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각은 경북 영천시 금호강변에 있으며 명원루 혹은 서세루라고도 불린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고려말 충신이던 포은 정몽주선생이
당시 부사이던 이용(李容)과 함께 향내 유림들이 합심하여 지은 건물로
명원루(明遠樓)라 하였고, 영남루,촉석루와 함께 영남 3루의 하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이다.
조양각 전경
원래는 명원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후 1637년(인조 15)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누각 15칸, 협각 3칸을 중창하여 이름을 ‘조양각’이라 고쳤다.
1742년(영조 18)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3중창하였으나
192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협각을 비롯한 내ㆍ외문이 철거되고 조양각 1동만 남게 되었다.
누각에는 이 고장을 거쳐 간 수많은 명현, 풍류객들의 시구가 조각된 80여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금호강변의 조양각
측면
조양각 내부
"제명원루" 편액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고려말 충신이던 포은 정몽주선생이
당시 부사이던 이용(李容)과 함께 건립했다는 "제명원루" 편액으로
앞은 정몽주, 뒤는 이용의 시가 같이 쓰여잇다.
제명원루(題明遠樓)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
청계석벽포주회(淸溪石壁抱州回)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
갱기신루안활개(更起新樓眼豁開) 다시금 새 우각 이룩하니 눈이 활짝 트이네
남묘황운지세숙(南妙黃雲知歲熟) 남쪽이랑 누른 벼는 풍년이 왔음을 알리고
서산상기각조래(西山爽氣覺朝來) 서산의 시원한 바람은 아침이 되었음를 알리고
풍류태수이천석(風流太守二千石) 풍류를 즐기는 태수는 녹봉이 이천석인데
해후고인삼백배(邂逅故人三百盃) 옛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술이 삼백잔이라
직욕야심취옥적(直欲夜深吹玉笛) 곧바로 밤이 깊어 옥피리 불면서
고반명월공배회(高攀明月共徘徊) 밝은달 높이 휘어잡아 함께 배회하고자 하네.
*정몽주는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
초명은 몽란,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이며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부사 이용 (府使 李容)
신루돌올조비회(新樓突兀鳥飛回) 새 누각 우뚝 솟으니 새는 날아 돌아오고
회포등림득호개(懷抱登臨得好開) 포부를 품고 올라오니 가슴이 확 트이네
이현고인난재회(異顯故人難再會) 다른고을 옛 벗은 다시 만나기 어렵고
금년차일불중래(今年此日不重來) 금년의 이날은 거듭 오지 아니하네
계허수영요가선(溪虛水影撓歌扇) 시내가 맑으니 물 그림자에 노래하는 무희가 부채을 흔들리고
산근추광락주배(山近秋光落酒盃) 산이 가까우니 가을빛이 술잔에 떨어지네
오두이년성저사(五斗二年成底事) 고을살이 두해만에 무슨 일을 이루었나
갱감천리독배회(更堪千里獨徘徊) 다시 어찌 견디라,고향 떠나 천리 밖에서 홀로 배회하누나,
이용(李容) 1368년~1370년까지 영주부사(현 영천)를 역임하며 명원루(조양각)를 지음
*참고로 편액들은 오랜 세월로 희미하거나 퇴색하여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은데다
그 숫자가 많아 겹으로 걸려있기도 하고, 비둘기등 조류가 드나들며 훼손 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장은 모두 그물망으로 씌워져 있어 일반 사진으로는 촬영하여 판독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임.
제조양각(題朝陽閣)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백운황학기천추(白雲黃鶴幾千秋) 백운과 황학이 깃든 지 몇 천년이 되었던고
위애청산불하루(爲愛靑山不下樓) 청산을 사랑하여 누각에서 내리지 못하네
이퇴정공무일사(吏退庭空無一事) 아전을 물리고서 뜰이비어 할 일이 없는데
석양구로하정주(夕陽鷗鷺下汀洲) 석양에 갈매기와 백로는 정주에 내려가네,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이다.
조양각 조망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341~1492)
원융신향진한회(元戎新向辰韓回) 원수(元帥)가 새로이 진한을 향하여 돌아오니
막객수회도처개(幕客愁懷到處開) 적졸(敵卒)의 울적한 회포 가는곳 마다 풀리네
임고포문산천호(臨皐飽聞山川好) 임고는 산천 경치가 좋다고 익히 들었더니
춘색요수정패래(春色遙隨旌稗來) 봄빛은 멀리 깃발따라 펄쳐지네.
한점소우미무저(閒霑小雨薇舞渚) 조금 내리는 비 궁궁이 싹이 돋는 물가 한가로이 적시네
독파고우앵무배(獨把高樓鸚鵡盃) 높은 루에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을 홀로 잡았네
갱대사군음화극(更待使君吟畵戟) 다시 사또님의 행차를 기다려서서
난간종일공배회(欄干終日共排徊) 난간에서 온종일 함께 배회하네,
*김종직은 조선 세조 때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 효관, 호는점필재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상관에 임명됐으며
이후 두루 벼슬길에 올라 이 무렵부터 제자들과 함께 사림파를 형성했다.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1420~1488)
백운황학기시회(白雲黃鶴幾時回) 백운과 황학이 몇 번 이나 돌아왔던고
이수삼산차제개(二水三山次第開) 이수와 삼산이 차례로 열렸네
최호풍류인불견(崔灝風流人不見) 최호같은 풍류객은 볼 수 없지먼
적선재조객중래(謫仙才調客重來) 적선 같은 재주있는 시객은 다시 왔다네
등림천고부천고(登臨千古復千古) 올라서 노는 사람 천고에 천고를 거듭하고
이별일배우일배(離別一盃又一盃) 이별하는 술잔이 한잔에 또 한잔이로다,
위피주인고만수(爲被主人苦晩袖) 주인이 굳이 내 소매 당기고 만류하기에
주란사의취배회(朱欄徙倚醉排徊) 붉은 난간에 서성이며 술 취해 배회하네,
*서거정은 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며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에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분을 지켜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황성옛터 노래비
- 조양각 옆에 있는 이 노래비는 영천 출신인 왕평 이응호(王平 李應鎬,1908~1940)가
"황성옛터" 노래의 가사를 지은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노래비다.-
조양각 공원내의 비림
조양공원과 조양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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