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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성주 세종대왕 자 태실

by 안천 조각환 2009. 9. 24.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신석산에 있다.

태실이란 옛날 왕가(王家)에 출산이 있을 때 그 출생아의 태(胎)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말하며 태봉이라고 한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세종대왕의 큰 아들인 문종을 제외한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을 포함 19기로써, 조성시기는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 사이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

즉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세종대왕자 태실 전경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출산한 후, 태는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했으며,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다음, 항아리를 큰항아리에 담았다.

이렇게 두 개의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를 선정하여 묻는데 이를 안태()라고 한다.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서는 태봉출()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 행렬이 태봉지로 출발했다.
태실은 대개 대석()·전석(磚)·우상석(湡)·개첨석() 등으로 만들었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하였으며, 국왕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하고 태실 주변은

금표로 접근을 제한하였다.

 

 

 안쪽에서 본 전경

 

이곳에 있던 태항아리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으로

이전 되었는데, 원래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를 만들 수 없으나, 

일제는 멸망한 왕실의 무덤을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서삼릉의 영역에

후궁, 왕자, 그리고 태실까지 모아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었다.

 

 

 전면 구조

 

 

 수양대군(세조)이 즉위 후 세운 가봉비(바로 뒤가 수양대군 태실이다)

 

 

 입구에서 본 태실

 

오른편 끝에 오른쪽으로 별도로 보이는 것이 세종의 세손인 단종의 태실

 

 

 세종왕자태실 안내판

 

 

 태실구조도

 

 

 태실로 올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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