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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문경 희양산 봉암사(鳳巖寺)

by 안천 조각환 2017. 5. 9.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으며,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목련(큰꽃)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 봉암사는 문경군 가은읍 희양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년에 단한번 4월 초파일날만 산문을 개방한다.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  ~ (햇빛 희)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 봉암사 결사인데, 봉암사결사는 기본적으로 성철, 청담, 자운,
우봉스님 4인의 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주규약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목표로 결사를 진행하였다.
 

 

바위기둥에서 보는 봉황문

 

청담스님의 추천으로 봉암사를 정하고 처음에는 성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의 4인이 시작하였으며, 청담스님은 가야총림 때문에  뒤늦게

합류하여,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보경(寶境),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스님 등 20여 명이 참가하였다.

 

 

계곡

 

신장 등을 없애고 백팔참회, 능엄주 독송, 조석예불 등 수행의례를
쇄신함은 물론, 현재 조계종의 통일된 법복으로 정해진 보조장삼(普照長衫),
율장에 의한 괴색가사(壞色袈娑), 철발우(鐵鉢盂) 사용,
육환장(六環杖) 소지, 오후불식 등의 엄격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실천하며 중국 총림의 일과에 맞게 생활하였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으로 오르는 길

신도들에게 3배와 보살계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특히 봉암사결사에서 현행 예불문이 완성되었으며, 교단 정화는 물론
주요 인물들이 조계종의 요직을 맡으며 종단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49년 빨치산이 출현하여 정진이 어려우므로 추석을 지내고
대중공사를 통해 입승이던 청담스님에게 뒤를 맡기고
성철스님은 경남 월내리의 묘관음사로 옮겼다.
결국 1950년 마지막까지 봉암사에 남아 있던 청담스님과
법전스님 등이 봉암사를 나오면서 봉암사결사가 무산되었다.
 

 

 

 

봉암사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21호)

 

 

원경

 

 

주변의 기암들

 

 

 

 

희양산이 보이는 곳

 

 

 

 

석불 앞 계곡

 

 

 

 

백운대

 

 

 

 

자화상

 

 

 

 

침류교(枕流橋) - 枕(베개 침)

 

 

희양산과 봉암사 전경

 

 

 

 

대웅전

 

 

 

 

남훈루

 

 

 

 

희양산

 

 

철쭉이 곱게 피는 5월의 희양산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