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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서울,경기.강원권

허난설헌 창가에 휘늘어진 벗꽃가지

by 안천 조각환 2023. 3. 31.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일컫는 허난설헌,  두 남매를 기념하기 위한 문학 공원으로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 터인 강릉 경포호 옆 초당마을에 꾸며져 있다.

초당(草堂)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1517~1580)의 호이다.

 

허난설헌 생가 창가의 벗꽃

 

허난설헌 생가는 경포앞바다의 바람을 막아주는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에 있는데,

벗꽃이 만발한 솟을대문 안으로 네모나게 지어진 본채와 사랑채가 있디.

생가앞 입구에는 기념관이, 옆쪽에는 전통차 체험관이 소나무숲에 둘러 싸여있다.

가까운곳에는 경포대와 김시습 기념관, 그리고 유명한 선교장이 있다.

 

예년보다 조금 일찍 핀 절정의 벗꽃

 

허균(許筠, 1569~1618)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리고도 하였다. 

허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요 문인이다.

대대로 고관직을 누리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허엽(許曄)으로

동인의 거두였으며, 그의 맏형 허성(許筬)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그의 둘째 형 허봉(許)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하다.

또 누이는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생가 솟을대문

 

초당 허엽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부인인 깅릉김씨의 소생으로 난

허봉(1551~1588), 허초희(허난설헌의 본명, 許蘭雪軒, 1563~1589),

허균(許筠, 1569~1618)의 글재주가 뛰어났다.

이런 가정의 배경으로 어릴 적부터 유성룡과 같은 명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리게 되었으며, 또 어릴 적에 누이 난설헌과 함께 서자 출신

시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이때부터 당시 서자들의 사회적인 실상을 알게되었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으며,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 감사 아랫자리)와 수안군수가 되기도 했으나

관아에 부처를 모시고 염불을 하며, 부모 상중인데도 기생을 끼고 놀아나는 등

기행을 일삼다가 비난을 받고 벼슬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나,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이런 탓에 그는 불우한 문인이나 시인들과 어울렸고 또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 승려,

무사들과 어울려 술로 나날을 지냈으며,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 좌참찬이 됐으며,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은 사회 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그는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자신이 편찬해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했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으며, 그가 25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을 비롯하여

시선집인 국조시산(國朝詩刪) 등은 그의 시 안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이 밖에 허문세고(許門世藁), 고시선(古詩選), 당시선(唐詩選), 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

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 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으며,

또 임진왜란의 사실을 적어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동정록(東征錄)과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 한년참기(旱年讖記) 등도 있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장독대

 

강릉의 향토음식이 된 초당두부는 허엽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천일염이 부족한 이 지역에서 두부의 간수를 바닷물로 맞추게 한데서 전해졌다고 한다.

 

담장안 명자꽃(산당화)과 담장밖의 벗꽃

 

자목련

 

담장밖 소나무숲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기념관입구와 현판

 

전시관의 한정록(閑情錄)

 

한정록은 허균(許筠 : 1569~1618)이 편찬한 사대부의 생활교양서이다.

17권 4책으로 관에서 물러나 산림에 퇴거한 사대부를 위해 지은 책으로,

은거생활을 노래한 시·잡문, 농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실고 있다.

처음에는 은둔·한적·퇴휴(退休)·청사(淸事)의 4문으로 나누어 편집했는데,

1614, 1615년 2번에 걸쳐 중국에 사신으로 간 기회에 4,000권이 넘는 책을 구입하여,

이를 토대로 1618년, 내용을 크게 보완하여 16문으로 구성했고 부록을 더했다.

 

기념관 전경

 

홍도화

 

허균,허난설헌 생가옆 솔숲

 

울창한 솔숲

 

허씨 5문장의 시비

 

왼쪽(경포호 정자, 교산 허균), 오른쪽 (난하에서, 하곡 허봉)

 

왼쪽(밤에 남루에 올라, 약록 허성), 중간(고성의 해산정에서, 초당 허엽), 오른쪽(죽지사 삼, 난설헌 허초희)

 

허난설헌(蘭雪軒)의 본명은 허초희(楚姬,1563~1589,)이고 다른 이름은 옥혜이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기 어려웠던 시기인대도, 여성으로써 글을 배우고,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었던것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던 허씨 집안 덕분이었다. 

허초희는 15세무렵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은 글공부 대신 기생방에서 밤을 세우기 일쑤이고,

가정은 뒷전인데다 완고한 시어머니와 불화를 겪게된다.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1563~1589) 동상

 

게다가 1580년 아버지 허엽이 죽고 잇달아 어머니와 자신의 딸, 아들까지 병으로 잃게되자

그 충격으로 태중의 아이마져 유산되고, 오빠 허봉도 귀양살이 후 방랑생활을 하다 죽게된다.   

이런 일들이 10년도 안된 사이에 일어나자 허초희도 27살의 나이로 세상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후에도 불행은 계속되어 동생 허균이 역모죄로 거열형을 당하고

아버지 무덤이 파혜쳐지는 등 집안이 완전 몰락하고 만다.

 

*허난설헌의 남편인 김성립(金誠立,1562~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견(汝見) 혹은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본관은 안동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던 중,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던 중 전사하였으며,

시체를 찾지 못해 그의 의복만을 가지고서 장사지냈다 한다.

아들이 없어 양자 진(振)을 입양하였다. 사후 이조참판이 추증되었다.

 

 

동상앞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곡자(哭子) 시

 

아들 딸 여의고서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올해도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두 무덤 나란히 마주보고 있구나.  /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   紙錢招汝魂 (지전초여혼)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아무렴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  /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  浪吟黃坮詞(낭음황대사)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  피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담장의 홍도화

 

채연곡(采蓮曲) 연밥을 따며 부르다  ~  허난설헌 

 

가을날 맑은 호수는 푸른 옥처럼 흐르는데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 매어두었네.

당신을 만나려고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키는 바람에 반나절을 부끄러웠네.

 

매월당 기념관 표석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이다,

학자이면서 문인이며,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매월당 김시습기념관

 

 강릉은 김시습의 관향(貫鄕)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며, 유랑시절의 거점이었다.

  강릉시에서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빛나는 문학과 얼을 계승하고자

경포호와 가까운 선교장옆에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을 건립개관(2008.6.15)했다. 

  기념관의 규모는 부지 면적 3,117㎡, 건축 면적 358㎡의 1층 전통 한옥 건물 1개 동이다.

전시관은 전시실 1칸, 애니메이션방 1칸, 포토존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 내부의 김시습 상

 

전시관앞 시 석비

 

바랑 하나에 생애를 걸고 인연 따라 세상을 살아가오.

삿갓은 오직 하늘의 눈으로 무겁고 신발은 초국 땅의 꽃으로 향기롭소.

이 산 어디에나 절이 있을 터이니 어디인들 내 집이 아니겠느냐.

다른 해에 선실을 찾을 때에 어찌 길이 멀고 험하다고 탓하겠느냐. 

~  매월당(梅月堂)  ~

 

김시습기념관과 선교장 사이의 분홍 벗꽃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인 선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