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서원(賀老書院)은 훼철된 후 미복원된 옛 경렴서원(景濂書院)을
이약동(李約東)의 후손들이 김천시 양천동의 하로마을에 복원한 것이다.
경렴서원은 1648년(인조26년)에 창건한 후 1673년(현종14년) 자산(紫山)으로
옮기면서 경렴서원(景濂書院)으로 개칭하고, 노촌 이약동(李約東),점필제 김종직(金宗直),
매계 조위(曺偉), 동대 최선문(崔善門), 남정 김시창(金始昌) 등 5현을 배향했었다.
그후 1871년(고종10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11월 지금의 양천동에 중건하면서 하로서원이라 개칭하였다.
노촌 이약동(1416-1493)은 이 하로마을에서 태어나 강호 김숙자선생 문하에서
김종직, 조위선생과 더불어 수학하였으며, 1451년(문종원년)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73세에 청백리에 록선되었다,
서원내의 청백사(淸白祠,사당)에는 노촌(老村) 이약동의 독위를 배향하고 있다.
서원과 청백사 전경
하로서원 강당으로 안쪽에 노촌당, 바깥쪽에 경재당 편액이 있다
-서원내 석재공사중(2012.9.1)으로 바른 촬영이 곤란-
안쪽 노촌당 편액
바깥문위 경재당(敬梓堂)
서제 건물인 필유당
동제 건물인 염수료(念脩寮)
동제 편액- 염수료
청백사당으로 통하는 여재문(如在門)
청백사의 외삼문인 영사문
내삼문인 숙경문(肅敬門)과 청백사(淸白祠)
숙경문과 청백사
경렴서원 봉안문(景濂書院奉安文)
삼가 생각하건데 선생(梅溪를 이름)은 하늘이 낸 영걸(英傑)로 맑은 기운 한 몸에 모이고 그 기질 금옥(金玉)과 같아
온아(溫雅)한 자품이요 뛰어난 학식일세. 높은 천부(天賦)에 고도(古道)를 체득하여 예(禮)로서 기본을 삼고
의(義)로서 準的을 삼고 孝友로 가풍을 계승하고 小學으로 한 몸을 단속하여, 나이 겨우 弱冠에 그 명성 자자하였으니, 儒林의 주추요 學界의 宗匠되었네. 젊어서 一世의 眞儒(김종직을 이름) 師事했으니 斯文을 맡기게 되었고 여러 英俊 徙遊(사유)했으니, 麗澤(벗끼리 서로 학문을 닦고 수양을 힘쓰는 것)의 도움 많았어라. 이에 官路가 長遠하여 蓬閣(봉각-秘書省의 별칭)에 선임되고 盛代를 만나 대궐에 드나드니 수시로 詩를 올리라는 왕명은 고금에 드문 情理였고 부모에게 내린 米豆는 너무도 융숭한 은총이었네. 장차 才力을 다하여 임금을 보필하려 했으나, 하늘이 宋나라를 돕지않아(宋哲宗때의 黨禍를 인용 비유한 말)끝내 큰 禍 일어나 많은 哲人 죄로 몰려 나라위해 죽어갔네. 龍灣(용만=義州)에 유배되었을 적엔 원수들도 두려워하고 昇平(순천)에 이배 되었을적엔 大賢(김굉필을 이름)과 同伴했으니,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 風燭(풍촉-바람앞에 촛불)보다 더 다급하게 여겼다오. 끝내 해 저무는 庚子일에 服鳥賦(복조부) 짓게 되고(한 나라 때 賈誼가 長沙에 謫居한지 삼년만에 상서롭지 못한 服鳥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卯年 사월 庚子일에 해는 저물어 가는데 服鳥가 나의 처소에 날아들어 ... 라는 服을 지어 文人의 短命을 서글퍼한 고사로 梅溪가 謫所에서 별세한 것을 비유한 말) 이내 後嗣까지 없었으니 杳然(묘연)한 天理 도저히 알 수 없어라. 墓木은 아직 남아있으나 옛집은 가시덤불에 묻혔으니 산하에 남긴 詩軸(시축) 사람의 이목 슬프게 하네. 當時에 숭모하고 후세에 瞻仰하니 온 士林 모두 호응하는 터에 어느 누군들 힘쓰지 않을 손가? 鑑湖(감호)가 黃岳山기슭에 이 儒宮 건립하여 규모장엄하고 搢紳(진신), 章甫 모두 모여 제사 드리니 神氣充滿하여 況然히 歆饗(흠향)하는 듯 천추만세 지나도록 소홀함 없어야 하네. 師傳 朴羾衢(박공구)
마을입구의 사모바위
'문화유산산책 > 누.정.서원.향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 남간정사 (0) | 2013.09.08 |
---|---|
합천 함벽루 (0) | 2012.12.22 |
진주 촉석루와 진주성 (0) | 2012.08.05 |
남원 육모정과 박초월 생가 (0) | 2011.11.14 |
밀양 위양지와 완재정 (0) | 2011.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