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수영성은 보령시 오천항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사적 제501호이다.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충청수영성 서문인 망화문(望華門)
성 안에는 여러 관아 건축물들과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서문인 아치형 석문(石門)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의 내삼문만이 보존되고 있다.
성문안쪽
충청수영성이 있는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조선 세조 12년(1466년) 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그 규모는 산하에 배속된 군선(軍船)이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문안에서 본 오천
또한 충청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갑오개혁 이후인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면서 성벽과 건물은 허물어졌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다.
영보정은 다산 정약용이 “세상에서 호수․바위․정자․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라고 했을 만큼 경관이 뛰어나
선비들의 극찬을 받아왔던 누각으로, 현재의 영보정은 2005년도에 복원하였다.
진휼청과 뒤로 보이는 영보정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軍律)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인데
현재는 천주교 갈매못 순교성지로 조성되어있다.
진휼청(賑恤廳)
영보정(永保亭)
영보정
영보정(永保亭)은 1504년(연산군 11년) 충청수사 이량(李良)에 의해 창건돼
7차례 중·개수를 거쳤고 1878년(고종 15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2015년에 다시 복원됐다.
영보정 누대(마루위)
누대에서 보는 오천항과 보령방조제(내륙쪽)
멀리 수영성 장교청(將校廳)과 그 뒤의 오천교회
천상누대화중강산(天上樓臺畵中江山)
천상 누대에 오르니 그림같은 강산이 펼쳐지네
정약용의 "영보정연유기" 편액
다산 정약용 선생은 1795년 병조참의로 재직 하다가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사건으로 그의 형 정약전이 연루되자
그 역시 천주교 신자로 모함되어 품계를 6등급이나 강등시켜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되어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정조가 당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산을 좌천 보내면서도 "살아서 돌아올
궁리나 하라"며 다짐을 했을정도로 정조의 다산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공을 금정으로 보내는 것은 홍주지방에 서학이 급속도로 만연되고 있기 때문이오.
공이 가서 그들을 따뜻이 선도하길 바라오." 라고 하였다 한다.
영보정에서 보는 오천항풍경(서해안쪽)
장교청(왼쪽)과 내삼문(오른쪽)
비림(碑林)
공해관(控海館) 내삼문
장교청(객사) 입구
장교청(將校廳)
늦게야 홀로핀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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