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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충의공 엄흥도의 묘소와 망월정

by 안천 조각환 2026. 3. 31.

엄흥도(嚴興道,1404~1474)는 강원도 영월의 호장(戶長)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관까지 준비해 장사를 지내준 충신이다.

본관은 영월 엄씨로 시조 엄임의의 12세손이며,영월 엄씨 군기공파

충의공계 파조이기도 한, 그의 진묘(眞墓)가 있는 군위를 찾아본다.

 

충의공 엄흥도의 묘소 입구

 

1457년 계유정난 이후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은 사육신

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땅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그러던 어느날 단종은 사육신을 만나는 꿈을 꾼 직후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게 되며, 이때 호장 으로 있던 엄흥도가

산마루에 있던 중 그 울음소리를 따라가다가 단종과 처음 만나게된다.

 

엄흥도 묘소 가는길

 

엄흥도가 그 소리를 듣고 “슬프구나, 곡소리가! 왕이 계신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며 가려 했는데, 이때 처가 만류하며

“당신은 왕의 녹을 받는 사람이 아니니 가야 할 의리가 없다”고 했지만

 그는 나무토막을 타고 강을 건너 단종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엄흥도의 묘역

 

그리고 단종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단종이 "누구인가?" 하니 "영월군의 호장 엄흥도입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왔는가?" 하니

"곡소리를 듣고 마음이 슬퍼 왔습니다." 하였다

 

충의공 엄흥도의 묘

 

왕은 "아, 내가 곡을 한것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내가 꿈에

사육신을 보았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기이하도다. 마치 사육신을

보는듯 하다. 사람들이 초야에 선인(善人)이 많다더니 그대와 같이

충성스러운 사람을 이르는 것이었구나.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엄흥도는 사양하며 옷깃에 눈물만 적실 뿐이었으며,

이로부터 틈이 날 때마다 왕을 찾아뵙고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엄흥도 묘비 ~ 증 공조판서 충의엄공지묘

 

단종은 유배된지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결국 죽임을 당하고,

시신은 영월의 서강에 버려졌으며,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어명이 떨어지자 그 누구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흥도는 직접 장례용품을 마련하여 세 명의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후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안장한 다음

벼슬을 내려놓고, 가족들과 같이 조용히 영월땅을 떠나 은거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날은 날씨조차도 매서운 눈보라가 쳐서

묻을 만한 맨 땅을 찾을 수 없었는데, 마침 산속에 앉아 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일행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으며, 그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는

눈이 녹아 있어서 천우신조라 여겨 그 곳에 단종의 시신을 매장했다.

 

엄흥도의 묘 안산

 

훗날 숙종 치세에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을 조정에서 내려보냈는데 그들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이미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

 

묘역의 할미꽃

 

이후 엄흥도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세 아들을 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피신 시키는 전략적인 결단을 내렸는데, 장남 엄호현은 당시

예천현(현 문경) 화장으로, 차남 엄광순은 부친과 함께 군위로,

삼남 엄성현은 함경도 안변 또는 울산(울주) 방면으로 흩어져 은거했다.

이는 훗날 각각 영월 엄씨 집성촌이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장자는 종통 보존을 위해 안정적이면서 번성 가능한 곳을 선택했고,

차자는 부친 봉양이라는 효의 실천을 위해 함께 군위로 갔으며,

삼자는 위험 분산을 위해 최대한 먼 거리로 이동했으며, 영월에는

선조 때에 엄흥도의 4세손인 한례(한려) 후손들이 거주한다.

 

 

엄흥도는 차자 엄광순(嚴光舜)과 함께 군위 의흥면 금양촌의

조림산 기슭에 은거하며 화를 피하다가 1474년(갑오) 2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후손들은 지금도 이곳에 세거하고 있다.

 

 

후손들은 금양2리에 망월정(望越亭)을 축조하여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군위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엄흥도의

편지와 족보 완문 등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엄흥도의 묘소가 있는 이곳 산성면 화본리 영월엄씨 문중산의

이름이 가지골(假知谷)인데, 이는 엄흥도의 은거를 알리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거짓 '가'(假) 자를 사용하여 불렀다고 전해진다.
영월에도 엄흥도의 묘가 있으나 가묘이고 이곳이 진묘로 알려진다.

 

금양리의 망월정(望越亭, 재실)

 

 엄흥도의 후손들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며 숨어 지냈으며,

이후 조선 후기인 1669년(현종 10)에 이르러 송시열의 건의로

엄흥도의 후손들이 등용되었고, 1698년(숙종 24)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망월정(望越亭) 편액

 

영조 34년(1758년)에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으로

추증하고, 왕이 친히 제문(祭文)을 내려 사육신과 함께 제향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영조 35년(1759년)에는 정려각(旌閭閣)이 영월에 세워졌으며,

고종 13년(1876년)에는 관직이 공조판서로 추증됨과 함께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망월정 마루위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주인공 유해진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영월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악사(波樂使)로,

신라에 동래했다가 본국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강원도 영월 땅인 내성군(奈城郡)에 안주하였으며,

이가 한국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망월정 마루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고려조(高麗朝)에서 호부원외랑

(戶部 員外郞)을 지내고 내성군(奈城郡)에 추봉되었다.

후손들에게 영월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자, 후손들이 영월에

정착하며 영월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왼쪽)영월엄씨 시조 엄임의, (오른쪽)충의공 엄흥도 초상화

 

고려조에 엄수안(嚴守安)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이르렀고,

엄공근(嚴公瑾)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보문각제학을 역임하였다.

11세 엄유온(嚴有溫)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좌군동지총제를

역임하였고, 그의 증손녀가 성종의 후궁인 귀인엄씨이다.

 

망월정에 걸린 편액 들

친목당, 경충재, 망월정기와 시, 망월정 상량문과 시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0명을 배출하였는데, 16세 엄흔(嚴昕)이

중종 때 홍문관전한(典翰)을 지냈고, 엄흔의 현손인 엄집(嚴緝)은

숙종 때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엄집의 손자 엄숙(嚴璹)이

영조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엄숙의 손자 엄도(嚴燾)는

순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망월정 전경

 

25세 엄석정(嚴錫鼎)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엄진삼(嚴鎭三)의 딸이 고종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되었고,

엄귀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된 영친왕(英親王)이다.

영월엄씨의 국내 인구는 145,000여 명이다.

 

영조가 내린 고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