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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3)황간 가학루

by 안천 조각환 2012. 8. 3.

가학루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있는 정자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호다.

민주지산과 삼도봉의 북쪽계곡에서 발원하여 물한계곡을 지나

초강천 맑은 계류가 황간을 적시며 흐르는 바로 그곳,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에 가학루가 있다. 

이 가학루는 1393년(태조 2) 황간현감 하첨이 창건했는데

경상도관찰사 남공이 세월과 세상이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하다는 뜻에서

가학루라 편액하고, 이첨(李詹)이 기문을 썼다.

그 뒤 1490년(성종21 년)7월, 당시 황간 현감 손번이 중수(1차)하였는데

(일부 기록에는 광해군때라고 되어 있는데 손번은 성종때 현감임)

그 때 매계 조위선생이 가학루 중수기를 썼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현감 구장원이 중건(2차)한 후

1716년(숙종 42) 현감 황도(黃鍍)와(3차) 정조 때 현감 이운영(李運永)이 중수(4차)했으며,

1929년(己巳)에 김석영(金錫泳) 군수가 5번째 다시 중수했는데

기사(1929년) 8월 甲子에 충원(忠原) 박제광이 쓴 가학루5중수기는 가학루에 걸려있다.

가학루 바로 옆에는 황간 향교가 있으며,이곳에서 조금만 하류로 내려가면 

그 경치가 아름다워 달도 머물어 간다는 월류봉(月留峰)을  만나게 된다.

 

황간 가학루(黃間 駕鶴樓)


황간 가학루 중수기(黃間 駕學樓 重修記)


                                                                                                       조위(曺偉,1454~1503)


황간 고을은 드높은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동남쪽의 모든 계곡의 물들이 그 아래로

돌아 꺾이어 서쪽으로 가는데 세차게 흘러 돌에 부딪치면 거문고와 비파, 피리 같은 소리가 주야로

끊어지지 않는다. 고을 서쪽 오리쯤 되는 곳에 서너 봉우리가 우뚝 솟아 들여 볼 듯 섰는데,

그 가운데 청학굴이 있다. 바윗골은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객관 모퉁이에 성가퀴가 있어 푸른 언덕에 임해있고,

그 위에 옛날부터 누대가 있었는데, 이것이 가학루라고 한다. 영락 연간(永樂年間)에 상공을 역임한

귀암 남재(南在)가 현판을 달았다. 그 뒤에 불에 타서 객관과 함께 모두 재가 되었고,

다만 주춧돌만 남아 있은 지 사십 여년이나 되었다.

성화 병오년(1486년, 성종17년)에 밀양 손번(孫蕃)이 청아하고 통달한 재주로써 교서관에 뽑혀

들어갔다가 어버이가 늙음을 이유로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해서 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부임 하자마자 기강이 일신해지고 한 해도 되지 않아 고을 안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에 아전 및

백성들과 의논하여 공장(工匠)들을 모아서 객관을 중수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기유년(1489년, 성종20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1490년, 성종21년) 7월에 완성하였다.

 먼저 정청(政廳)을 세우고 다음으로 익실(翼室)을 지었으며, 익실 동남쪽에는 옛터에다 누대 세 칸을

나란히 짖고 그리고 나서 가학(駕鶴)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비록 이것은 기왓장과 들보가 서로 연해서 따로 지은 것은 아니나 바라다보면 날아가는 듯하고

난간과 문 가운데 강산을 맞아들이고, 책상과 자리위에 항해(沆瀣)를 일으키는듯하며 허공에

 매달린 듯한 빼어난 경치가 실로 이한도(충청도)에서 제일이었다. 여기 오르는 자는 표연히

낭원(閬苑)과 단구를 밟는 듯하다. 손 현감이 이 누각을 중수한 대강을 글로 적어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컨대 경(境)이 스스로 명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서 명성이 되는 것이니, 폐하고 흥하는데 경과 사람이 만나고 합하는 운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우주에 이 강산이 생긴 이후로 반드시 구안자(具眼者)를 기다려야만

 능히 그것을 발휘되고 이름을 드러내어서 문자로 적어 무궁하게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니,

황강(黃岡)이 소동파를 만나지 못했으면 적벽이 어찌 이름을 나타냈을 것이며,

무이(武夷)가 주회암을 만나지 못했으면 운곡이 어찌 이름이 알려 졌겠는가?

그러나 소동파의 필력과 주회암의 도화도 반드시 적벽과 무이의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니,

경치와 사람이 서로 만나고 서로 도움을 주는 유익함을 어찌하겠는가? 이제 황간의 시내와 산과

문물은 처음에는 귀암(남재)을 만났고,  두 번째는 손 현감을 만나서 하늘이 능히 숨기지 못하고 땅이

능히 감추지 못해서, 그 맑은 경치를 더욱 더하게 하고, 그 정채를 발하게 되었으니,

어찌 천고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손 현감이 정사를 보는 여가에 여기 올라가 바라보면,

청산은 스스로 푸르고, 백운은 스스로 희어 마음 가운데 조그만 티끌도 일어나지 않아서,

소연히 세상 근심의 시끄러운 것을 잊고, 유연히 도체의 유행함을 보아서 학문이 날마다 고명 광대한

지경에 나아갈 것이니, 어찌 한갓 그 문장을 크게 드날리고 그 생각하는 것을 도울 뿐이겠는가?

그러면 이것은 황간의 다행함이겠는가? 또한 손 현감의 다행함이겠는가?

나는 티끌 속에 파묻혔으면서 남쪽나라의 강산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한지 오래되었다.

훗날 어떤 일이 있어 남쪽으로 가게 되면 이곳에 가서 놀며 누각에 올라 한번 취해 임고도사의 꿈을

다시 잇고, 구령자 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최호와 이태백의 시를 읊으며

가학의 뜻을 자세히 토로하여 묵은 소원을 풀어볼까 하노라. 라고 하였다.

 

黃間 駕學樓 重修記

                                                                                    曺偉

黃之爲邑 據層嶺俯絶璧 東南衆壑之水 來繞其下 盤析而西 湍流激石 琴筑竽籟之音 不絶晝夜 縣之西五里許 有數峯斗起 침(門+馬)然而止 中有靑鶴窟 巖洞幽邃 煙霞縹渺 過之者疑非人寰中境界也 客館之隅 跨雉堞臨蒼崖 舊有樓曰 “駕鶴” 永樂年間, 龜岩南相公在揭扁也 後燬於火 與客館俱灰燼 只留殘礎者四千餘年 成化丙午 密陽孫候蕃 以淸雅通達之才 選入芸閣 以親老乞郡 宰是邑 甫下車 而紀綱一新 未閱歲 境內大治 乃謀吏民 鳩集工徒 以重營廨于爲己任 始事於己酉八月 斷手於明年七月 首建正廳 次及翼室 室室之東南 仍舊址橫起樓三楹, 因扁以駕鶴 雖(瓦?)榱相連 不別營建 而望之翼如 迎江山於欄楯之中 挹沆瀣於几席之上 凌虛架空 絶特之觀 寔冠於一道 登之者飄然如躡閬苑而仍丹丘也 孫侯以樓之槩 走書請記 余惟 境不自勝 因人而勝 廢興遇合之數 豈偶然哉? 自有宇宙 便有此江山 而必待具眼者 然後爲能發揮而標名之 載諸文字 垂之無窮 使黃岡不遇坡公 赤壁何因易顯名? 武夷不遇晦菴 雲谷何由而知名? 雖然 坡公之筆力 晦菴之道學 未必無赤壁武夷之助也 則境與人之相遇相資之益 爲如何哉? 今黃之溪山雲物 初遇於龜巖 再遇於孫侯 天不能秘 地不能藏 增益其淸勝 開發其精彩 豈非千古之一幸? 而侯於簿書之暇 登臨擧目 靑山自靑 白雲自白 方寸之間 一塵不起 翛然忘世慮之紛糾 悠然觀道禮之流行 學日進於高明廣大之域矣 豈徒昌其文辭 助其謀慮而已耶? 然則黃之幸也歟? 侯之幸也.


현재의 가학루 중수기 편액

*1490년(성종21년) 7월에 완공하고 조위선생이 쓴 이때 중수기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가학루에 걸려있는 아래의 가학루5중수기는 1929년(기사년) 8월 甲子에 충원(忠原) 박제광이 쓴 중수기이다 .


황간 가학루 정면(2019.9.13)

 


황간 가학루 뒷면(2019.9.13)


측면


바로옆 향교 정문과 홍살문


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향교앞 공자상



 가학루에서 조금 하류에 위치한 월류봉

 

월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