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 이현보선생(聾巖 李賢輔: 1467-1555)은 1467년 7월 29일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20세 때 홍귀달洪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32세에 문과 급제했다.
그 후 사관, 지평을 지내고 영천군수등 여덟고을을 거쳐 경상도관찰사까지 올랐다.
1557년에 시호 "孝節"이 내리고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면 분천리인 도산서원 진입로 입구아래 강변에 영천이씨 100여호가 있는 마을에 있었는데
1970년대 안동댐(1971-1976)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종택,분강서원,애일당 모두 지금의 도산면 가송리로 이건하게 되었다.
현재의 농암종택 전경
종택 대문채
사랑채 - 뒤에는 안채가 있다
분강서원 전경
분강서원 강당 -오른쪽 건물은 사당
애일당 전경 -(오른쪽이 애일당, 왼쪽은 강각)
-애일당은 그가 46세때인 1512년, 원래 고향집옆 분강기슭의 농암바위위에 지어 놓고
명절때면 이곳에서 색동옷 차림으로 춤을 추는등 늙으신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한다.
"愛日"은 보모가 살아계신 나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다.-
농암종택앞의 강(낙동강 상류)
멀리 보이는 곳이 청량산
-아래의 사진과 글은 농암종택 유적지 "농암종택"에서 옮겨옴-
이건 전인 1960년대 후반의 의 옛 분강촌
35번국도 청량산 가는길에 분천리라는 표지판과 더불어 도산서원 진입로에 이른다.
분천리는 안동 영천이씨의 집성 마을이고, 안동댐 이전에는 10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분천은 한자로 ‘汾川’이라 쓰는데, 우리말로 ‘부내’라고도 불렀다. 부내 산천은 도산에서도 가장 빼어났다.
지금의 도산서원 진입로 아래 강변 마을인데, 앞으로 흐르는 강을 ‘분강汾江’이라 하여 ‘분강촌’이라고도 했다.
배산임수와 더불어 끝없이 펼쳐진 70여 만 평에 이르는 문전옥답은 살기 좋은 터전으로 더할 수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모재 김안국은 “마치 도원경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으며, 농암 이현보는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영천이씨가 이곳을 차지할 수 있었음은 다른 성씨들에 비해 시차적으로 좀더 일찍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도산은 강력한 재지 기반을 지녔던 토성(土姓) 선성김씨와 선성이씨가 마침 이곳을 떠나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정착하면 그대로 터전이 되는 그런 시대였다.
영천이씨 입향조 이헌(李軒)의 정착이 1350년 무렵이니 다른 성씨보다 최소 50여 년은 앞서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이웃 온혜에 왔을 때 ‘주민 한 집이 있었다’고 한 것처럼 부내 역시 별 차이가 없었다.
이를 개척하며 삶의 터전을 열었다. 이헌은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파(坡)는 의흥현감을 지냈다.
파의 외손녀는 노송정 이계양의 배위(配位)이니, 곧 퇴계의 조모다. 이런 관계로 농암과 퇴계는 7촌의 인척이 된다.
공교롭게도 회재 이언적의 증조모와 농암의 조모도 자매여서 또한 7촌 사이가 된다.
1.농암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1542년 정계를 은퇴하고 돌아오는 한강 뱃머리에서 한 수 시조를 읊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았다고 하여‘효빈가(效顰歌)’라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2.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귀먹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감격적인 시조 한 수를 다시 읊었다. 그 시조가 유명한‘농암가’이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3. 은퇴후 농부로 자임하고 일반서생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없는 생활을 하며 유선(儒仙)으로 추앙받게 되는데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세계의 지평을 열며,
‘어부장가’, ‘어부단가’를 비롯한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가작품을 남겨,
한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쳐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았다. 다음은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이다.
굽어보면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열 길 티끌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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