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쌍봉마을에 있는 학포당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재로 1521년에 처음 건립하였다.
현재의 학포당은 양팽손이 쓰던 당시의 건물이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20년에 후손들이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학포당 입구
양팽손(梁彭孫)은 중종 11년(1516) 과거에 급제한 후 정언을 거쳐
교리로 재직하던 중,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절친이던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자 부당함을 호소하다 삭탈관직을 당한 후
고향인 화순으로 내려와 자연을 벗삼으며 시와 그림으로 지냈다.
학포당 전경
학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각지붕으로 꾸몄다.
경내에는 학포당을 창건할 당시에 양팽손의 둘째 아들 응태가
심었다는 500년된 노거수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학포당
양팽손은 서화에 능했으며 현재까지 전하는 10여 점의 작품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는 16세기 한국 회화를 대표한다.
호남 화단의 선구자인 그의 화풍은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으로 이어졌다.
특이한 형태인 상.하의 문
학포 양선생 학포당유지 추모비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보호수)
은행나무의 위용
학포당이 있는 쌍봉마을 입구의 정자
바로 인근의 화순 쌍봉사
화순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3층 목조건물의 대웅전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년)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년(인조 6년)에 중건,
1667년(현종 8년)과 1724년(경종 4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봉사 연못
쌍봉사 삼청각운(雙鳳寺 三淸閣韻)
지월당(池月堂) 김극기(金克己,1379~1463)
시내 사이로 멋드러진 다리 누각이여 / 구당별구대계간(橋堂別構大溪間)
삼청이라는 글씨에 눈이 상쾌하네 / 게호삼청쾌안간(揭號三淸快眼間)
못에 비친 달은 고기들의 맑은 거울 / 월조담심어경정(月照潭心魚鏡淨)
구름 걷힌 산봉우리의 학은 둥지를 좋아해 / 운수영상학루관(雲收嶺上鶴樓寬)
호성전
금빛 뜰에 머문 안개는 항상 상서롭고 / 금원숙무상정서(金園宿霧常呈瑞)
옥빛 계곡에서 부는 솔바람은 언제나 차겁네 / 옥동송풍매송한(玉洞松風每送寒)
난간에 기대 처마 아래 흐르는 물을 다시 보니 / 빙란경관첨하수(憑欄更觀簷下水)
낙화도 뜻이 있는지 잔물결 따라 좇아 가네 / 낙화유의축미란(落花有意逐微瀾)
극락전과 나한전
지장전
쌍봉사 전각들
한폭의 그림같은 쌍봉사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철감선사탑비(보물 제170호) ~ 펌
자리를 옮겨 임대정원림으로
임대정원림은 16세기 후반 퇴계로부터 "동방의 도학을
전수할 사람"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남언기(南彦紀,1534~?)가
화순 동복현 사평촌에 정자를 짓고 은둔한 곳이다.
임대정
그는 이 정원을 고반원이라 하고, 자신의 호를 스스로
고반이라 지었는데, 고반이란 시경(詩經)의 위풍(衛風) 고반편에
“고는 이룬다는 뜻이고, 반은 머뭇거려 멀리 떠나지 않는 모양이니
은거할 집을 이룬다는 말이다” 라고 주석하고 있다.
임대정원림은 2012년에 국가 명승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대정 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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