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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昌寧曺門의 뿌리

창녕조씨 시조영적비각인 일원각(一源閣)

by 안천 조각환 2018. 11. 23.

일원각은 창녕 고암면 대암리 380 에 소재한

창녕조씨 시조영적비각(昌寧曺氏始祖靈蹟碑閣)으로 1892년(고종 29)에

조시영(曺始永,1843~1912, 동부승지, 경상도 관찰사)건립하였으며

영적비명은 우부승지 완산 이건창(右副承旨 完山 李建昌)이 지었다(撰)

 

일원각 전경(2019.11.10)

 

일원(一源)이란 하나의 근원, 또는 하나의 기원이란 뜻으로

하나의 뿌리 즉 창녕조씨의 한 뿌리, 기원을 새긴 비라고 할 수 있겠다.

 

시조영적비명(始祖靈蹟碑銘)

 

조씨는 신라태사 부마 창성부원군으로서 비조를 삼나니

고려시대에 여덟평장사와 아홉소감이 났을뿐아니라

조선에 들어와서도 도덕과 공훈이 끊일새 없이 나타나

지금에 와서 자타가 대성이라한다.

태사공의 어머니는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따님으로써

결혼전부터 복질이 있어 창녕 화왕산용지에서 목욕하고 기도하던중

홀연 운무가 자욱하여지며 백주에 지척을 분간할수 없이 되었는데

그 후 이상하게도 병이 낫는 동시에 회임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날 꿈에 어떤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동해용왕의 아들 옥결인데 이 애를 잘 양육하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탄생하시니 얼굴이 이상하게 생겻을뿐아니라

겨드랑이에 조(曺)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신라왕은 "曺氏"라는 성과 "계룡(繼龍)"이라는 이름을 내리셨다.

 

장성하여 진평대왕의 부마가 되시고

왜구를 동래에서 정벌할때 왜병이 두려워하여

"曺公은 하늘사람이라" 하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것은 曺氏의 족보에 기록되어있는 사실이다.

금상(고종)29년에 조씨가 서로 논의하여 용지위에 비를 세우기로 하고

이조참판 인승(寅承)이 주간이되어 나에게 그 비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씨와 세의가 돈독한 터임으로 구태어 사양할수 없어

이에 그 족보의 기록을 참고하여 대략 앞에와 같이 요약하는 바이다

 

일원각 편액과 비석(2019.3.16)

 

생각컨데 기화(일종의 조화불측한 신비적 현상)로서 사람이 탄생하였다는 일은

상송과 주아를 비롯하여 좌씨춘추전사마씨소저에 이르기까지

괴상한 기화지사가 허다하게 기록되어있어 간혹 이치에 부합되는것도

없지 않는 바인데 저 소순이가 자기신념만으로 판단하여

이것을 허황무근지설이라고 일체를 부인한것은 지나친 단안이라고 생각되는바라

즉 천지의 큼과 고금의 다름에 어찌 심상(尋常)한 식견으로 국한 할수 있으랴

 

시조 영적비

 

다시 생각컨데 우리동방은 국토의 개벽과 문화의 발달이 가장 뒤떨어져

신라는 중국의 한(漢)과 동시대로써 저 한나라에서는 모든문명이 대단히 발달하여

단순하고 질박하던 미개시대를 벗어나 고대신화가 이지적 판단앞에

그 사실여부가 논란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동방에서는 저 아득한 상고신화시대와 같은 기화신화가 종종 나타났으니

이것은 즉 우리동방의 지운이 비축됨이 연구(年久)하여

그 나타남이 더딘 탓인가 생각되는바라

 

 

그런고로 삼한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재의 배출과 부귀복택이 면면부절하여 끊일줄을 모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조씨득성(曺氏得姓)의 유래는 더욱명백한 시실로서

그 전하여 듣는바와 또한 전해옴이 지금에 이르러서 자손된자 어찌 믿지못할것이랴!

이미 굳게 믿고 있는바이라 그러니 어찌 이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고자 생각지 않으랴!

 금반 조씨의 건비지사(建碑之事)는 예의에 맞는일이니

예라 하는것은 즉 그 근본과 시초를 소중히 여기는것인 까닭이다.

 

노래하여 가라대

동쪽바다 저쪽에서 해도솟고 달도뜨네

주옥으로 꾸민집에 용자님이 계셨으니

금린만점 곱다해도 짝을어찌 지으리까

오색구름 불러타고 하늘멀리 날았도다

화왕산 높은봉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남기에 고인물이 맑고깊어 용지되니

요조숙녀 목욕타가 의지하고 느낌있어

탄생하신 귀동자는 의젓하게 자랐으니

공주님과 짝을지어 이궁영화 누리셨고

덕망과 위엄앞에 왜병들도 물러섰네

무성하게 뻗은나무 잎잎마다 빛이나니

효제충신 어김없이 뒤를이어 남이로다

거룩하신 그신우를 남이어찌 따르리까

마침내 돌에새겨 세상에 밝혔으니

우뚝한 비석앞에 자손만대 빛나네

 

우부승지 완산 이건창 지음(右副承旨 完山 李建昌 撰)

 

음기(陰記)

 

우리 비조 태사공께서 신이한 감응에 의해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서문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대저 태사공이 가신지 일천삼백여년이 되었건만

아직까지 그 관향에 하나의 표석도 건립되지 못하여 수만 수억의 후손들이

우리 비조가 어느 지방에 발상되고 어느 시대에 창시된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것은 사실 누대의 유감이었는데

이번의 공사야 말로 선대를 추모하고 후대를 열어놓은 계기이다.

비가 완성된 뒤 건립할곳을 모의할 때 모두들

 "화왕산 꼭대기에 건립했다가 초부,목동에 의해 마멸되느니보다 아예 후손들이

 거주하는 곳에 건립하여 오래도록 유전시키는 것이 낫지 않는냐"고 결정지었다

더우기 태사공의 출생지는 아무리 다른 곳이라 하더라도

그 주거지는 이곳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중론에 따라 대암에 건립하는 바이다

후손 병의(柄義)가 삼가 기록하다

 

 

 

 

시조 태사공이 태어나서 자랐던 곳으로 추정되는 고암면 대암리마을(일원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