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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쉬어 가는곳/이야기 마당

명원(名媛) 이매창의 첫사랑 유희경 그리고 허균

by 안천 조각환 2022. 8. 22.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이 시조를 남긴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부안(扶安) 기생으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 매창공원

 

이매창의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 또는 계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이매창은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의 딸(서녀)로 태어났는대.

시와 글, 노래와 거문고 등이 능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부사(扶士)의 탑

 

그녀는 1610(광해군2)년 여름 38세로 요절했는데  부안 매창뜸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으며

대표적인 시 "이화우(梨花雨)"는 가곡원류 시조집에 실릴정도로 유명하다.

매창이 죽은지 45년만인 1655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들이 뜻을 모아 묘비가 세워졌고,

1668년에는 부안의 아전들이 당시까지도 외워서 전하던 그녀의 한시 58편을 모아

개암사(開岩寺)에서 목판집으로 매창집(梅窓集)을 간행하였다.

이매창의 묘(위)와 묘비

아래 왼쪽 ~ 명원 이매창지묘(名媛 李梅窓之墓,1655년),  오른쪽 ~ 이매창묘(李梅窓墓,2015년)

 

이매창의 묘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1983년) 되었으며

2015년에는 이매창의 묘역을 중심으로 매창공원이 확장조성되었다.

매창공원에는 매창이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이화우(梨花雨)를 비롯한 8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매창의 죽음을 전해듣고"의 시조, 또 시조작가이며 국문학자인

남촌(南村) 정비석(鄭飛石)의  "매창묘를 찾아서" 소설가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매창(梅窓)뜸,

부안의 향토 문인인 김민성(金民星)의 "매창묘에서" 등의 시비기 세워져 있다.

 

이매창의 시비

 

매창의 정인(情人)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1590년경 부안으로 내려왔다가 매창을 처음으로 만난다.

그러나 유희경은 2년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매창과 이별하게 되는데,

그 때 매창의 나이는 방년 21세로.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매창은 유희경과 이별한 후 그리움을 노래한  그 유명한 "이화우" 란 시를 남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이화우’라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다.

한양에 머물고 있던 유희경 "오동우(梧桐雨)"라는 그리움의 시를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낭가재낭주(娘家在浪州)  /  아가주경구(我家住京口)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  /  장단오동우(腸斷梧桐雨) 

 

월명암에 올라 (등월명암, 登月明庵)  시  이매창

 

 터를 가려 지은 절이 반공간에 의지하는데,   

한번 울리는 맑은 풍경소리가 푸른 하늘로 통하네.    

나그네 마음도 황홀하게 어리어 도솔천에 올랐으니   

 황정경(黃庭經)을 읽고 나서 적송자(赤松子)를 뵈리라.    

 

 복축란약의반공(築蘭若倚半空)  일성창경철창궁(一聲淸磬徹蒼穹)

객심황약등두솔(客心怳若登兜率) 독파황정예적송(讀罷黃庭禮赤松)

 

가을   (이매창)

 

기러기 울고가는 서리찬 가을 밤 

설레는 마음안고 다락에 올라

천애(天涯)에 게신 님소식은 없고

난간에 기대니 마음 더욱 아파라.

 

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병중, 2)옛 님을 생각하며, 3)취하신 님께, 4)천층암에 올라서,5 )어수대, 6)임생각

 

3)취하신 님께 (贈醉客)  이매창

취하신 손님이 명주 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 저고리 하나 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요.

취객집나삼(醉客執羅衫),  나삼수수열(羅衫隨手裂)
불석일나삼(不惜一羅衫), 단공은정절(但恐恩情絶)

 

위 왼쪽(허균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오른쪽 (정비석의 매창묘를 찾아서)

아래 왼쪽(김민성의 매창묘에서) 오른쪽 (이병기의 매창뜸) 시비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허 균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애계랑  /  哀癸娘

 

묘구감금금(妙句堪擒錦)  /  청가해주운(淸歌解駐雲)

윤도래하계(倫桃來下界)  /  절악거인군(窃樂去人群)

등암부용장(登暗芙蓉帳)  /  향잔비취군(香殘翡翠裙)

명년소도발(明年小桃發)  / 수과설도분(誰過薛濤墳)

 

 

처절한 반첩호의 부채라·(凄絶班姬扉) / 비량한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로세·(悲凉卓女琴)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飄花空積恨) /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襄蕙只傷心)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蓬島雲無迹) / 한 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滄溟月已沆)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他年蘇小擇) /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했네·(殘柳不成陰)

 

공원옆의 매창테마관

매창화우상억재(梅窓花雨相憶齋)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떄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 하는 집" 이라는 뜻

(김병기 서예가, 전북대 중문과 교수)

 

기념관 내부

 

매창은 20살인 1592년경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과 만났는데.

유희경은 천민 출신인데다 둘 다 시에 능해 평생의 연인이 된다.

이후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와 교산 허균(蛟山 許筠)등과도 교유했다.

1607년 유희경은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양반이 되어 63세의 나이로 다시 만난다.

그러나 유희경은 가족이 있는 양반의 몸이되어 곧 한양으로 다시 떠나게된다.

 그 후 서로 많은 시를 통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겼지만 더이상 만나지는 못했으며

그리고 3년 후, 광해군 2년(1610) 여름 이매창은 세상을 떠난다.

 

 

허균은 1601년 6월 호남 지방의 전운 판관(轉運 判官:삼창의 양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직책)으로

임명 되어, 보령과 남포를 지나 전라도 만경에 이르렀고, 부안에 도착한 것은 7월 23일이었다.
이때 부안의 기생인 계생(이매창)을 만났는데  이날은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으며, 계생(桂生)은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고,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때부터 허균과 이매창의 인연이 시작되었으며, 허균과 매창은 육체적으로가 아닌

정신적으로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다. 이매창 역시 허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정인(情人)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관계는 이어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