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은 달성군 구지면 대니산 기슭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정당, 사당의 담장은 보물 제350호이다.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서원 제일 앞 건물인 수월루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기리기위해 외증손인 한강 정구(鄭逑)선생이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한훤당선생의 무덤 밑인 이곳에 1605년 세운 서원이다.
1607년(선조 40년) 공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조선중기 서원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며, 이날 사당을 공개한다.
환주문
수월루를 지나 중정당으로 들어서는 좁은 계단위의 문이 환주문이다.
수월루에 들어와 주인을 부른다고 환주문이라 했다 하며,
문의 높이가 매우 낮은데 이유는 갓을 쓰고 구부리지 않으면
들어설수 없도록, 즉 그만큼 자세를 낯추고 서원에 들라는 뜻이 있다한다
안에서 보는 환주문과 수월루
강당인 중정당
서원 중정당인 강당에서 내려다본 수월루와 서원 앞 전망 . 바로 앞이 낙동강이다
서원 강당인 중정당, 뒤 창을 열면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서원을 방문한 학생들이 사당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동재인 거인재
서재인 거의재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다.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중정당 뒷편에 있는 사당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 연루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사당 전경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인 1500년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으며
이때 조위선생과 같이 옥천변에서 자주만나 서로를 위로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는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503. 11월 조위선생이 병으로 유배지에서 죽게되자
김굉필은 조사를 지어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때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지은 조사이다.
그 이듬해인 1504년 김굉필선생도 갑자사화로 죄목이 추가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된다.
제선생문(祭先生文)
유세차 홍치 16년 12월 12일, 순천에 유배된 김굉필은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치려 놓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매계 선생, 조 태허의 영정 앞에 제사를 올립니다.
생각건대, 공은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장자의 풍모를
지니셨으며, 아주 어릴 때부터 이름이나 명성이 나라 안에 자자하더니
회시에 선발되어 벼슬길에 올라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 번 군수로 나아가자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입었고, 충청, 전라도 감사를
맡아 임금의 덕화를 널리 펴자, 도민들은 아직도 그의 덕을 사모한다.
승정원의 도승지를 맡아 임금의 명령을 비롯한 나라의 중대한 언론을
담당하였고, 홍문관에 출입하며 여러 차례 왕의 전교와 비답을 담당하여
문장으로서 나라를 빛냈으며, 시(詩)도 으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한 호조참판에 발탁되어 높은 지위와 명성을 드날리니,
선비 집안에서 누군들 영예롭게 여기고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아아! 복이 없고 팔자가 사나워 중도에 허물을 얻어 관서(의주)로
귀양을 갔다가 남도(순천)에 이배되어 6년 되던 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 끝내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찌고 습한 남도 땅에서 고향 길 찾는 영구는 누구를 의탁하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넋도 외롭고 육신도 의지할 데가 없으니, 슬픔이 갑절이나 더하여
곡할 자식도 없고, 조문하는 친척도 없었다.
끝내 그의 후사가 끊겼으니, 하늘도 어찌 매정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군들 죽지 않으랴만 공은 더욱 가련하다.
내가 공을 본 것은 실로 청년시절부터였으며,
함께 귀양 갔다가 동시에 옮겨져서 함께 승평에 이배되어,
특별히 베풀어준 은혜가 두터워서 마치 동생과 형인 듯하였다.
서로 반갑게 맞아 강론할 때, 깊은 정으로 대하였다.
장차 의지하며 남은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으나,
나라 걱정에 병이 들어서 서로의 맹세가 어긋났다. 어찌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헤아리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갔단 말인가?
오호라! 나의 지극한 궁핍과 외로움이여,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고, 나서도 갈 곳이 없네,
외로운 몸으로 그림자나 돌아보며 탄식하게 생겼으니,
지금 이후의 세월은 누구와 더불어 보낸단 말인가?
다만 모시고 놀던 일을 생각하면 간과 쓸개를 도려낸 듯 아픈데,
하찮은 재물을 차려 놓고 슬픈 마음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술을 걸러서 정성을 아뢰니 늙은이의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아 아 슬프구나! 흠향하소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굉필 선생의 시비
현풍에서 넘어오는 다람재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노 수 송
한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있어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찬 겨울에 너와같이 변하지 않는마음
지나가는 사람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고갯마루 다람재 위에서 본 도동서원 전경. 오른쪽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조 위선생이 한훤당 김대유(굉필)에게 쓰다
이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잘 받으셨는지요?
이렇게 안부를 물을 때엔 진중해지고,
멀리에서 위안하려 함에 치솟는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다만 저의 옛날의 기량은 사람들에게 말할 만한 것이 없고,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임금을 사랑하는 작은 정성이 평소에 쌓은 것에 저촉되며
조정의 일로 항상 바쁘다 보니 배운 바가 날로 퇴보하는 것이
이치상 당연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항상 사문(師門)에 두고 있으나
환로의 풍랑이 때로 놀라게 하고 내 마음의 근원마져 어지럽힙니다.
매번 스승의 가르침을 돌아보고 마음의 흐트러짐을 반성하며 마음을 오롯하게 하고자 하나
마음이라는 것이 때도 없이 들고 나는지라 편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러나고자 하나 허국(許國)의 의에 어긋나고
남아 있으려니 존심(存心)의 정성이 줄어드려 합니다.
저의 진퇴는 실로 난감한 지경이니 형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들어서 협소배들이 뜻을 얻음이 점점 늘어가니
조만간 편안하게 산림에 은퇴하여 형과 함께 도를 논하고 생각하며
만년을 마칠까 합니다.
매번 함께 놀고 함께 배우던 때의 우의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바라면서 한숨을 길게 쉬곤 합니다.
다만 부절(符節)을 받드는 신하가 되고자 하는 희망은 있지만 재주가 없고,
돌아가기를 허락 받으려 하나 혹 직책 때문에 차질이 생겨 늦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니,
어찌 훗날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스스로 마음을 여유롭게 가질 따름입니다.
다만 바라건데 사도(斯道)를 위하여 몸 건강하십시요.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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