊)한 이도 다 당대의 석유(碩儒)와 준사(俊士)들이었으며, 천성이 고명한데다가

학력으로 배양하여 아무리 전패(顚沛)하고 다급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처리하였고 빨리 말하거나 당황해하는 표정이 없었으므로 허백당 홍공 귀달(洪公 貴達)이 일찍이 공의 문장은 삼대(三代)나 양한(兩漢)의 것이 아니고는 견줄 수 없고 상업(相業)은 고...(,,,)를 표준, 나머지는 칭할 나위도 없고 학문은 달성하기 전에는 끝까지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쳤다. 하였으니, ()의 대충을 표현했다, 하겠다. ! ()은 천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성대(聖代)를 만나 왕도(王道)를 빛내고 명성을 드날린바가 참으로 고금(古今)에 드물었는데, 풍파가 덧없고 사림(士林)에 액운(厄運)이 닿아 이내 한훤(寒暄), 일두(一蠹), 등 제현(諸賢)과 함께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아무리 생전의 극형은 모면했다하더라도 끝내 사후(死後)의 참화(慘禍)는 모면치 못하였다. 그 규정(葵亭)과 임청대(臨淸臺)의 기문(記文)을 보면 충애(忠愛)하고 측달(惻怛.가엾이 여겨 슬프함)하는 뜻이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 굴원.屈原이 지음)의 유의(遺意)를 깊이 체득하여 수천년 이후에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흐느끼고 감탄하게 할만하다. 그 시문(詩文)은 화난(禍難)속에 유실되고 문집(文集) 몇 권이 이제야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진다. 그 후손 세호(世虎)가 장차 공()의 비()를 세우기 위하여 종자 박(從子 .+)을 보내어 명()을 청함으로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점필재의 도()에서 공()이 그 문()을 얻었네. 그 문()이란 무엇인가? 경술(經術)이 그 근본으로 충애(忠愛)는 귤송(橘頌. 초사 구장의 편명. 楚辭 九章 篇名)에 인정되고 명망은 유문(儒門)에 드높았네. 선릉(宣陵.성종.成宗)시대에 문치(文治)가 성행하여 금마옥당(金馬玉堂)에 명사(名士)가 운집했을 제 그중에도 공이 가장 융숭한 은총 받아 잠시 지방관윤허(地方官允許)하고 후한 선물을 내리시고는 문학에 힘썼던 보람이라고 임금의 포론(褒論) 있었다네. 그러나 천운(天運)이 돌고 돌아 평지(平地) 앞에는 험지(險地)가 있어 성초(星軺. 사신이 타는 수레를 말함)에서 내리자마자 편여(箯輿. 대나무로 만든 람여)압송되어 남북산천(南北山川)에 수출유리(遂出流離) 되었다가 무양(巫陽. 옛적 신의.神醫의 이름, 초사, 초혼)은 끝내 오지 않고 적소(謫所)에서 그만 돌아갔네. 게다가 모진 화() 아직도 남아 바위 밑에 사흘 밤 지냈으니 예부터 문장(文章)의 운명 진정 가증(可憎)도 하여라. 당적(黨籍)의 영광(榮光. 송 철종.宋 哲宗때의 일을 인용한 말) 벗들에게까지 미쳐 한훤(寒暄), 일두(一蠹)와 함께 죽어서야 전해졌네. 약간 남은 문자(文字)에 그 충애(忠愛) 못 잊어 했으니, 수조가두(水調歌頭)의 끼친 뜻 두고두고 보여 지리. 저 마암산(馬岩山) 언덕에 충혈(忠血)이 묻혔으니 내가 이 명() 지어 먼 후세에 전하려네.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세자우빈객(資憲大夫 議政府左參贊 謙 世子右賓客)

이재(李縡)가 찬) 한다.

*이재(李縡,1680~174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신·학자이며

대제학, 이조참판 등을 지낸 성리학의 대가이다.

 

만분가

 

17.만분가(萬憤歌) 

                                                       

천상 백옥경  십이루 어디멘고 / 오색운 깊은 곳에  자청전이 가렸으니

구만 리 먼 하늘을  꿈이라도 갈동말동 / 차라리 죽어져서  억만 번 변화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어 / 이화 가지 위에 밤낮으로 못 울거든

삼청 동리에 저문 하늘 구름 되어  /  바람에 흘리 날아 자미궁에 날아올라 

옥황 향안 전에 지척에 나가 앉아 / 흥중에 쌓인 말씀 실컷 사뢰리라.

 

아아! 이내 몸이 천지간에 늦게 나니 / 황하수 맑다마는 초객의 후신인가

상심도 가이없고 가태부의 넋이런가 / 한숨은 무슨 일인고 형강은 고향이라  

십 년을 유락하니 백구와 벗이 되어 / 함께 놀자 하였더니 어르는 듯 괴는 듯  

남 없는 님을 만나 금화성 백옥당의 / 꿈조차 향기롭다.

옥색실 이음 짧아 님의 옷을 못하 여도 / 바다 같은 님의 은혜 추호나 갚으리라

 

백옥같은 이내 마음 님 위하여 지키고 있었더니 / 장안 어젯밤에 무서리 섞어치니 

일모수죽에 취수도 냉박하구나 / 유란을 꺾어 쥐고 님 계신 데 바라보니  

약수 가로놓인 데 구름길이 험하구나 / 다 썩은 닭의 얼굴 첫맛도 채 몰라서  

초췌한 이 얼굴이 님 그려 이리 되었구나 / 천층랑 한가운데 백 척간에 올랐더니  

무단한 양각풍이 환해 중에 내리나니  / 억만장 못에 빠져 하늘 땅을 모르겠도다.

 

 

노나라 흐린 술에 한단이 무슨 죄며 / 진인이 취한 잔에 월인이 웃은 탓인가 

성문 모진 불에 옥석이 함께 타니 / 뜰 앞에 심은 난이 반이나 이울었구나

오동 저문 비에 외기러기 울며 갈 때 / 관산 만릿길이 눈에 암암 밟히는 듯  

청련시 고쳐 읊고 팔도한을 스쳐 보니 / 화산에 우는 새야 이별도 괴로워라  

망부 산전에 석양이 거의 로다  / 기다리고 바라다가 안력이 다했던가

 

낙화 말이 없고 벽창이 어두우니  /  입 노란 새끼새들 어미도 그리는구나  

팔월 추풍이 띠집을 거두니 빈 깃에 싸인 알이 수화를 못 면하도다 

생리사별을 한 몸에 흔자 맡아  / 삼천장 백발이 일야에 길기도 길구나  

풍파에 헌 배 타고 함께 놀던 저 무리들아  / 강천 지는 해에 주즙이나 무양한가.

 

밀거니 당기거니 염예퇴를 겨우 지나  /  만 리 붕정을 머얼리 견주더니  

바람에 다 부치어 흑룡 강에 떨어진 듯  /  천지 가이없고 어안이 무정하니  

옥 같은 면목을 그리다가 말려는지고  /  매화나 보내고자 역로를 바라보니   

옥량명월을 옛 보던 낯빛인 듯  /  양춘을 언제 볼까 눈비를 혼자 맞아  

벽해 넓은 가에 넋조차 흩어지니  /  나의 긴 소매를 누굴 위하여 적시는고  

 

 태상 칠위 분이 옥진군자 명이시니  /  천상 남루에 생적을 울리시며  

지하 북풍의 사명을 벗기실까  /  죽기도 명이요 살기도 하나리니   

진채지액을 성인도 못 면하며  /  누설비죄를 군자인들 어이하리  

오월 비상이 눈물로 어리는 듯  /  삼 년 대한도 원기로 되었도다   

초수남관이 고금에 한둘이며  /  백발황상에 서러운 일도 하고 많다.   

 

건곤이 병이 들어 흔돈이 죽은 후에  /  하늘이 침음할 듯 관색성이 비취는 듯 

고정의국에 원분만 쌓였으니  /  차라리 할마같이 눈 감고 지내고저   

창창막막하야 못 믿을쏜 조화로다  /  이러나저러나 하늘을 원망할까 

도척도 성히 놀고 백이도 아사하니  /  동릉이 높은 걸까 수양산이 낮은 걸까 

남화 삼십 편에 의론도 많기도 많구나  /  남가의 지난 꿈을 생각거든 싫고 미워라

 

고국 송추를 꿈에 가 만져 보고  /  선인 구묘를 깬 후에 생각하니 

구회간장이 굽이굽이 끊어졌구나  /  장해음운에 백주에 흩어지니  

호남 어느 곳이 귀역의 연수런지  /  이매망량이 실컷 젖은 가에 

백옥은 무슨 일로 청승의 깃이 되고  /  북풍에 혼자 서서 가없이 우는 뜻을 

하늘 같은 우리 님이 전혀 아니 살피시니 목란추국에 향기로운 탓이런가.  

 

첩여 소군이 박명한 몸이런가  /  군은이 물이 되어 흘러가도 자취 없고

옥안이 꽃이로되 눈물 가려 못 보겠구나 이 몸이 녹아져도 옥황상제 처분이요 

이 몸이 죽어져도 옥황상제 처분이라  /  녹아지고 죽어지어 혼백조차 흩어지고

공산 촉루같이 임자 없이 굴러 다니다가  /  곤륜산 제일봉에 만장송이 되어 있어

바람 비 뿌린 소리 님의 귀에 들리기나  /  윤회 만겁하여 금강산 학이 되어

일만 이천 봉에 마음껏 솟아올라  /  가을 달 밝은 밤에 두어 소리 슬피 울어

님의 귀에 들리기도 옥황상제 처분이겠구나.

 

한이 뿌리 되고 눈물로 가지삼아  /  님의 집 창 밖에 외나무 매화 되어

설중에 흔자 피어 참변에 이우는 듯  /  윌중소영이 님의 옷에 비취거든

어여쁜 이 얼굴을 너로구나 반기실까  /  동풍이 유정하여 암향을 불어 올려

고결한 이내 생계 죽림에나 부치고저  /  빈 낚싯대 비껴 들고 빈 배를 흔자 띄워

백구 건너 저어 건덕궁에 가고 지고  /  그래도 한 마음은 위궐에 달려 있어

내 묻은 누역 속에 님 향한 꿈을 깨어  /  일편장안을 일하에 바라보고 외로 머뭇거리며

이몸의 탓이런가 이몸이 전혀몰라  /  천도막막하니 물을 길이 전혀 없다.

 

복희씨 육십사괘 천지 만물 섬긴 뜻올  /  주공을 꿈에 뵈어 자세히 여쭙고저

하늘이 높고 높아 말없이 높은 뜻을  /  구름 위에 나는 새야 네 아니 알겠더냐

아아 이내 가슴 산이 되고 돌이 되어  /  어디어디 쌓였으며 비가 되고 물이 되어

어디어디 울며 갈까 아무나 이내 뜻 알이 곧 있으면 백세교유 만세상감하리라.

 

*만분가는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선생이

1498(연산군 4) 무오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남 순천으로 이배되었을 때 지은것이다.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 없는 슬픔과 원통함을 선왕(先王:성종)에게

하소연하는 심정을 읊었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의 유배가사(流配歌辭)이다.

 

지은이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유배된 뒤 귀양살이하는 원통함을,

천상에서 하계로 추방된 처지를 옥황상제로 비유된 성종에게 하소연한

내용으로 작품의 가의(歌意)가 굴원의 천문(天問)과 유사한 점이 있다.

 

만분가는 한편으로는 임을 잃은 여성을 서정적 자아로 설정하여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辭)의 형상을 취하는 한편만분가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이 유배를 당하게 된 현실에 대한

발분의 정서를 아울러 표출하는 특징을 갖는 유배 가사로작가가 귀양간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하계로 추방된 것에 비유하여 지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후대에 지어지는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김춘택의 별사미인곡과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송주석의 북관곡김진형의 북천가이방익의 홍리가 

조선시대 유배가사의 효시가 되었다.

 

임청대 비각

 

18.임청대기(臨淸臺記) 

 

승평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시냇물이 있다. 동쪽 시냇물은 계족산에서 흘러나오는데,

여러 골짜기의 물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남쪽으로 흘러 북원산 아래에서 합쳐져서 동으로 꺾여 흐르다가 서의 동쪽 한 마장쯤에서 서쪽 시내와 만난다.

하얀 모래와 푸른 절벽에 물이극히 맑고 넘실넘실 흐르며, 은빛 물고기와 붉은 게들이

가을철이 되면 매우 많이 모여 들었으므로, 관아에서 그것을 잡아서 팔았다.

서쪽 시냇물은 난봉산의 북쪽에서 흘러나오는데, 때때로 비가 내리면 세차게 흘러서

길게 굽이돌아 동쪽으로 흘러 성의 남쪽에 있는 연자교 아래를 감싸 동쪽시내로 흘러가는데, 이를 옥천이라고 한다. 소용돌이를 치며 빠르게 흐르는데다,

또 바위굴과 괴이한 바위가 많아서 물이 매우 세차게 흐른다.

 

연자교에서 서쪽 시냇가에는 모두 사람들이 사는 집들인데, 대나무 울타리와 초가집들이

좌우에 즐비하였다. 관음방에서 부터 100여 걸음을 오르면, 물이 매우 맑고 바위가 매우 기이하며, 나무들이 우거져서 해를 가리고 있고, 시냇가가 넓고 평평하여 3,40여명이 앉을만한데, 매우 조용하고 시원하며, 비록 한여름이라도 더위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승평으로 이배되어 서문 밖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날마다 읍에 사는 사람들과 자주 그곳을 찾아가곤 하였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고이름을 임청(臨淸)”이라고 하였다.

집주인인 심종유(沈從柳), 양우평(梁禹平), 한인수(韓麟壽)3명의 부노(父老)

() 교관이 규약을 제정하고, ‘진솔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날에는 돌아가며 도시락과 나물반찬,술 한 병을 준비하여 와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과 회로 안주삼아 먹었는데, 규칙을 어기는 자는 벌칙이 있었다.

식사 후, 술잔을 서너 차례만 돌려가며 마시고는 그쳤는데술을 마시는데 잔을 돌리지 않은 것은 검소하게 하고 준비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날에는 바둑을 두고,

어떤 때에는 담소를 나누다가 날이 어두우면 헤어졌고, 어떤 날에는 달밤에

지팡이를 짚고 돌아왔는데이러한 생활을 2년 동안이나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자네는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글 가운데에서 골라 뽑아

누대의 이름을 짓고또한 자주 촌 늙은이들을 이끌고서 이곳에 와서

즐겁게 유유자적 하면서도 일찍이 흥겨운 마음을 한껏 드러내는 시 한 수도 짓지 않으니,

이는 어찌 그 이름을 허망하게 하면서 이 누대를 외롭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대답하기를  “’가는 것은 이와 같도다.‘ 라고 공자(孔子)가 탄식한 것과

반드시 그 큰 물결을 보라는 맹자(孟子)의 가르침이 있다.

성현이 물가에 나아가 물을 보는 것은 진실로 그 뜻하는 바가 있으니,

도연명의 귀전지락(歸田之樂) 낙천지명(樂天知命)에 있었다.

그러니 오로지 높은 곳에 올라 때때로 노래를 부르거나,

물가에 이르러 시를 읊조리는 것만을 오로지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승평은 산천과 기후가 요즈음 나와 맞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든다.

날마다 서너 사람과 조용히 이곳에 와서 어떤 때는 두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고,

어떤 때는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씻으며, 맑은 물결을 내려다보며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오싹하게 찬 물에 얼굴을 비춰보며 머리털을 세면서 하루 종일 얼쩡거리느라 늙은 줄 모르는데, 하필이면 시구(詩句)나 읊조리며 성률(聲律)이나 맞추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겠는가?” 옛날 유자후(柳子厚)가 영릉(零陵)에 거처할 때에 산수를 싫어하여, 계곡의 이름을 우계(愚溪)‘, 산을 수산(囚山)‘이라고 하여, 모두 악명을 붙였으니, 애초부터 천명을 아는 자가 아니다. 소동파(蘇東坡)가 황강에 귀양살이 할 때에 무창(武昌), 한계(寒溪)의 여러 산들을 두루 돌아보고 전.후 적벽부(赤壁賦)를 지었으니, 이는 고금에 빼어난 문장이나 세상일을 잊고 신선이 되고자하는 뜻이 있었음을 끝내 면하기 어려웠으나, 이 또한 천명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직 군자의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방책을 배우고,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 연후에,

구액(窮厄)한 처지에서도 능히 변함이 없어야 천명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연명을 사모하고 공맹(孔孟)을 배운 사람으로 가만히 이에 뜻을 둔 지가 오래 되었다. 또한 내가 이 누대에서 즐기는 것은 거의 천명을 안다고 하지 않겠는가?

 

! 이 고을이 생길 때부터 이처럼 아름다운 산천이 있었지만 지도책에 명승(名勝)으로

실려 있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 (), 장간공(章簡公)과 주() 문절공(文節公)께서 일찍이

이곳의 부사를 역임하셨는데, 또 다시 한 번도 이 고을을 찾아보고 되돌아보지 않은것인가?

옛날에 드러나지 않고 오늘에 와서 드러나고,

명현을 만나지는 못하고 우리들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이 시대의 다행인가?

 

창룡(蒼龍) 임술년(1502), 연산군8) 8월 하순 매계 노수가 기문을 쓰다.

 

*임청대(臨淸臺)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77호로 순천시 옥천변 상류에 있다.  

조선(朝鮮) 연산군(燕山君,14941506년 재위)때 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 두 분이 귀양살이 하면서 돌을 모아 대()를 만든 것이다. '임청(臨淸)'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대 이름은 조위 선생이 지었다. 그후 명종(明宗) 18(1563) 구암(龜岩) 이정(李禎) 선생이 이곳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으로부터 임청대(臨淸臺)란 친필을 받아 비석(碑石)을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임청대기를 새기려 했으나 돌의 질이 좋지 못하여, 임청대음기만 새겼다 한다. 현 위치에서 동쪽 약 30m 지점에 있던 것을 1971519일 이곳으로 옮기었다다음은 임청대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는 임청대음기와 임청대기를 풀이 한 것이다  매계 조위선생과 한훤당 김굉필선생은 15005월부터 이곳 순천에 이배 되었었는데 매계선생은 1503년에, 한훤당선생은 1504년에 각각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임청대비

 

19.임청대비음(臨淸臺碑陰)

 

연산조때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선생과 매계 조참판(曺偉)이 모두 승평에 귀양와서 서편 냇가에 돌을 모아 대를 만들었으니 이를 임청대라 한다. 매계가 이름을 짓고 기문을 쓴지가 60년이 되었다. 이 기문을 돌에다 새기려 하였으나 돌의 형질이 좋지 못하여 새길수가 없으므로 다만 임청대라고 세글자만 앞면에 새겼다. 이것은 곧 퇴계선생의 글씨이고 돌에 새긴 사람은 정소(鄭沼)이며 역사를 맡아 감독한 사람은 배숙이니 부사는 동성후학 이정(李楨)이다. 황명가정 44(1565) 을축 8월 일 세우다

 

두시서

 

20.두시서(杜詩序)

 

(詩經-시경)는 과(楚辭-초사) 이후로는 이백과 두보를 널리 일컬으나, 그 바람의 기운이 넓고 크며 꾸밈의 말이 어렵고 까다롭다. 그러므로 주석이 많기는 해도 독자들이 더욱 그를 깨치기 어려웠더니, 성화(明憲宗) 辛丑(1481) 가을 임금께서 弘文館 전한인 유윤겸 등에게 말씀하시길 두시는 여러 사람의 주석이 상세하기는 하나 회전(蔡夢弼 杜工部 草堂詩箋)은 번다하다보니 그릇된 실수가 있고 수계(劉辰翁集 十家注批點 杜工部 詩集)은 단출하기는 하나 간략한 흠이 있으며, 여러 논설이 번거로워서 서로 어긋남이 많으니, 가다듬어서 하나로 만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너희가 다시 편찬해 보라고 하셨다. 이에 널리 여러 사람의 주석을 수집해서 번잡한 것은 가려서 버리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았으며 지명이나 인명 그리고 글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구절에 따라서 간단히 주석해서 참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했으며, 또한 우리말로 뜻을 풀이 했으니, 그전에 어렵고 까다로웠던 것이 한번 보면 휑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책이 다 이루어지자 잘 베껴서 올리니 에게 서문을 쓰라고 하시었다.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시도(詩道)가 세간의 교화와 관련됨은 대단히 큰 것이다. 위로는 교제(郊祭)墓祭에 있어 기록한 덕을 노래하고 아래로는 국민과 풍속의 노래들이 당시의 정치를 찬미하거나 풍자하는 것이 모두가 사람들이 착하고 악함을 경계하고 권장하는 뜻이니, 이는 공자가 詩經을 수집해서 편찬해 놓으나 바로 간사한 생각이 없는 시라는 가르침의 연유이다. 는 육조시대에 이르러 극히 들뜨고 화려해서 시경 삼백편의 노래가 땅에 떨어졌더니, 杜甫가 성당에 태어나서 막힌 곳을 뚫고 끊어내어 퇴락한 풍격을 다시 일으켜서 마음이 가라앉고 글 기운이 갑자기 끊기고 힘써서 음탕하고 요염하고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버릇을 제거했으며, 난리를 만나 이리 저리로 쫓겨 다니는 마당에서도 시절을 슬퍼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말이 지극한 충성에서 표출되었으며, 충분과 격렬히 백세의 후대에까지 분발시키고 남으니, 착하고 악함을 경계하거나 권장하는 뜻이 정영 시경 삼백편과는 겉과 속처럼 되었으니, 사단을 펼치고 진실을 표상함에 있어 시사(詩史)라고 함축하나 어찌 후세에 풍월이나 읊조리어 심정을 가다듬는 자의 견줄 바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임금께서 杜詩에 유념하심은 역시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뜻과 같은 것이니, 그 후학들에게 은택을 끼치시고 시의 도를 그전에로 되돌리려 하심이 지극하심이다. ! 시경이 공자에게서 일단 편집이 되고 주희(朱熹)의 시경집주로 크게 밝혀졌거늘 이제 이 杜詩가 우리 임금님에 의해서 펼치어져 그 바닥이 드러났으니, 시를 배우는 자가 이것에 모범이 되어 시경의 뜻인 생각의 간사함이 없다는 지경에 이르러 시경 삼백편의 울타리에 다닫는 다면 어찌 글을 짓는 묘법이 백대에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우리 임금님의 인정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도탑고 두터우신 가르침이 한 세대를 도야할 것이니, 그 풍화에 이바지됨이 어떻겠는가?

성화 17(1473) 12월 상순에, 승훈랑 홍문관 수찬 지재교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승문원 교검 신 조위는 삼가 서한다

(成化 十七年 十二月 上旬, 承訓郞 弘文館 修撰 知製敎謙

經筵檢討官 春秋館 記事官 承文院 校檢 臣 曺偉 謹 序)

 

21.두시언해(杜詩諺解) 일부 예시

 

原詩(원시) 諺解(初刊本 十卷十七) 註解(주해)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생략(古語) 강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고

山靑花欲燃(산청화욕연) 산이 퍼러니 꽃이 불타고자 한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올봄도 보니 또 지나가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어는 날이 돌아갈 해인고.

 

22.매계 조위선생 영정과 친필시

매계 조위선생 영정과 친필시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유선의 깃발과 부절이 하늘에서 내리니  /  儒仙旄節下靑冥(유선모절하청명)

멀리 해를 잡고 지극한 정성 의지하네.  /  遠搏扶桑仗至誠(원박부상장지성)

만리에 고생하니 해가 솟은 듯 하였고  /  萬里間關廓日出(만리간관확일출)

천년에 즈음하여 황하의 맑음을 만났네.  /  千年際會値河淸(천년제회치하청)

 

수심으로 병든 비를 보고 나르는 솔개 떨어지는 듯 하였고  /  愁看瘴雨飛鳶阽(수간장우비연점)

기쁨으로 바람만난 돛대보고 춤추는 새가 가볍게 나는 듯 하네. /  喜見風帆舞鷁輕(희견풍범무익경)

이번에 고향을 버리는 듯 가신 본래 뜻은 /  此去桑弧聊素者(차거상호료소자)

남자로서 다만 공명 때문이 아닐 것이로다. /  男兒不獨爲功名(남아부독위공명)

 

*飛鳶阽(비연점) : 임금이 병을 앓는다는 소식에 솔개가 날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는 말

*舞鷁輕(무익경) : 임금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에 익조가 가볍게 춤을 추듯 기뻐했다는 말

 

*이 글은 조위선생(曺偉 先生)이 읊은 수많은 시 중에서 직접 써서

남아있는 유일한 친필 시다. 아마도 외직에 나와 있을 때

성종임금께서 아프다는 소식과 또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의 놀랐던 마음과, 기쁜 마음을 글로 써서 남긴것으로 보인다.

 

23.문장공 매계 조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교지

문장공 매계 조위 교지

 

교지(敎旨)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성균관대사성  오위도총부부총관 

조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성균관사 세자 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시(諡) 문장공자

강희(康熙) 52년(1713년, 숙종 39, 계사.癸巳) 11월 23일

 

24.매계선생 문인록(梅溪先生 門人錄)

 

이운영 한산인(李運永 韓山人),     

이해중 한산인(李海重 (韓山人)

정중겸 오천인(鄭重謙 烏川人),       

이흥종(李興宗)

권   습 안동인(權 燮 安東人),           

허   육 파릉인(許 陸 巴陵人)

신태래 동양인(申大來 東陽人),       

박필문 반남인(朴弼文 潘南人)

이덕신 연안인(李德臣 延安人),     

정윤헌 하동인(鄭胤獻 河東人)

최주하 화순인(崔柱夏 和順人),       

이응협 성산인(李應協 星山人)

윤봉오 파평인, 호 석문, 숙간공(尹鳳五 波平人, 號 石門 肅簡公)

윤봉구 파평인, 호 병계, 문헌공(尹鳳九 波平人 號 屛溪 文獻公)

이태중 한산인, 호조판서(李台重 韓山人, 戶曹判書)

이화중 한산인(李華重 韓山人),   

이기중 한산인, 부사(李箕重 韓山人,府使)

이기진 한산인(李箕鎭 韓山人),   

이병건 한산인(李秉健 韓山人)

이병연 한산인, 좌윤(李秉淵 韓山人, 左尹)   

이규진 한산인(李奎鎭 韓山人)

김   무 청풍인(金 楙 淸風人)

김재노 청풍인, 충정공(金在魯 淸風人,忠靖公)

권상하 안동인, 한수재. 문순공(權尙夏 安東人, 寒水齋. 文純公)

장이당 구례인(張以堂 求禮人)

김   유 청풍인, 대제학. 충정공(金 楺 淸風人, 大提學. 忠正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