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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昌寧曺門의 뿌리

창녕조씨 5대 대동보 족보서(昌寧曺氏 族譜序)

by 안천 조각환 2024. 1. 19.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에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있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 20)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게된다.

 

창녕조씨(昌寧曺氏)도 이전에 가문별로 가승보는 있었으나

대동보가 간행된것은 1606년(선조 39)에 조탁(曺倬)이 친필로 간행했다는

병오보(丙午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족보를 접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 서문(序文)을 통하여 선대들이

우리 조문의 통합을 위하여 애쓰신 흔적을 되짚어보며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시조 탄생설화의 화왕산과 용지

 

창녕조씨(昌寧曺氏)의 각 가문에 전래되던 보첩(譜牒)은

판관(判官),매계(梅溪),남명(南冥),참판(參判),회곡(晦谷), 군위보(軍威譜)

제보(諸譜)가 있었으나  선계(先系, 대수)의 늘고 줄은 것이 같지 않고

전해지지 않는 보첩도 있어 이를 모두 종합하고 의논하여 대동보를 만들었다. 

 

창녕조씨(昌寧曺氏) 5대 대동보 서문 순서

1.구족보서~병오보(舊族譜~丙午譜) ~ 1606년(선조,宣祖 39)

2.계유보서(癸酉譜序) ~ 1693년(숙종,肅宗 19) 

3.정해보서(丁亥譜序) ~ 1767년(영조,英祖 43) 

4.갑술보서(甲戌譜序) ~ 1874년(고종,高宗 11) 

5.신해보서(辛亥譜序) ~ 1911년(일제강점기) 

 

화왕산 용지

 

1.창녕조씨 구족보서(昌寧曺氏 舊族譜序) ~ 1606년(선조,宣祖 39) 서문

창녕조씨 구족보서(昌寧曺氏 舊族譜序)

 

우리 조씨가 신라 진평왕 때부터 시작, 고려를 거쳐 본조에까지 일천여년 전수해 오는 동안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 배출된 학문, 도덕, 영웅, 호걸, 공복, 경상 등을 어찌 다 헤일 수 있으랴?

자세한 사적은 보첩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새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에는 가끔 중국에 들어가 벼슬하여 장상의 지위에 이른 이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연대임은 알 수 없으니 이는 일약 교목(喬木)으로 분천(分遷,사람의 큰 출세를 꾀꼬리가

어렸을 적에는 유곡에 있다가 성장해서는 높은 나무로 옮겨 가는 것에 비유한 말)된 때문이다.

지금 본조에는 그 지위가 높기도, 낮기도 하고 또는 궁하기도 달하기도 한 이가 거의 다

우리 조씨의 외손이건만 본 손만은 이처럼 침체되어 있으니, 이 어찌 물건이 성하면

반드시 쇠하고 수가 극하면 반드시 끊기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미처 이치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높고 두터운 하늘과 땅에도 그 한계가 있는 것으로써 미루어 본다면 한번 극하면

반드시 끊기는 이치를 짐작할 수 있다. 경(京)외의 여러 종족의 집에 소장되었던 보첩이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병란에 모두 소각되어 버렸으니, 이다음의 자손들이 일천이년

이전의 조상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피차 멀고 가까운 파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파계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가까 왔던 종족도 결국 남남과 같이 되어버릴 것이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이는 아마 하늘이 우리 조씨의 전수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가문이 한창 번창 하였다 하여 그 문헌까지 아울러 없애어

한번 극하면 반드시 끊기는 이치에 상응시킨 것이다.

               

그러나 음이 다하면 양이 생기고 한 궤도를 다 돌고 나면 도로 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수의 원칙이거니, 어찌 이미 끊긴 뒤에 다시 회복되지 않는 이치가 있겠는가?

임인 년간에 교리(校理) 탁(倬)이 본도의 도사(都事)로 부임해 와서 우리의 세계(世系)를

수집하는데 온 심성을 다하여 안면(顔面)의 지부지(知不知)와 사람의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만나는 대로 그 파계를 묻고 또 평소에 알고 있던 안밖의 친족들을 탐방하여

약간의 사적을 수록, 겨우 일책을 만들었으니, 이전의 보첩에 비교하면 그 분량이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다음에 자손들이 보첩이란 보편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면 이를 표본으로 다시 탐방하고 수집하여 더욱 자세하게 될 터이니,

보첩을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만 완성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럼 교리의 마음은 참으로 근실하고 또 훌륭하다 하겠다.

이 어찌 거의 끊기려던 우리 조씨가 다시 만회될 기회가 아니겠는가?

또한 세속에서는 의례 외족을 가벼이 여기어 일,이 대(代)도 지나지 않아서 마치

남남처럼 간주해 버린다. 아무리 인인(仁人), 군자(君子)라 해도 간혹 세속의

이 같은 누습(陋習,더러운 습관)에 젖어 외족에 대해 몇째의  항렬(行列)이 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욱 우리나라는 좁고 작은 때문에 저 중국사람 들처럼 한번 혼인하고 나면

그 사이가 천만리로 멀어서 영원히 왕래가 없어 버리는 예와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구족보서 말미

 

그러므로 이번에 내가 졸렬한 솜씨를 불구하고 고조의 외족에서부터 나의 외족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사적을 수록 따로 일책을 만들어 권말에 붙여서

사장(私藏)으로 삼았다. 그러나 문견이 워낙 고루한 때문에 수록이 너무 적고

또 착오가 많아서 진정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다음에 이를 보는 이가

나무라거나 비웃지 말고 더욱더 자세히 보완해 가감으로써 이를 소홀히

간주하거나 망각해버리지 않게 된다면 큰 다행으로 여긴다.

그럼 이것이 과연 선도자의 부봉(한대,漢代에 천자에게 올릴 때 정.부 2봉을

작성하여 부봉을 먼저 당서에게 접수시키면 당서가 그 내용을 심사해서

올리던 일을 인용함)이 될는지 옛사람의 말에 인륜을 돈독히 하는 데는

세계(世系)를 밝히는 일만한 것이 없다하였으니 보첩을 만드는 일은

종족과 화목 하는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없지 않을 것이다. 

   병오(丙午)년 정월에 이손(耳孫) 아무가 기록하다.

   (구보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조탁(曺倬,1552,명종7~1621,광해군1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치재(恥齋). 아버지는

몽정(夢禎)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면서 당시 피폐하고 문란한 사회상에

대해 만여언(萬餘言)에 달하는 시무10책(時務十策)을 올렸다.

1599년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이후 예조·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지냈다.

1603년 강원도암행어사에 이어 시독관(侍讀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장령·교리·동부승지·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10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집에서 간직하고 있던 "국조보감"을 바쳐

임금으로부터 표피(豹皮)를 하사받았다. 이후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한성부 좌·우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원종공신 1등이 되고,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임인(壬寅)년 : 1602년(선조35년),  병오(丙午)년 : 1606년(선조39년)

 *임인, 병오 양 년도를 표시한것은 임인년에 시작하여 병오년에

                                                                  간행을 완료했을것으로 보인다.                                                                                         

    창녕조씨 득성지지 표석(화왕산)

 

2.계유보서(癸酉譜序) ~1693년(숙종,肅宗 19) 

 계유보(癸酉譜, 1693년 간행) 서문

 

상고시대에 성인이 생겨나는 인류에 따라 성(姓)을 주었는데, 주나라 때에 세목(世本)이

있었고 한사(漢史)에 연표가 보인 뒤로부터 보첩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가 맨 동쪽에 위치한데다가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의 유풍이 멀어지고

문헌을 증거 할 수 없는 때문에 신라와 고려이래로 씨족마다 보첩이 없지 않으나

모든 가문의 보계를 관찰해보면 대개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류의 기수(氣數)가 일정하지 않아 세대의 전수에 길고 짧은 차이가 있고 파계의 분류에 

넓고 좁은 범위가 있으므로 번창하고도 영원한 가문이 적으니 이것이 첫째 어려움이요,

아무리 공향의 자손이었더라도 몇 세대를 지나고 나면 거의 비천한 신분이 되곤 하므로

대대로 관록을 유지하여 명성을 보존한 십에서 일.이밖에 되지 않으니

이것이 둘째 어려움이요, 묘당(廟堂)에 진출하여 신분이 높이 된 가문이야 세도의

영화라고는 할 수 있으나 의로운 영화는 아니다. 반드시 도덕으로써 정착하고

문장으로써 드러내고 절의로써 수립해 놓아야만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존숭(尊崇)하여

의젓이 명가 세족이 되므로 세상에서 이 같은 가문은 더욱 드물고 또 없으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다. 그런데 지금 조씨(曺氏)의 보첩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조씨가 맨 처음 창산(창녕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하여 득성(得姓)된 이후 지금까지

수십대(數十代)가 지나고 천여년이 흐르는 동안에 자손이 한없이 계승되고

도덕(道德), 문장(文章), 명절(名節)로 일컬어진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니,

                                       방금 말한 세 가지 어려움이 무난(無難)으로 한 성씨에서 집결한 것이다.                                                       

아! 이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이는 아마 그 조상이 쌓아놓은 밑거름이 후손을 도와주고 북돋아 준 것이겠지만

지금 이를 계승하고 발휘한 후손의 아름다움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보첩에서 다시 두 가지의 선을 발견하였다. 즉 조상의 사적을 자세히

전술한데서 그 효도를 보았고 종족의 파계를 근실히 수집한데서 그 화목을 보았다.

럼 이미 효도하고 또 화목하였으니 이 어찌 의로운 영화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아! 세 가지 어려움이 무난히 집결되고 두 가지 선이 겸비된데 대해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본보에 있어 수집 정리한 이는 학생(學生) 면주(冕周)와

진사(進士) 건우(建遇) 형제이고 인쇄 발행한 이는 절도사(節度使) 정량(廷亮)이다.

이어 나더러 외손이라 하여 서(序)를 맡기므로 사양할 수 없었다.

 계유년(癸酉年,1693 숙종19) 이월 팔일에

가선대부 전이조참판 최석정(嘉善大夫 前吏曹參判 崔錫鼎)이 삼가 서(序)하다

      

 계유보(癸酉譜)

 

※최석정(崔錫鼎,1646,인조 24 ~ 1715,숙종 41)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화(汝和), 호는 명곡(明谷)·존와(存窩).

할아버지는 영의정 명길(鳴吉)이며, 아버지는 한성좌윤 후량(後亮)이다.

후상(後尙)에게 입양되었다.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설서·

봉교·교리 등을 역임했다. 1685년(숙종 11) 부제학으로 있을 때 당시 소론의

영수이던 윤증(尹拯)을 옹호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논척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그뒤 이조참판·한성부판윤·이조판서를 지내고,

1697년 우의정이 되어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9년 좌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하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을 편찬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증보하도록 했다. 170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왕세자의 보호를

위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처형에 반대하다가 진천에 부처(付處)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이후 노론·소론의

격렬한 당쟁 속에서 소론을 영도하며 모두 8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음운학(音韻學)에도 정통하여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

등을 찬집했다. 저서로 "명곡집" 36권이 있으며, 편서로는 좌씨집선(左氏輯選)

(운회전요)韻會箋要, 전록통고(典錄通考) 등이 있다.

글씨로 영상유상운갈(領相柳尙運碣)등이 전한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진천 지산서원(芝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숭정기원후 무진이 지일 상한 후손 생원 건 식

(崇禎紀元後 戊辰二 之日 上澣 後孫 生員 建 識) 

*무진이(戊辰二)는 숭정기원 후 2번째 무진년인 1748년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무진 다음에 월(月)이 빠진것으로 보고 1688년 2월로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다.

 

우리 집안에서 보첩을 소장하기는 선조 매계선생이 편찬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의 판본은 임진, 정유의 병란에 소각되었으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바는 바로 그때의

구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어 경(京)외의 모든 종족중에 온 보첩을 소장하고 있는 이도

6-7호에 이른다. 이는 본시 만력(명신종의 연호)연간에 참판공 휘 탁(諱 倬)이 다시 수록한

것인데  우리 집에 소장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는 조금 있으나

시조 대락승(始祖 大樂丞)이하의 계파가 서로 틀리지 않으니 이는 믿을 만한 보첩이다.

전날에 나의 선군(先君)이 여기에 뜻을 두어 이를 편찬하고 간행하는데 내외의

모든 책본을 모아 참고하고 정리하였으나 각파의 자손 중에 먼 지방에 산재해있는

다 수록하지 못한 채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불초는 행여 선군의 뜻을 무너뜨릴세라

뒤를 이어 간행을 노력 하였으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해 오다가

정유년(1687년) 여름에 동종인 정주(殿周)씨가 청도군수로 부임해 왔기에 내가 직접

찾아뵈고 보첩을 간행할 일부터 언급하였더니 “좋다, 이는 바로 나의 뜻이다.

내가 아무리 박봉으로 지내는 형편이지만 어찌 나의 용도라도 절감하여 이 일에

나서지 않으랴. 다만 나는 송사처리에 분망하여 이를 정리할 겨를이 없으니

구보를 참고하여 오류를 정리하는 한편, 증수하고 정서(正書)하는 일은

그대가 맡아 주어야겠다.” 고 하였다.

 

이에 감히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종형 면주(冕周)씨와 함께 맨 먼저

구보를 참고하여 파계에 따라 증수하고 이어서 팔로에 사는 종인들에게 통고,

제각기 세계(世系)를 만들어 보내도록 하여 합보를 계획하되 그중에 사실이

착오되었거나 서차(序次)가 상실된 것은 일체 구보에 의거하여 정리하고 구보에

기재되지 않아 대수(代數)가 연관되지 않은 것은 별질(別帙)에 붙여 수록하며,

드러낼 만한 사적이 있는 이는 국사를 참고하고 과거에 오른 이는

국조방목(國朝榜目)을 참고하여 본인의 이름아래 아울러 기입하고

또 여러 종족의 세보도 널리 참고하여 본보에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반드시 수록하여

십개월만에 비로소 본보가 완성되니 모두 6책이다. 아! 우리 조씨가   

태사공에서 시작되었으니 바로 신라 진평왕 시대이다.

그 사이 보계가 전해지지 못한 것은 그 당시의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다.

시조 대락승(大樂丞)은 고려태조의 여서이고 그의 8대는 대대로 평장사가 배출되어

문벌의 번창함이 우리만한 집안이 없었다. 이로부터 명덕(名德)들이 서로 이어

대대로 위인이 되었다가 지금에 와서 침체하고 말았다.

지금 몰락된 채 먼 지방에 살고 있는 이들이야 그 수효가 매우 많지만

서울에서 선대의 업적을 고수하고 있는 이는 마치 새벽녘의 별처럼 희소하여

현귀한 지위도 묘당(廟堂)에 진출한 예가 거의 없는 형편이니 우리 집안이

너무 쇠퇴한 셈이다. 우리가 득성한지 이미 천여년이 되었고 보첩의 전수 또한

수백년이 흘렀으니, 구보를 근거로 하여 증수하고 정리하는데 유의한 이가

어찌 없었겠으며, 요직이나 지방관으로 보첩을 간행할만한 역량을 가진 이

또한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주(殿周)씨를 기다려서

종중의 뜸했던 사업이 비로소 이루어졌으니, 이는 참으로 백여년 이래에 없었던

바로 종중의 광영이요 선열을 이었다 하겠다. 나 같은 사람이야 그저 여러 종족의

구전보첩(舊傳譜牒)을 참고하고 선군의 근실한 성력을 추모, 동지들의 협조로

전례에 따라 증수 정서하였고 모든 경영 또한 종족들의 호응을 힘입었을 뿐이니

어찌 감히 선군의 유지를 원만히 이루었다 고야 하겠는가?

자세하지 못한 참고나 오류된 정리에 대하여는 내가 감히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세밀한 것까지 다 수록하여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면

아무리 십년간의 공력을 드린다 하더라도 아마 쉽지 않을 것이고

또 인사의 변천이 다단한 것에만 구애되다가는 끝내 세월만 지연시킬 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소루함을 불구하고 보사를 서둘러 준공한바

이 보첩을 보는 이가 나를 우활(迂濶)하다 여기지 말고 여기에 더욱더 뜻을 두어

다시 중수하고 널리 수록하여 믿을 만한 구전의 보첩을 이어나가는 것이

이다음 우리 종족의 현명한 이에게 기대해 마지않는 바이다.

 숭정기원(崇禎紀元) 후 무진(戊辰,1688년) 이월 상순에

후손인 생원 건(生員 建)이 기록하다.

 

※계유보(癸酉譜)는 1693(癸酉)년에 간행하였고 위의 글은

1688(무진,戊辰)년 이월에 생원 건(生員 建)이 기록한 것으로 

5년간의 격차가 있으나  이는 보첩 증수 정리를 완성한 후

보첩이 간행되기까지 인쇄를 위한 준비 등에 걸린 기간으로 보인다.

 

시조 조계룡(曺繼龍) 묘소

 

3.정해보서(丁亥譜序) ~ 1767년(영조,英祖 43) 

 정해보서(丁亥譜序)

 

 아! 명덕(名德)에 대한 찬양과 돈휼(敦恤)에  대한 의의는 이전에 자세히 언급하였으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마는, 나는 이번 보첩에 대해 슬프고 목이 메인다.

이번 보첩은 지난 갑자년에 선인(先人)이 재종형인 참판 명교(參判 命敎)와 함께

편집을 의결하고 나의 중씨와 종중에서 학식이 넓은 임(霖)에게 명하여

그 보사(譜事)를 맡기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린 나이로 이를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보사(譜事)가 끝나기 전에 선인(先人)이 이 불초(不肖)를 버리셨고,

참판공(參判公)과 중씨(仲氏) 또한 이미 별세하였는가 하면 종중의 여러분도

마치 새벽녘의 별처럼 희소해졌는데 나 혼자만 세상에 살아있으며

임(霖)도 늙은 나이로 고궁(孤窮)하고 또 멀지 않아 죽게 되었다.

내가 흐느끼면서 임(霖)에게 “보첩을 편수하는 것은 곧 선인의 뜻이요,

선인의 뜻은 곧 선조의 마음이다. 만약 선조를 잊지 않으려면 선인의 뜻을

계승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선인의 듯을 계승하는 일은 이 보첩을 편수해야

하는데, 이 보첩은 차마 편수 할 수도 없고 또 감히 편수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슬퍼하고 목메어 하는 바이니 자네가 나를 위하여

선인의 못다 한 일을 마쳐주기 바란다.” 고 하였더니, 임(霖)이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임(霖)이 그 일을 맡고 윤적(允迪)과 뜻을 모아서 함께 주시(周施)하였으며,

공사를 감독한 이는 참판공의 손자 회진(晦振)이었다.

보첩이 완성되자 흐느끼며 이상과 같이 쓰는 바이다. 

   정해 윤이월 상순(丁亥 閏二月 上旬)에 후손 명억(命億)이 삼가 기록(記錄)한다.

 

○ 우리 가문에는 선조 매계선생으로 부터 비로소 보첩이 있었고 나의 종조(從祖)인

참봉공(參奉公) 휘 건(諱 建)이 여러 집안의 소장을 수집해 놓은 것을 절도공(節度公)

정양(廷亮)이 해서 안무(海西 按撫)로 있다가 숙종 계유(肅宗 癸酉)에 간행하였는데,

이전의 보법(譜法)이 항상 소략(疎略)하고 이후의 자손들이 많이 번창하였으므로

보첩을 중간하자는 의논이 발기된 것이다. 이에 금년 갑자(甲子)에

참판공(參議公) 하망(夏望)과 참판공(參判公) 명교(命敎)가 팔로(八路)의

여러 종족에게 알려 간행을 의결하는 한편 나더러 하는 일이 없이 한가로운 데다가

이전의 보사가 모두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하여 나에게 편집을 위촉하기에,

내가 학식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대개 선계가 동일하지 않은 2본(二本)의 보첩이 아울러 전해오고 있으나 

고려조의 연력과 충간공(忠簡公)의 비지(碑誌)에서 상고할 만한 근거를

얻었으므로 무진(戊辰)년에 족형(族兄) 운(澐)과 함께 초안을 작성하고

갑술(甲戌)년에 참판공의 아들 윤명(允明)과 함께 초안을 고쳐 완성하였는데

이분들이 서로 이어 사망하고, 공사가 중단 된지 이미 오래였다가

이제야 다시 손질을 가한바 명억(命億)과 윤적(允迪)이 이 공사에 앞장서고

회진(晦振)이 선지(先志) 계승을 추구하기 위하여 조력을 모아 수십년이 흐른

오늘에 비로소 간행을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아! 세상에서 보계를 말하는 이들이 으레 정자(程子의) “보첩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관즙(管楫)하기 위함이다.”는 말과 소순(蘇洵)의 “보첩을 보면

효제의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는 말을 인용하곤 하는데,

나 역시 이 두 가지에 항상 경외(敬畏)하는 바이지만

우리 조씨가 대대로 유학을 준수하여 도덕 경륜(道德 經綸)과 절의 문행(節義 文行)을

환히 계승하여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리선조의 쌓아놓은 덕이

우리 후인을 계우(啓佑)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혹 후손으로써 계승하는 도를

다하지 못하여 유종의 미가 없게 된다면 시경(詩經)에 “너의 조상을 생각지 않느냐.

제발 그 덕을 닦으라.” 는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항상 이를 경외(敬畏)하며 자경(自警)하는 한편, 여러 종족도 이를 힘쓰기 바란다.

    정해(丁亥, 1767년) 7월 하한(七月 下澣)에 후손 임(後孫 霖)이 삼가 발(跋)하다.

   

종덕재(種德齋) 전경

 

 

4.갑술보서(甲戌譜序) ~ 1874년(고종,高宗 11년) 

갑술보서(甲戌譜序) 

 

 보첩이 생긴 지 이미 오래인데, 오래되면 변천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 규례(規例)도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이를 분류하면 파보(派譜)가 되고

통합하면 전보(全譜)로써 가장 좋게 여겨 세상에 많이 유행되고 있는데,

우리 가문의 보첩도 전보를 취택하는 바이다. 대개 우리가 득성한 이후

일천 삼백여년이나 오래됨으로써 흐름이 길고 뿌리가 깊어 가지가 무성하여

지금까지 수만의 자손이 팔로에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나중에는 본래의 뿌리를 생각지 않고 서로 남 보듯 할 터이니 보첩이 아니면

어떻게 조상을 높히고 종족을 단합하겠는가? 또한 생존자는 점차 사라져가고

출생자는 앞으로 그지  없을 터이니, 보첩이 아니면 어떻게 조상을 계승하고

후손을 계우(啓佑)하겠는가? 우리 가문의 보첩이 매계 문장공으로 부터 시작되어

이를 “매계보”라 하였고 그뒤 계유보, 또는 정해보가 있어 상하가 서로 계승하고

본말(本末)이 모두 열거되어 보첩이 비로소 크게 갖춰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월이 일갑(一甲)에 사기(四紀)를 지나고 보니,

그 사이에 출생한 자손이 천백뿐이 아니고, 또 다시 계통이 없이 각처에 산재하여

계유와 정해 이전 보첩이 없을 때와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종족이 서로 우탄(憂歎)하여 보첩간행을 칭론(倡論)한바,

모두의 호응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빨랐다.

다만 사휴(事休)가 매우 중대하고 공사가 워낙 거대하여 4개년(四個年)이 지나서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아무리 정해보(丁亥譜)를 표본으로 삼았으나

조금씩의 차이가 없을 수 없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대저 고려시대부터 5파(五派)로 분류되었다가 아조(我朝)에 이르러

다시 30파(三十派)로 분류된바 각파에는 각기 중조(中祖)가 있고

그 자손이 그 밑에 열거되어 정연한 서열이 마치 손바닥을 보듯 환하다.

그러므로 이번 보첩에서 현재 많이 유행되고 있는 규례를 취택하였지만

그 정확한 사적과 근거만은 별보에 열거 하였는데 혹 본종에 이어지기도 하고

혹 편말에 편입된 예는 창평,흥덕,보성,금화,홍원(昌平, 興德, 寶城, 金化, 洪源) 등

제파이고 정해보(丁亥譜) 범례에 말한데로 그 다음 기회에 편입을 허여한다.”는

의논에 따른 예는 시중공(侍中公)과 정향(廷香) 등 8파(八派)이고

정해보(丁亥譜) 이후에 비로소 정확한 사적을 입수하고 나서

그 보계(譜系)를 개정한 예는 화순파(和順派)이고 수백년동안 동보(同譜)의

친의(親誼)를  가져 오다가 갑자기 횡의(사리에 어긋난 의론)가 발생하여

단자를 보내지 않으므로 부득이 일체 정해보(丁亥譜)에 의거하여

다시 그 자손이 수복되지 못한 예는 덕산파(德山派)이다. 이상이 그 대략이다.

자세한 것은 범례에 언급되었다. 아! 전날 내가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순찰차 경주에 이르러 초제의 태사공 묘에 영소(榮掃 : 영귀하게 된 뒤

조상의 무덤에 참배하는 것)하고 뒷줄을 돌아보니 수백명의 자손들 가운데

황관(黃冠),백납(白衲,야인의 의관)의 차림까지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도 모르게 돈목(敦睦)하려는 마음이 유연히 발로된 것을,

다같이 이 묘의 자손인데다가 이 묘정에 참여해 있는 때문이었다.

지금 보첩을 편수하는 오늘에 파(派)마다 열서(列書)된 수많은 자손들이

다같이 한 조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니, 또다시 발로되는 유연한 마음이

묘정(墓庭)에서 만났을 때와 같다. 진정 우리 종족이 이 보첩을 보고 이 같은 마음을

둔다면  종친이 서로 돈휼(敦恤)하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서문(序文)은 무인(戊寅)년에 나의 선형(先兄) 찬성공(贊成公)이 지은 것인데

이해 겨울에 선형(先兄)이 별세하였고 이년째 되는 경진(庚辰)에

보첩(譜牒)이 비로소 완전을 보게 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아우 석여(錫輿)가 눈물을 씻으며 삼가 쓰다.

 

※조석여(曺錫輿,1813~?)는 1848년(헌종 14)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경상도암행어사를 거쳐 1866년(고종 3)에 황해도관찰사,

1883년에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종덕재

 

○ 보법(譜法)이 있은 지 이미 오래이다.

맨 처음 주대(周代)로부터 소사(少師), 족사(族師)의 관직을 두어

소목《(昭穆),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차례. 즉 일세(一世)인 시조를

가운데 모신다음 이,사,육세(二, 四, 六世)를 왼쪽 소(昭)에, 삼,오,칠세(三, 五, 七世)를

오른쪽 목(穆)에 모시는 것》을 분별하고 계령(戒令)을 단속하는 일을 맡겼으며

춘추시대에 와서는 진나라에 악(樂), 극(郤)과 제(齊)나라에 고,국(高, 國)과

초(楚)나라에 소,굴(昭, 屈)등이 씨족을 소중히 여겼는가 하면

각기 도보국(圖譜局)을 둔 다음, 고금을 널리 통한 인사에게 일을 맡겼으므로

사람은 보첩이 다르지 않고, 보첩은 규례가 다르지 않았으며,

오대(五代) 시대에 와서는 이 법이 모두 폐지되었다가 송나라가 건국한 뒤에

여러 선비들이 이어 배출하여 각기 자기네 의견대로 보첩을 만든바,

구양수(歐陽修)는 한대(漢代)의 년표를, 소순(蘇洵)은 예기(禮記)의

대소종(大小宗)을 본받았고, 주자실기(朱子實記)에는 일행마다 오세(五世)까지만을

기재하였으니, 대저 오세가 되면 동고조(同高祖) 시마(緦麻,삼개월 복)로

복(服)이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 동국(東國)에 와서는 고려시대에

식목도감(式目都監)을 두어 세족(世族)의 원파(源派)를 장기(掌記)하게 하였고,

아조(我朝)의 보법(譜法)은 송대 사람들처럼 제각기 기재하여 그 문파(門派)가

서로 다른데, 홍유(鴻儒), 석사(碩士)들이 저마다 새로운 의견을 창하여

그 의례를 수절(修節) 함으로써 빈빈(彬彬)한 문,질(文. 質)이 이루 볼만하다.

우리 가문의 보첩도 주자(朱子)의 오세법(五世法)을 의방(依倣)한바,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시대로부터 종인(宗人), 하윤(夏尹), 진영(震英), 명기(命基),

그리고 장호공(莊胡公) 윤손(潤孫)과 경승(景承)에게 각기 사보(私譜)가 있는데,

이를 구보(舊譜)라 이르고 판관(判官) 중의(仲義)에게 세조(世祖)시대 사람으로

가보(家譜)가 있는데 이를 판관보라 이르고, 남명공(南冥公) 휘 식(諱 植)에게

명종(明宗)시대 사람으로 보첩이 있는데 이를 남명보(南冥譜)라 이르고,

매계공(梅溪公) 휘 위(諱 偉)에게 연산군시대 사람으로 보첩이 있는데

이를 매계보(梅溪譜)라 이르고, 참판(參判) 휘 탁(諱 倬)에게 선조(宣祖)시대 사람으로

보첩이 있는데 이를 참판보(參判譜)라 이르고, 참판의 손자인 군위현감(軍威縣監)

휘 실구(諱 實久)에게 보첩이 있는데 이를 군위보(軍威譜)라 이르고,

인조시대(仁祖時代)에 회곡공(晦谷公)에게 보첩이 있는데 이를 회곡보(晦谷譜)라 이르고,

숙종(肅宗) 정유(丁酉,1687)에 담양공(潭陽公)이 청도군수로 나가서 족인(族人)인

상사군(上舍君) 건(建)과 면주(冕周)로 하여금 제본(諸本)을 모아 간행하였는데

이를 계유보(癸酉譜)라 이르며, 영조(英祖) 갑자(甲子,1744)에 서주공(西州公)과

담운공(澹雲公)이 편집을 의결, 명백(命百)씨와 자의(諮議), 임(霖)씨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겼고 이분들이 게속해서 별세한 뒤에는 자의(諮議)만이 생존하여

명억(命億)씨, 윤적(允迪)씨, 회진(晦振)씨와 함께 일을 감독한바 24년째되는

정해(丁亥)에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이를 정해보(丁亥譜)라 한다.

전보(前後)의 보첩이 모두 9본(九本)으로 혹은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르기도 하며

혹은 늘기도 하며 혹은 줄기도 하여 의심이 많은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병렬한다.

즉 구보(舊譜)에 태사공(太事公)이하 오대(五代)가 탈락되었다” 하였다.

그럼 데락승공(大樂丞公)이 당연히 태사공(太事公)의 6대손(六代孫)이 되어야 하는데

남명보(南冥譜)에 응신(應神)이하 4대(四代)만 기재되어 있으니,

대락승공(大樂丞公)이 태사공의 5대손(五代孫)이 되고 다른 곳에는

휘 험(諱 欽) 자(字)는 바로 휘 겸(諱 謙) 자(字)이다. 하였으니

대락공(大樂公)이 태사공(太事公)의 4대손(四代孫)이 되는 셈이다.

이것이 첫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태사공이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여서(女婿)이고,

대락승공이 고려태조의 여서(女婿)라 한다면 진평왕으로부터 태조까지

삼백사십년이 되므로 그 대수를 계산해 보아서 혹은 4대나 5대,6대가 될 터인데

지금 너무 줄어서 기재되어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신라의 관제(官制)에 애당초 태사(太事)라는 관명이 없고

고려 태조의 아홉 공주중에 덕궁(德宮)과 덕공(德恭) 두 공주의 호칭이 없으며

덕궁(德宮)은 혹 덕흥(德興)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세 번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남명보(南冥譜)에 태사공(太事公)에게 5남 2녀(五男二女)가 있었다.” 하였는데

다른 보첩에는 기재되지 않았고, 또 그 선대(先代)의 갈문(碣文)에

9대 평장사(九代 平章事)가 배출되었다 하였는데 수월봉(水月峯)에서

묘를 찾았을 때 발견된 단비(短碑)에 밀직사사(密直寺使)로 쓰여졌고,

평장사로 쓰여져 있지 않았으니 이것이 네 번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매계보에 대락승공(大樂丞公)으로 부터 휘 자기(諱 自奇)까지 10세(十世)로

기록되었고, 충간공(忠簡公) 석문(錫文)의 갈명(碣銘)은 곧 매계의 소작(所作)으로

그 세계(世系)가 기재되었는데, 휘 자기(諱 自寄)는 대락승공 손자라 하였으니

보첩(譜牒)과 갈명(碣銘)이 어찌 이처럼 상반된단 말인가?

대락승공(大樂丞公)은 곧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이고 휘 자기(諱 自寄)의

사적은 고려 현종7년(顯宗七年) 병진(丙辰,1016)에 비로소 보였다.

그럼 태조원년 무인(太祖元年 戊寅,918)부터  현종 병진(顯宗 丙辰)까지

99년이 되므로 그 사이에 10대(十代)가 된다는 설(說)은 너무 걸맞지 않고,

3대(三代)가 된다는 설이 혹 그럴듯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휘 자기(諱 自奇)는 현종7년(顯宗七年) 병진(丙辰)에 휘 익청(諱 益淸)은

공민왕(恭民王) 2년 계사(癸巳,1353)년에 보였다.

그럼 338년이 되는데 매계보(梅溪譜)에는 휘 자기(諱 自奇)로부터

휘 익청(諱 益淸)까지 10세(十世)로 되었고 참판보(參判譜)와 회곡보(晦谷譜)에는

7세(七世)로 되어있으니 338년사이에 10세(十世)가 된다는 설(說)은

그럴듯하지만 7세(七世)가 된다는 설(說)은 너무 줄었다.

대저 10세설(十世說)은 충간공(忠簡公)의 비지(碑誌), 또는 상주 종인(尙州 宗人)

석태(錫泰)의 청장층(靑粧層)에 기록되었다. 이는 다 연대가 오래되어 믿음직한

사적이므로 서주공(西州公)과 담운공(澹雲公)이 이대로 팔로(八路)에 발문(發文)하고

정해(丁亥)보에 입간(入刊)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상주 종인(尙州 宗人)으로부터

이동설(異同說)이 다시 야기되어 끝내 간행(刊行)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여섯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고려태조 무인(戊寅)으로부터

이태조(李太祖) 임신(壬申,1392)까지 477년이 되는데 우리 가문은

대락승공(大樂丞公)으로부터 양평공(襄平公)까지 17세(十七世)가 되고

또 임신(壬申,1392)으로부터 지금 을해(乙亥,1875)까지 491년이 되는데

우리 가문은 병마사공(兵馬使公)으로부터 승자항렬(承字行列)까지

17세(十七세)가 된다. 그럼 연대나 세계(世系)가 그다지 상좌(相左)되지 않는데,

지금 99년 3대설(三代說)과 비교해보면 의심이 없지않다.

혹 휘 연우(諱 延祐) 이하로부터 휘 의문(諱 義文) 7대(七代)까지가

휘 자기(諱 自奇) 이하에 있어야 옳을런지 모르겠다.

이것이 일곱째 의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지고 문헌(文獻)이 없으니

어디서 고증할 수 있겠는가? 대저 우리가문의 보첩(譜牒) 9본(九本)중에

구보(舊譜)는 말할수 없지만 판관,남명,매계,참판,회곡,제보(判官, 南冥, 梅溪,

參判, 晦谷, 諸譜)는 선계의 늘고 줄은 것이 같지 않고,

군위보(軍威譜)는 전해지지 않으니 계유보(癸酉譜)와 정해보(丁亥譜)만이

이전의 것보다 자세한 편이나, 계유보(癸酉譜)는 서차(序次)가 문란하고

편집이 너무 소루(疎漏)하여 정해보처럼 해비(該備)하지 못하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세대가 흐를수록 보법(譜法)이 더욱 다 갖춰졌으니,

후세의 보첩이 또 지금의 것보다 훨씬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아! 슬프다. 전날 나의 선형 찬성공(先兄 贊成公)이 계보(系譜)의 추폐(墜廢)를

염려하고 조상의 증수(增修)해오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갑술년(甲戌年)에

개연(慨然)히 팔로(八路) 종중(宗中)과 모의하고 간행을 착수한지 5년만에

거의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선형(先兄)이 갑자기 별세하였으니

보사(譜事)의 완성이 어려움과 인사의 변천이 많음이 이와같다.

나역시 나이가 늙었으니 만약 지금에 이를 계술(繼述)하지 않다가

갑자기 죽고 만다면 이는 선형을 저버리고 조종(祖宗)을 망각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제종(諸宗)들과 상의를 거쳐 계술(繼述)하고 발휘(發揮)하여

이제야 비로소 완성되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선형이 이를 볼수 없으니,

마음 아픈 일이다. 정해보(丁亥譜)는 24년만에 완성되었고, 이번에는

겨우 6년만에 완성되었으니 정해보(丁亥譜)에 비하면 매우 빨랐다 하겠다.

그러나 소루(疎漏) 또는 오류(誤謬)된 부분이 있을 것이니 우리 종중의 후생(后生)들이

널리 상고하고 자세히 정정(訂正)하여 수백세(數百世)의 신보(信譜)로 만들기 바란다.

   경진(庚辰,1880년, 고종17) 삼원 상순(三月 上旬)에 석여(錫輿)가 삼가 기록하다.

 

창녕 일원각

 

5.신해보서(辛亥譜序) ~ 1911년(일제강점기) 

신해보서(辛亥譜序)

 

옛 사람이 보첩을 만드는 것은 먼저 세계(世系)를 통괄하고 다음 씨족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다. 즉 나의 소자출(所自出,유래한 근본)인 부, 조, 증조에서

위의 수십대에 이르도록 마치 그물에 큰 줄과 작은 줄이 있고, 나무에는 가지가,

물에는 지류가 있듯 하여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환하게 하자는 것이니, 어찌 선대의

계보를 밝히고 자손의 소자출(所自出)을 분별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아! 계유보(癸酉譜)와 정해보(丁亥譜)를 이어 갑술보(甲戌譜)까지 사십년이 흘러

인사(人事)가 달라지고 계통이 멀어졌으니 이대로 멀어지다가 잊어버릴 경우까지

이르게 된다면, 조상을 추모하고 종족사이에 돈목하는 친의를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때문에 내가 밤낮으로 이점을 경외(敬畏), 조상을 계승하고 후손을 열어 주는 일에

늘 뜻을 기울여 온 바이다. 이에 연풍령(延豊令) 두환(斗煥)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쳐

매진을 다짐하고 족질(族姪) 두승(斗承)으로 하여금 각처 종족에게 두루 통보한바,

그 호응이 마치 북이 북채를 따라 울리듯이 너도 나도 차단(扠單)을 모아 협조하는데

행여 모자람이 있을까 걱정하니, 호제(孝悌)스런 마음이 절로 발로되었음을

여기서 볼 수있다. 그런데 덕산파(德山派)와 김해파(金海派)만은

논쟁으로 말미암아 합보하지 않으니 이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닌가?

대종중에서 화해를 권유한지가 여러 차례 되풀이 되었으나 끝내 고집을

내세우면서 마치 대대로 전수해온 규례라도 있는 양 하고 있으므로

소릉(少陵, 두보의 별칭,杜甫의 別稱)의 외부의 혐의 받아드리지 마소,

종족과는 예부터 돈목해 왔느니 하는 시(詩)까지 인용하여 화해시켰지만

끝까지 듣지 않는 데야 어찌하랴. 이 밖의 몇몇 파에서도 혹 망설이고

관망하여 마치 제각기 문호를 수립할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번 보첩에서 엄명히 시정하는 것으로 일대 오점을 삼아 나간다면,

이다음에 반드시 이를 이어서 보첩이 다시 편집될 날이 있을 줄 안다.

옛적에 구양(歐陽) 문충공(文忠公,문충은 구양수위 시호,文忠은 歐陽修의 謚號)이

한(漢)나라 장상명신(將相名臣)의 연표(年表)를 모방하여 세보(世譜)를 만들었고,

황악(黃渥)은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무주(務州)가 관향(貫鄕)이었는데

그 나이가 서로 비슷하면 그 사이 서로 가깝다 여기고는 다시 합쳐 동종이 되었다.

그럼 이들은 그 성(姓)의 소자출(所自出)은 밝혀 놓았으나 소,목(昭. 穆)의

차서에는 어름한 셈이니, 결국 길가는 사람만도 못하게 될까 염려스런 일이다.

모든 가문의 보계를 보아도 거의 다 이와 비슷한 형편이니 아무리 돈목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를 본받으려 하나, 마치 높은 나무 위에 올라앉는 듯 한

두려움이 들곤 한다. 이른바 명위보(明衛譜)란 어느 세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조 태사공(始祖 太師公) 이상으로도 수십여 세계(世系)가

낱낱이 첨재(添載)되어 있는데 송경(松京) 이진사(李進士)의 집에 정확한

구본(舊本)이 있다고 하기에 아들 상우로 하여금 찾아보도록 하였던바

그 집은 이미 흔적이 없었고 그곳에도 많은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고려(高麗) 말기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휘 의생(諱 義生)의 후예들이다.

이에 명위보(明衛譜)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물어 보았으나, 그런 말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었으니,와전( 訛傳)에서오는 해독이야 말로

매우 심한 것이다. 이 같은 풍설이 이미 떠돌고 있는 이상, 이 다음에도

명위보(明衛譜)가 사실이니 아니니 하는 해독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충 언급해 둔다. 그럼 그 선계(先系)에의 의혹과 대수(代數)에의

연축(衍縮,늘고 주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 선조 매계 선생(梅溪 先生)과

회곡 선생(晦谷 先生)께서 해박한 문견(聞見)과 높은 덕망으로 지난 세대의

언행을 많이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정정하신 적이 없었으니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어찌 감히 천박(淺薄)한 문견으로 취언(군살, 붙임)을 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뿌리에서 갈려나간 내력만을 이어 다루어서 사이가

서로 멀어지지 않기를 도모할 뿐이다. 

 

신해보서(辛亥譜序) 말미

 

그중에 빠진 데를 보완하고 착오된 데를 정정한 점은 구보(舊譜)에

비하여 더 넣거나 삭제함이 없지 않으니, 이는 규례가 세대에 따라 달라진 때문이다.

아! 우리 가문의 문장 덕업(文章 德業)과 유학(儒學) 절행으로 말하면,

나라를 빛내고 백성을 잘살게 함으로써 후세의 표본이 될 만한 분이

전후를 이어 혁혁(赫赫)하지만 고려시대에 더욱 두드려졌고,

이조에 들어와서도 선대의 업적을 서로 계승한 분이 이루 헤일 수 없이

배출되었으니,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이처럼 계속 번창하고 있는 것은 이미

조상의 두터운 계우(啓佑,후손을 열어주고 도와주는 것)에서 기인된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행여 조상의 업적을 떨어뜨릴세라, 늘 조심하는 마음을 가져

아무리 잠깐 사이와 다급한 경우에서도 이를 생각한다면 어찌 이보다 더

성대(盛大)하고 영원한 복을 부르지 않겠는가? 상계(上系)를 이미 간행해 놓고,

나에게 서(序)를 부탁하기에 감히 식견이 천박하다고 사양 못하고

대충 몇 마디를 서술하여 후세의 끊임없는 계승을 바란다.

   신해(辛亥,1911년) 시월(十月)에 후손 시영(後孫 始永)이 삼가 서(序)하다

 

※ 조시영(曺始永,1843~1912)은 창녕 화왕산 정상에 창녕조씨 득성지지 표석과 

창녕 고암면에 창녕조씨 시조영적비와 영적비각인 일원각을 세웠으며,

벼슬은 개항기 동부승지, 경상도소모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봉계(鳳溪) 옥호동(玉壺洞)에 퇴거하여 후진배양에 힘썼으며,

편서로는 "상례제요(喪禮提要)", 저서로는 "후계문집(後溪文集)"이 있다.

 

시조 묘제

 

발(跋)

 

아! 본보(本譜)는 차마 할 수도 없고 또 감히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 선군(先君)의 효,우(孝. 友)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효,우(孝,友)를 종족(宗族)과 돈목(敦睦)하는 데에 미루어 늘 부족한 듯이

여기시면서 아무리 같은 종족끼리에도 세대(世代)가 멀어지고 사이가

서먹서먹해져 장차 남남과 같이 되었을 때 보첩(譜牒)이 없고는

조상을 계승하고 후손을 열어주는 도리를 밝할 수 없다고 걱정해 오시었다.

그러므로 신해(辛亥)년 봄에 각처의 모든 종족에게 이를 통고한바

이구동성으로 서로 호응하여 각파의 차단(扠單)이 일제히 도착하였으니

이는 진정 효제(孝悌)하려는 마음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겨우 1년만에 선군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아! 마음이 아프다.

이에 선대에 시작된 일을 후대에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은 불초(不肖)의

죄이다. 라고 통감하고 아우 의승(義承)과 함께 밤낮으로 마음과 힘을

기울인지가 어느새 다시 4년이 되었으나, 공사가 워낙 거대한 때문에

거의 다 되어가는 일을 무너뜨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늘 걱정하다가

다행히 4종제(四從弟) 대승(大承)의 의로운 협조를 힘입어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아! 종족에 대한 돈목을 염원하던

선군(先君)의 유지(遺志)를 이제야 거의 이루어 드렸다고 할는지 수시로

보책(譜冊)을 어루만질 적마다  선군의 손때가 아직도 묻어있는 것만 같으니,

망극한 애통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우리 가문의 대동보(大同譜)가 상대(上代)의

계유보(癸酉譜)로부터 이번의 신해보(辛亥譜)까지 네차례가 완성되어

그 권수가 매우 방대함에도 공사가 가장 빨리 끝났으니,

이는 혹 지하에 계시는 선군의 음조(陰助)가 아닌지? 아! 마음 아프다.

  갑인(甲寅,1914년) 십일월 하순(十一月 下旬)에

불초자(不肖子) 희승(禧承)이 외눈물을 흘리며 삼가 발(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