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남족자락 천하명당자리에 위치한 법보사찰로써.
신라 애장왕3년(802년) 10.16일에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과 이정 두스님이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여
대장경판당을 중건하고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등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 뒤 여러번의 화재와 중건을 거듭하였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특히 이곳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대장경은 고려시대인 1236년에 시작, 16년에 걸쳐 제작하여 1251년에 완성되었다.
대장경판은 산벗나무등을 통째로 바다에 3년동안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한것으로 뒤틀림이 전혀없으며 국보 제32호이며 장경판전은 국보제52호이다.
눈덮인 겨울의 산사계곡
뒤로 가야산
계곡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다
조금 오르면 볼 수있는 성철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의 부도
일주문
봉황문(해인총림)
해탈문을 지나고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13(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十三, 국보 제265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4(국보 제279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 해인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73호),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범종각과 절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범종각
대적광전
장경판전
장경판전(팔만대장경 보관건물)
눈꽃뒤로 비로전과 대웅전
대웅보전앞
한바퀴 돌아 다시 나오면 일주문(앞면은 가야산해인사) 뒷면은 해동제일도장 현판이 보인다
해인사 충창기(海印寺 重創記)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
기야산은 동남쪽이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워 높고 가파른 절벽이 그림과 같다.
산의 남쪽에 큰 절이 있는데 이름이 해인사라고 하며 신라 애장왕떄 고승 순응이 창건한 절이다.
절 앞에는 봉래,방장,영주 등 여러 산봉우리가 있고 수많은 골짜기의 물이
절 앞의 계곡으로 감싸 흘러들어 내달리듯 빠르고 힘차게 흐르는 물줄기가
바위에 부딫혀 끊임없이 우레가 내려치듯 몹시 요란스럽게 흐르는데,
속세에서는 이곳을 홍류동(紅流洞)이라고 부른다.
무릉교에서 절에 이르는 10여리는 붉은 기슭과 푸른 절벽이 매우 깊숙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고기(古記)에 "산의 형세가 천하에 절경이며
지세는 우리나라에 둘도 없는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믿을 만 하다.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그가 지은 독서당은 부서져서 남아있지 않았으나 시를 쓴 바위는 아직도 남아있다.
고려시대에는 국승(國乘)을 보관하였고 또 대장경판을 보관하여
산은 지도책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절로 인정을 받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세조 혜장대왕(惠莊大王)은 왕업을 다시 일으키고 나랏일을 보살피는 여가에
불교에까지 뜻을 두고 불교를 널리 전파하여 군생들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년, 세조4년) 스님인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이 절에 가서 대장경 50부를 인출하게 하였다.
또 혜각존자(惠覺尊者) 신미(信眉)와 등곡당(燈谷堂) 학조(學祖) 등으로 하여금
장경판당을 시찰케 하였다. 장경판당이 비좁고 허술하다고 보고하자
경상감사에 명하여 옛 건물보다 약간 확대하여 40여칸을 짓도록 조치하였다.
11년 뒤인 무자년(1468년, 세조14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희왕후가 큰 뜻을 정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니 깊은 은혜가 사방에 미쳤다.
생각컨데 세조처럼 부처를 숭배하고 부처를 독실하게 믿는 분이
비전(秘典)을 보관한 것이 얼마나 되었기에 장경의 판당이 벌써 기울어졌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중수할 뜻을 두고 신축년(1481년, 성종 12년)에 주지를 제쳐놓고
학조스님으로 하여금 절을 맡아 관리케 하였으나
마침 연이어 흉년이 들고 나라에 일이 많아 허둥거리다 미처 착공하지 못했다.
계묘년(1483년, 성종14년)에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수대비와 인혜왕대비 두 분은 선왕의 뜻을 추모하여 아름다운 덕업을 이어 받고,
명복을 빌기를 온 정성을 다하였으나 정희왕후가 뜻을 이루지 못한것을 애달프게 여겼다.
그리고는 학조스님으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케 하였다.
무신년(1488년, 성종 19년) 봄에 내수사(內需司)의 쌀과 옷감을 시주하고,
도료장 박중석 등을 보내어 장경판당 30칸으로 증, 개축하고 보안당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이전 판당 가운데에 있는 불전 3칸을 뜯어 대적광전 서쪽에 옮겨 짓고,
진상전(眞常殿)이라 하였으며,
조간 3칸을 뜯어 진상전 옆으로 옮겨 짓고 해행당(해행당)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기유년(1489년, 성종20년) 봄에도 쌀과 포목을 시주하였다.
또 그 이듬해(1490년, 성종 21년)에 시주하여 궁현당, 탐진당, 감물당, 쌍운당과 일원료,
곡응료, 총지료, 도병료 등의 요사 그리고 강당으로 무설당과 식당으로 만월당을 지었다.
비로전을 다시지어 대적광전이라 이름을 고치고,
주불(主佛)과 협시불(夾侍佛)을 개금하고 종루인 원음루와 불이문이라는 중문을 지었다.
또 옛 대장전을 뜯어 대적광전 동쪽에 옮겨 짓고 함허료라 이름하고,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 00권을 보관하였다.
또 해설료,소연료,가감료,원융료,쌍할료,호연료,두원료, 연기료,명진료,현근료,
달속료,성행료,중형료,전생료,작숙료 등을 짓고,
동쪽에 무진장,서쪽에 이영고라는 누고를 지어 무려 집 60칸을 짓되
어떤 것은 과거의 것보다 크게 짓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작게 짓기도 하면서,
규모가 화려하고 생기가 넘치는 활발한 기상을 몇 배나 더했다.
공수간,목욕탕,헛간,화장실과 동종,목석,요발,대고 따위도 모두 갖추어 새롭게 하였고,
금벽색의 단청이 산골짜기를 휘황찬란하게 하였다.
이에 역사를 마치고는 9월 보름에 고승 대덕 수천명을 초청하여
법회를 크게 열고 낙성하니, 비로소 산문의 일을 마쳤다.
등곡(燈谷)스님은 내가 일찍이 해인사를 유람하여 그 대강을 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어 매우 간절하게 "중수기"를 구하였다.
나는 본래 유자(儒者)로서 불교에 대해서는 어두운 사람이다.
그러니 선근(善根)을 닦아 복을 심는 이치와 윤회 보응하는 인과를 배운적이 없는데,
그밖에 공덕이 있고 없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최 문창후(최치원)는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인데
바로 여기가 여생을 마친 곳이므로 여기에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두 전하께서 선대의 군주를 위한 정성이 시종일관 더욱 돈독 하였으니,
이를 마땅히 기록하여 후세에 영원히 전해야 할것이오,
또한 전하의 뜻을 받들어 부지런히 일을 하며 허둥대지 않고,
크고 작은 계획을 잘 알아서 공사를 진행하며, 조금도 게으럼을 피우지 않게 하고,
일하는 순서를 조정하여 빨리 끜나게 하는 것이 훌륭한 감독자를 만나는 것에 달려 있음에랴.
이러한 사실은 잘 기록하여 옛날 순응대사의 공적과 함꼐
후세 사람에게 전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아! 흥망성쇠는 또한 운수이다.
이 절이 당나라 정원18년(802년)에 처음 지어져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그 많은 전쟁에도 우뚝하게 보존되었다가,
오늘에 이르러 태평시절 만나고 임사지성(任姒之聖)을 만나 전당과 요사채와 같은
여러 건물들이 새롭게 중건된 일은 운수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으며,
또 해인사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또한 생겨나고 망가지는 운수가 하나같이 하늘에 달렸는지.
사람에게 매였는지는 모르거니와, 흥망성쇠가 끝없는 이 세상에서
이 절이 언제까지나 오늘과 같을 것을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겠는가?
훗날 이 절을 맡는 자는 마땅히 두 전하의 독실한 효성과
등곡 스님의 경영하던 수고를 항상 잊지 않고 그것을 신중하게 지키며,
훼손하지 말고 성쇠의 운수에만 맡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홍치 4년 신해년(1491년, 성종 22년) 상한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판과 춘추관수찬관 창녕(昌寧) 조위(曺偉)는 기(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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