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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안강 하곡리 성산서당(聖山書堂)

by 안천 조각환 2025. 6. 25.

성산서당은 1814년(순조 14)에 정래영(鄭來永)이 정극후(鄭克後,

1577~1658)를 기리기 위해 유림의 도움으로 세운 사우와 서사(書社)로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인 경덕재와 기타 부속사는 훼철되고

강당인 흥교당(興敎堂)은 성산서당(聖山書堂)으로 개칭되었다

 

성산서당 전경

 

서당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두었다.

정면과 대청 중앙 후벽에 흥교당(興敎堂)과 성산서당(聖山書堂) 현판이 있으며

외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으로 대문 좌, 우에는 광이 있다

 

안강 하곡리 은행나무와 성산서당

 

정극후(鄭克後,1577~1658)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효익(孝翼),

호는 쌍봉(雙峯)이고, 경주 출신으로 고려의 명신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일찍이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장현광은 그의 비범함에 감탄,

붕우의 예로 대하였으며, 또 정구(鄭逑)의 문인이기도 하다.

 

성산서당 정문

 

1634년(인조 12) 60세의 나이에 학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36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

이듬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643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수개월 후 노환으로 사퇴하였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삼성산(三聖山) 아래에 집을 짓고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후학양성을 소임으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제사지내는 법을 담은 "문묘사향지(文廟祀享志)"와,

단군, 기자 이래 신라, 고려의 고사를 알기쉽게 담은 "역년통고(歷年通攷)"

설총(薛聰), 김생(金生), 최치원(崔致遠) 등 삼현(三賢)의 사적(事蹟)이

산실(散失)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은 "서악지(西岳志)"가 있다.

 

높은 담 너머로 본 성산서당 강당인 흥교당

 

 

서당 바로 옆 지경저수지

 

성산서당 맞은편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

1577~1658)의 별장으로,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교육하던 곳인

유명한 수재정(水哉亭)이 있으나 문이 잠겨있어 다음기회로 미룬다.

 

성산서당 상류 오룡1리의 잠사(누에 키우는 곳)

 

잠사 옆 누에 모형

 

성산 저수지

 

안강 하곡리 계곡인 강당골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