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향교는 조선 태종7년(1407)에 창건되었으며,
1550년 순천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순천성 동쪽 3㎞ 지점에
이건하였다가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
순천성 서쪽 구지 북편으로, 정조 4년(1780)에 홍내동으로 이전,
마지막으로 순조 1년(1801)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여러 차례 이전한 원인은 옥천의 범람, 산사태 등으로 인한 유실이다.

순천향교 정문
순천향교는 남원향교와 함께 전라좌도 지역에서 최대 규모의
향교로 발전하였으며, 전통적으로 강한 유림세력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수호실 등으로 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의 위패가,
동무, 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정문(외삼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명륜당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순천향교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의 위패가,
동무, 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대성전(보물 제2101호)
순천향교 배향인물(39현)
○5성(五聖) : 공 자(孔子), 안 자(顔子), 증 자(曾子), 자 사(子思), 맹 자(孟子)
○공문10철 : 민손(閔損), 염경(冉耕), 염옹(冉雍), 재여(宰予), 단목사(端木賜),
염구(冉求), 중유(仲由), 언언(言偃), 복상(卜商), 전손사(顓孫師)
○송조 6현 :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소옹(邵雍), 장재(張載)
◎우리나라(신라,고려,조선) 18현 : 신라(2) : 설 총(弘儒候 薛聰), 최치원(文昌候 崔致遠),
고려(2) : 안 유(文成公 安裕),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조선(14) :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이언적(文元公 李彦迪),이황(文純公 李滉),김인후(文正公 金麟厚),이이(文成公 李珥),
성혼(文簡公 成渾),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조헌(文烈公 趙憲), 김집(文敬公 金集),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송준길(文正公 宋俊吉),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명륜당(明倫堂) ~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동재(東齋)

서재(西齋)

풍화루(風化樓)

비림(碑林)

순천향교 중수기념비 등

향교 옆문을 나와 옥천서원으로
매계 조위선생 사후 205년이 되는 1708년에 순천의 유생 수백명이
선생의 관직을 더 높히고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하니, 1713년(숙종 39, 계사.癸巳)
숙종께서 "매계의 학문과 도덕이 참으로 크고 높은데 죽어서 화가 무덤에까지 미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증직하여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을 내리고
자헌대부로 가자 하였으며, 시호를 내려 문장공이라 하였다.

순천 옥천서원 경현문(景賢門)
옥천서원은 무오사화로 이곳 순천에 유배(이배)왔던 매계 조위와
한훤당 김굉필이 각각 사망한지 60년이 지난 명종 19년(1564)에
순천부사 이정(李楨)이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많은 순천 선비들의 주창에 따라
순천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창건하고, 매계 조위선생과
한훤당 김선생을 선성위(先聖位)로 제정하고 배향하였다.

옥천서원
이때 퇴계 이황선생이 서원명을 친필로써 현액하였으며
고봉 기대승은 이 서원의 연원에 관하여 기문을 지어 봉안하였다.
서원의 내력은 두분이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며 지역
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부사 이정이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경현당'을 지은 것이 시초이다.

옥천서원 측면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 ~ 고봉 기대승(奇大升)
가청 계해(嘉靖 癸亥)년에 구암(龜巖) 이공( 李公,李楨)이 승평부사(昇平府使)로
나왔을 때 한훤 김선생(寒暄 金先生)이 이곳에 와서 적거(謫居)하다가 서거 하였다.
하여 개연(慨然)히 선생을 추모하였다. 마침 임청대기(臨淸坮記) 한편을
입수하고는 선생의 소작(小作)으로 여겼는데, 부임(赴任) 즉시 이른바 임청대의
옛터를 심방(尋訪)하고 또 본촌(本府) 사람들에게 물어본 뒤에야 그 기문(記文)이
매계 조공(梅溪 曺公)의 소작(小作)임을 알았다. 드디어 그 옛터에 삼칸의 집을 짓고
"경현(景賢)”으로 이름한 뒤에 기대승(奇大升)이 이 일의 전말(顚末)을 알고 있다. 하여
기문(記文)을 부탁하는 한편 퇴계 이선생(退溪 李先生)에게 글을 올려 자문을
구하고 아울러 사액(寫額,액자를 쓴다는 뜻)을 청하였는데 이 사실이
경현록(景賢錄)과 기어(記語)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 을축(乙丑,1565)년에 사자(士子)들이 이공(李公)을 배알(拜謁)하고
나서 "만약 정사(精舍)를 다시 세워 수호하게 한다면 이 당(堂)도 서로 유지하여
오래도록 인몰(湮沒)되지 않을 것이다" 고 하였더니, 이공(李公)이 승낙하고
당(堂)의 우측에 있는 민가(民家)를 터로 결정, 관전(官田)을 주어 보상한 뒤에 설계를
내어 착공한바, 기꺼이 공사에 부역하는 자가 많아 겨우 5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그 규모는 중앙을 당(堂)으로 하여 양익(兩翼)은 상(廂)이, 좌우(左右)는 재(齋)가 되고,
주고(廚庫)는 그 뒤에 위치하였는데 당(堂)은 옥천정사(玉川精舍)로 재(齋)는 지도(志道)와
의인(依仁)으로 이름 하였으니, 이는 다 퇴계(退溪)선생이 명명하고 또 친필 한 것이다.
낙성하는 날에 이공(李公)이 사자(士子)들을 인솔, 경현당(景賢堂)에 선성(先聖,孔子)의
위패를 위시하여 한훤(寒暄)선생과 매계 조공(梅溪 曺公)의 위패를 배설하고 제(祭)를
드린 뒤에 다른 위패는 철수하고 한훤선생의 위패만을 경현당 좌측 一칸에 봉안,
경현당을 사우(祠宇)로 삼고 제(祭)를 드리는 의식을 규정하여 매년 2월과 8월
다음 정일(丁日)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또 제자들을 모아 정사(精舍)에 머물게 하고
거기에 소요되는 기물(器物), 식량과 서적, 노비에 대해서도 온갖 힘을 기울였으며,
오도(吾道)를 주창하고 현인(賢人)을 기대하는 데에는 더욱더 근실하였다.
이어 이듬해에 이공(李公)이 모상(母喪)을 만나 그만 두고 부령(扶寧) 김후(金侯)
계(啓)가 와서 이를 관장, 이전의 규모를 둘러보고는 선생의 위패가 한쪽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사람을 이공에게 보내 자문을 받고 위패를 다시
경현당 중앙에 봉안(奉安)하니, 의식(儀式)이 일신하고 조리(條理)가 구비되었다.
융경 무진(隆慶 戊辰,1568)년 여름에 사자(士子)들이 정사(精舍)의 건립이 위에
알려지지 못한 때문에 국가(國家)에서의 은전(恩典)이 다른 서원(書院)과 동일하지
않다고 여기고 소(疏)를 올려 간청하여 옥천서원(玉川書院)이란 현액(縣額)이
정식으로 내려지고 사서(四書)가 반사(頒賜)되었으니, 이곳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정진하고 뒤이어 오는 부사(府使)들도 다 여기에 마음을 두어
지주(指晝)하므로 원중(院中)의 모든 일이 완벽해서 조금의 모자람도 없게 되었다.
처음에 이공(李公)이 한훤(寒暄)선생의 유사(遺事)와 당(堂)을 건립한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경현록(景賢錄)을 만들었으나 정사(精舍) 건립에 대해서는 미처 기록되지
못하였었다. 이번에 본 부사(本 府使) 이후 선(李侯 選)이 기대승(大升)에게 글을
보내 부탁하기를, 경현당에 대해서는 자네가 이미 기문을 썼으나 그 사이에
서원(書院)으로 연혁된 까닭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이를 마쳐주기 바란다고 하였고, 원생(院生) 허 상사(許 上舍) 사증(思曾)이
발섭(跋涉,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는 뜻)의 수고를 불구하고, 두 차례나 폐려(幣廬,
자기의 집을 낯춰서 일컫는 말)를 찾아 와서 더욱 강력히 간청하고 나서,
이어 이는 이사군(李使君)의 뜻일뿐 아니라 구암(龜巖)의 뜻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대승(大升)이 이를 감히 굳이 사양할 수 없으나 신병(身病)이 깊고 인사(人事)가
번거로워 오랫동안 붓을 잡을수 없으니 항상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한편 이후(李侯)와 제생(諸生)들이 이 보잘것 없는 글을 구하기 위하여 누차 간청해
마지 않는데는 그만한 의의가 있겠지만 소견(所見)이 워낙 어둡고 고루하여 기대에
부응되지 못할까 염려이다. 우리 동방(東方)이 본시 문헌(文獻)의 나라로 삼국(三國)
이래 호걸(豪傑)스런 인사가 없지 않았으나 그 유덕(遺德)의 광영(光榮)이 영원하여
후세까지 조요(照耀)한 이는 대개 드물다. 그런데 한훤선생이 수천년 이후에 배출
정연(挺然)히 우뚝서서 고인의 학문에 전력하여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충분히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세도(世道)를 붙잡을 수 있으니, 지금이 배우는 이로서
성현(聖賢)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 스스로 예의(禮儀)의 가르침에 격려한다면
어찌 그 본원(本源)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늘이 이 국가를 도와서 도학(道學)이 점차
밝아지고 서원(書院)의 건립이 곳곳에 있으니, 이는 참으로 태평을 장식할만한 도구이다.
다만 제생(諸生)들의 힘쓰는 학문이 능히 성현의 유법(遺法)을 체득하고 국가의
교육하는 미의(美意)에 위배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으기 듣건데 옛적의 배우는 이는
자기를 위하는데 지금의 배우는 이는 남을 위한다고 한다. 대저 배워서 자기를 위하면
성현(聖賢)에 이를수 있고, 배워서 남을 위하면 명예나 녹봉(祿俸)을 위하는 계책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낭패가 아니겠는가? 지금에 사문(斯文)이 불행하고 철인(哲人)이
위락(萎落)하여 퇴계선생(退溪先生)이 후학(後學)을 버렸고 구암공(龜巖公)도
갑자기 가버렸으니, 오도(吾徒)로서 어찌 무척 슬프지 않겠는가?
용호(龍號)가 상망(喪亡)하고 세사(世事) 또한 예측할 수 없으니 제생(諸生)들도
오도(吾道)의 흥망이 좌우되는 이즈음에 처하여 감동됨이 있을런지 모르갰다.
대저 인심과 천리(天理)는 도저히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일상생활에 수시 발현(發顯)
되곤 한다. 제생(諸生)들이 능히 좌절하거나 변동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학문에
힘껏 종사한다면 성현은 이미 멀리 갔으나 그 도(道)는 언제나 여기에 있으니
어찌 그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제생(諸生)들은 제발 힘쓰도록 하라.
융경 신미(隆慶 辛未,1571)년 구월(九月) 일에
후학(後學)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이 삼가 기(記)하다.

경현록(자료화면)
참고로 1564년(명조 19) 순천부사였던 이정(李楨)이 주도하여
간행했던 경현록의 초간본은 김굉필과 그의 스승이었던 점필재
김종직, 동문인 매계 조위의 유문(遺文)을 함께 모아 엮었으나,
이후 퇴계 이황의 정비와 한강 정구의 개편시 다른 인물들의 기록을
제외하고 오직 김굉필의 사적만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정리하였다.

옥천서원에 대하여 설명하는 순천향교 정병규 전교
이후 1568년(선조 1)에 "옥천정사"로 불리었으며, 1597년 소실 후
1604년 허건(許鍵), 심윤(沈玧), 정지추(鄭之推)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1707년에 "옥천(玉川)"이라는 사액을 받아 옥천서원으로 승격되어
마침내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옥천사(玉川祠)
영조 시대에 이르러 순천 지역의 선비들이 조위 선생의 학문적
성취와 지조를 기리기 위해 서원에 함께 모실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760년(영조 36년) 영조임금은 "장이당의 상소 중 선생을 선성위로
회복시켜달라는 요청이 있으니 조위를 함께 모시도록 하라" 고 하명하고
이조좌랑 이정보(李鼎輔,1693-1766)를 보내어 선포하게 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조위(曺偉)와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옥천서원에 함께 모시라는 명확한 기록이 존재한다.

옥천사의 "문경공 한훤당 김선생" 위패(독향)
이 합사를 기념하고 두 분의 행적을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합사 7년 뒤인 1767년에 "경현록" 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경현록의 주요 내용은
1)배향 인물의 행적과 문학, 즉 무오사화라는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
순천으로 유배 온 조위와 김굉필, 두 선생의 유배 생활과
그들이 남긴 시문(詩文)들이 실려 있으며, 특히 이들이 임청대에서
나누었던 학문적 교감과 시적 대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서원의 건립과 운영 기록, 즉 옥천서원이 세워지게 된 배경, 건립과정,
그리고 서원의 규칙(원규) 등이 포함되어 있다.️
3)제례와 찬양의 글, 즉 두 분의 덕을 기리는 축문(祝文), 찬양하는 글(찬),
그리고 서원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碑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영조 시대 유림들이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하려 했는지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순천 옥천서원 묘정비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경현당(景賢堂),
4칸의 지도재(志道齋), 4칸의 의인재(依仁齋), 1칸의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직사(雇直舍) 등이 있다.
묘정비에는 서원 설립배경, 덕행, 이름유래, 보존과 전승 등이 기록되어있다.

순천 임청대(順天 臨淸臺)
순천시 옥천변의 임청대(臨淸臺)는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이 1500년 5월부터 이곳
순천에 이배 되어 귀양살이 하면서, 옥천계곡을 벗삼아 소일하며
개울가에 돌을 모아 대(臺)를 만들고 임청대라 하였다.

순천 임청대(順天 臨淸臺) 비각
"임청(臨淸)" 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대(臺) 이름과 임청대 기문은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이 지었다
그리고 매계선생은 1503년에 병사하고, 한훤당선생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 당함으로써 각각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임청대(臨淸臺) 비
사후 60년이 지난 1563년(명종 18) 구암(龜岩) 이정(李楨)이
이곳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조위선생과 김굉필선생을 추모하여
1565년(명종 20) 옥천서원과 임청대 비(碑)를 세웠다.
비석 앞면은 이황(李滉)으로부터 임청대(臨淸臺)란 친필을 받아
새겨넣고, 비석 뒷면에는 임청대기를 새기려 했으나 돌의 질이
좋지 못하여, 진사 정소(鄭沼)의 글씨로 음기만 새겨넣었다.
임청대비음(臨淸臺碑陰)
연산조때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선생과 매계 조참판(曺偉)이 모두 승평에
귀양와서 서편 냇가에 돌을 모아 대를 만들었으니 이를 임청대라 한다.
매계가 이름을 짓고 기문을 쓴지가 60년이 되었다.
이 기문을 돌에다 새기려 하였으나 돌의 형질이 좋지 못하여
새길수가 없으므로 다만 임청대라고 세 글자만 앞면에 새겼다.
이것은 곧 퇴계선생의 글씨이고 돌에 새긴 사람은 정소(鄭沼)이며
역사를 맡아 감독한 사람은 배숙이며, 부사는 동성후학 이정(李楨)이다.
황명가정 44년(1565) 을축 8월 일 세우다.

순천 임청대비 안내판
임청대 석비의 높이는 1.35m, 너비 0.7m, 두께 0.2m로
진사 배숙(裵璹)이 공사하였으며, 원래는 현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개천가에 있던 것을 1971년 도로확장공사 때에
옮겨왔으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제77호이다.
이 비는 무오사화의 한 유물로 당시 유배인들의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2021년에는 임청대 옆에 임청정원이라는 조그마한 소공원이 조성되었다.
현재 순천시에서는 임청대를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받고자 추진 중이다.

임청정원앞 정자와 우물
순천 임청대기(臨淸臺記) ~ 매계 조위(曺偉)
승평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시냇물이 있다. 동쪽 시냇물은 계족산에서
흘러나오는데, 여러 골짜기의 물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남쪽으로 흘러 북원산
아래에서 합쳐져서 동으로 꺾여 흐르다가 서의 동쪽 한 마장쯤에서 서쪽 시내와 만난다.
하얀 모래와 푸른 절벽에 물이 극히 맑고 넘실넘실 흐르며, 은빛 물고기와 붉은 게들이
가을철이 되면 매우 많이 모여 들었으므로, 관아에서 그것을 잡아서 팔았다.
서쪽 시냇물은 난봉산의 북쪽에서 흘러나오는데, 때때로 비가 내리면 세차게 흘러서
길게 굽이돌아 동쪽으로 흘러 성의 남쪽에 있는 연자교 아래를 감싸 동쪽시내로
흘러가는데, 이를 “옥천”이라고 한다. 소용돌이를 치며 빠르게 흐르는데다,
또 바위굴과 괴이한 바위가 많아서 물이 매우 세차게 흐른다.
연자교에서 서쪽 시냇가에는 모두 사람들이 사는 집들인데, 대나무 울타리와
초가집들이 좌우에 즐비하였다. 관음방에서 부터 100여 걸음을 오르면,
물이 매우 맑고 바위가 매우 기이하며, 나무들이 우거져서 해를 가리고 있고,
시냇가가 넓고 평평하여 3,40여명이 앉을만한데, 매우 조용하고 시원하며,
비록 한여름이라도 더위를 느끼지 못한다. ~

곱게핀 영산홍
~ 내가 승평으로 이배되어 서문 밖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날마다 읍에 사는 사람들과 자주 그곳을 찾아가곤 하였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이름을 “임청(臨淸)”이라고 하였다.
집주인인 심종유(沈從柳), 양우평(梁禹平), 한인수(韓麟壽)등 3명의 부노(父老)와
장(張) 교관이 규약을 제정하고, ‘진솔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날에는 돌아가며 도시락과 나물반찬,술 한 병을 준비하여 와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과 회로 안주삼아 먹었는데, 규칙을 어기는 자는 벌칙이 있었다.
식사 후, 술잔을 서너 차례만 돌려가며 마시고는 그쳤는데, 술을 마시는데 잔을 돌리지
않은 것은 검소하게 하고 준비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날에는 바둑을 두고,
어떤 때에는 담소를 나누다가 날이 어두우면 헤어졌고, 어떤 날에는 달밤에
지팡이를 짚고 돌아왔는데, 이러한 생활을 2년 동안이나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자네는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글 가운데에서 골라 뽑아
누대의 이름을 짓고, 또한 자주 촌 늙은이들을 이끌고서 이곳에 와서 즐겁게
유유자적 하면서도 일찍이 흥겨운 마음을 한껏 드러내는 시 한 수도 짓지 않으니,
이는 어찌 그 이름을 허망하게 하면서 이 누대를 외롭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대답하기를 “’가는 것은 이와 같도다.‘ 라고 공자(孔子)가 탄식한 것과
’반드시 그 큰 물결을 보라‘는 맹자(孟子)의 가르침이 있다.
성현이 물가에 나아가 물을 보는 것은 진실로 그 뜻하는 바가 있으니,
도연명의 귀전지락(歸田之樂)은 낙천지명(樂天知命)에 있었다.
그러니 오로지 높은 곳에 올라 때때로 노래를 부르거나, 물가에 이르러
시를 읊조리는 것만을 오로지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승평은 산천과 기후가 요즈음 나와 맞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든다.
날마다 서너 사람과 조용히 이곳에 와서 어떤 때는 두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고, 어떤 때는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씻으며,
맑은 물결을 내려다보며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오싹하게 찬 물에 얼굴을
비춰보며 머리털을 세면서 하루 종일 얼쩡거리느라 늙은 줄 모르는데, 하필이면
시구(詩句)나 읊조리며 성률(聲律)이나 맞추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겠는가?” ~

임청정원 표석과 500년된 느티나무
~ 옛날 유자후(柳子厚)가 영릉(零陵)에 거처할 때에 산수를 싫어하여,
계곡의 이름을 "우계(愚溪)", 산을 "수산(囚山)"이라고 하여, 모두 악명을
붙였으니, 애초부터 천명을 아는 자가 아니다. 소동파(蘇東坡)가 황강에
귀양살이 할 때에 무창(武昌), 한계(寒溪)의 여러 산들을 두루 돌아보고
전.후 적벽부(赤壁賦)를 지었으니, 이는 고금에 빼어난 문장이나 세상일을
잊고 신선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었음을 끝내 면하기 어려웠으나, 이 또한
천명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직 군자의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방책을 배우고,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 연후에, 구액(窮厄)한 처지에서도
능히 변함이 없어야 천명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연명을
사모하고 공맹(孔孟)을 배운 사람으로 가만히 이에 뜻을 둔 지가 오래 되었다.
또한 내가 이 누대에서 즐기는 것은 거의 천명을 안다고 하지 않겠는가?
아! 이 고을이 생길 때부터 이처럼 아름다운 산천이 있었지만 지도책에
명승(名勝)으로 실려 있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 장(張), 장간공(章簡公)과
주(朱) 문절공(文節公)께서 일찍이 이곳의 부사를 역임하셨는데,
또 다시 한 번도 이 고을을 찾아보고 되돌아보지 않은것인가?
옛날에 드러나지 않고 오늘에 와서 드러나고, 명현을 만나지는 못하고
우리들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이 시대의 다행인가?
창룡(蒼龍) 임술년(1502년, 연산군8년) 8월 하순 매계 노수가 기문을 쓰다.
'그곳에 가고싶다 > 광주.전라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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