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봉성면 창평리에 베트남의 대월(大越) 이왕조(李王朝)를
건국한 태조 이공온(李公蘊)의 동상이 건립되어 2025.8.24일 제막되었다.
이곳 창평리는 대월국 태조 이공온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날 제막식에는 베트남의 호 안 퐁(Hồ An Phong)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부 호(Vu Ho) 주한 베트남 대사, 우리나라 임종득 국회의원, 박현국 봉화군수와
도의원 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 관계자, 베트남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대월 이 태조(이공온,李公蘊) 동상
이공온(李公蘊)이 건국한 이(李, Ly) 왕조는 1009년부터
1225년까지 중국의 지배를 벗어난 베트남 최초의 독립 국가였으며,
수도를 하노이 인근 탕롱(昇龍)으로 정해 반 미에우(문묘, 文廟)를 세우고
유교 실용화와 과거제 실시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이태조(李太祖, 974~1028)
베트남 호찌민 주석은 그런 연유로 생전에 이 왕조의 태조 사당을
수십 차례 방문했으며, 이(리) 왕조는 8대 황제 혜종(惠宗, 昭皇)
대에 이르러 외척인 쩐 투 도(진수도, 陳守度)의 난으로 멸망했다.

이태조 동상과 화산이씨 충효당
진씨(陳氏)는 제위를 찬탈하여 이씨 일족을 몰살하였으며,
일부 왕족들은 완(阮,응우옌)씨로 흡수되거나 성씨를 바꾸었으며,
6대 영종(英宗)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이용상(李龍祥, Lý Long Tường)은
1226년 일가를 이끌고 3000㎞ 넘어 떨어진 고려땅인 황해도 옹진에
도착하여 귀화하였으며, 이 때는 고려 고종 시기이다.

대월(大越) 이태조 동상, (왼쪽)~베트남 하노이(2010.6.26), (오른쪽)~봉화(2025.8.27)
이후 고려에 정착한 후손들은 그를 화산 이씨의 시조로 삼았다.
주로 북한 황해도 지역과 경북 봉화지역, 영주, 경남 밀양, 진주 등지에
살고 있는데, 이왕조(李王朝)의 이씨(李氏) 성을 가진 후손들은
한반도에만 남아있으며, 인구는 1,300여 명이다.
북한지역은 족보를 회수하는 등으로 본관을 거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화산이씨 종택과 충효당
베트남 정부에서는 화산 이씨를 이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다.
이용상은 망명할 때 이왕조의 계보를 챙겼고, 이 내용은 이용상의 후손이
화산이씨 세보에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화산이씨 종택
이 세보기록이 베트남 리 왕조의 계보와 일치함으로써 화산 이씨가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으며, 따라서 화산이씨는 이(리)왕조를 건국한
이공온(李公蘊)을 시조로 하고, 시조로 삼던 이용상은 중시조로 삼게 되었다.

대문채의 석거구택(石居舊宅)
이태조의 6대손인 이용상(李龍祥)은 6대 황제 영종(英宗)의 아들이고,
7대 황제 고종(高宗)의 동생이며, 8대 황제 혜종(惠宗)의 숙부이다.

대문채 앞의 화산이씨 종택 표석
베트남에서는 이(리) 왕조의 시조인 이 태조는 우리나라 세종대왕 처럼
여기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외세의 침략이 많았던 베트남 역사에서
이 왕조가 통치했던 시기가 가장 편하고 안정된 전성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괴와신거(塊窩新居), 정복헌(貞復軒)
한편 화산 이씨 후손들은 베트남 거주 시 출입국,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과 동일한 혜택을 받고, 이들이 베트남에 거주하기를 원할 경우
외국인의 건물 및 토지 구입 제한을 면제받는 우대를 해주고 있다.
또한 베트남으로 귀화를 원할 시 귀화 과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쉽다
.

봉화군과 베트남 뜨선시 자매결연 기념식수 표석
1995년 화산이씨 26대손 이장근을 비롯한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선조들의 고향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도모어이 공산당 총비서를 비롯한
베트남 정부의 삼부요인이 모두 나와 종친들을 맞아 깍듯이 황손으로 예우했다.

이왕조(李王朝)는 베트남 역사상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독립국가를 세워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한 왕조이므로, 리 왕조에 대한 향수가 강하다.
베트남에서는 현재까지도 이 왕가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화산 이씨가 베트남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왕가의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하노이 시장이 제주를 대행해 왔다.

이태조 동상앞에서 보는 베트남 건물
화산 이씨 종친의 베트남 방문은 이왕조의 혈통이 8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먼 한국에 온전히 남아있음을 확인한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당시 현지 언론들은 800년 만에 끊겼던 이왕가의 혈통이 부활했다고
대서특필하였으며, 현재도 해마다 이왕조 건국 기념식에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되고 있다고 한다.

마을앞에 세워 이날 상량식을 한 베트남식 건물인 다문화 커뮤니티센터
하노이 북부 박닌성 딘방에는 이왕조 역대 황제 8명을 모시며,
1,000동 주화에 새겨질 정도로 베트남 국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왕조의 종묘(宗廟)가 있으며, 이 종묘는 1952년 프랑스에 의해
전소 되었다가 1989년 복원하였다.

종택앞 건물의 벽화 ~ 봉화와 베트남, 하나의 마음
훼손 당시 종묘에 있던 제기들 중 신성한 향로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1995년 베트남을 찾은 화산 이씨 26세손인
종손 이창근이 여기서 첫 제사를 지낸 뒤 종묘의 땅속에 묻혀 있던
우물에서 사라졌던 향로가 발견되어 모두 감격했다고 한다.

충효당 전경

충효당(忠孝堂)
봉화 충효당은 이왕조의 후손인 이장발(李長發,1574~1592)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9세의 나이로 왜적과
싸우다가 문경새재에서 전사하였으며, 후손과 유림에서는
1750년경 나라를 위해 희생한 그의 뜻을 기리고자 세웠다.

충효당 마루
이장발은 15세에 동강 권사온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동강유고에는 "나이 겨우 열다섯에 또 견문이 넓구나"라는 그를
칭송하는 시구가 실려 있고 스승은 제자의 죽음에 다시 시 한 편을 남겼다.
“당 앞에서 색동옷 입고 장난한 지 몇 해던가
독실한 학문 되려 거슬러 오르는 배 같네,
어찌 알았으랴, 전장에서 죽음 앞두고
홀로 남긴 시구에 마음을 다 써낼 줄”

임진왜란이 나자 김해 의병대장 근시재 김해(金垓) 공은
격문을 보내 그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는 어머니가 연로하고
형제가 없어 가기 어려운 뜻을 모친에게 말씀드린다.
이장발은 3대 독자이자 당시 혼인한 지 9개월밖에 안 된 새신랑이었다.

어머니는 뜻밖에 “임금이 몽진했는데 어찌 어미를 돌볼 겨를이 있겠느냐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나라를 위해 죽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라면서
손수 갑옷을 지어 전송했다고 한다. 이은순이 쓴 또 다른 묘표에는
“어머니가 치마를 찢어 발을 싸서 문에서 전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충효당기
이장발의 장인인 황소는 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사위의 옷깃 속에 시 한 수가 묶여 있었다고 하며, 바로 20자 절명시였다.
이후 이장발의 유복자 아들이 태어났다.
이장발이 순절한 지 31년이 지난 1622년(광해군 14). 경상도 관찰사
김지남이 이장발의 죽음에 거룩한 뜻을 담아 처음 나라에 보고하였으며
임금은 옳다고 여겼고 마침내 통정대부 공조참의 품계가 추증됐다.

순절시(殉節詩) 편액
이장발이 죽기전에 남겼다는 충효를 담은 순절시 ~ 임진 6월 10일
백년사직을 구할 계획으로 / 백년존사계(百年存社計)
유월에 갑주를 입었네. / 유월착융의(六月着戎衣)
나라를 근심하다 몸은 헛되이 죽었지만 / 우국신공사(憂國身空死)
어버이 그리워 혼백만 돌아가네. / 사친혼독구.(思親魂獨歸)

충효당에서 보는 대월 이태조 동상

충효당 이장발 유허비각

충효당 화산 이공 유허비(忠孝堂 花山 李公 遺墟碑)

한국~ 베트남 글로벌 교류행사 현수막

충효당(중간)과 이태조 동상(오른쪽) 그리고 창평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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