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봉계 창녕조씨입향조 참의공묘소에 얽힌 이야기

by 안천 조각환 2019. 9. 27.

김천 봉계는 봉황이 물 위에 떠 있는 봉황부유형(鳳凰浮遊形)의 명당으로 불린다.

창녕 조씨 입향조 조심(曺深, 參議公)이 봉계로 입향한 것은

서산 정씨 정윤홍(鄭允弘)의 사위였던 인연으로 전해진다.

려 말 군기부정(軍器副正)을 지냈던 정윤홍은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한탄하며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1373(공민왕 22) 김천 봉산면 봉계로 은거해 자리를 잡았다.

당시 정윤홍의 둘째 딸은 개경에 살던 조경수의 3남 조심에게 시집을 갔다.

조경수(曺敬修,贊成公)는 고려 말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단행해

창왕을 옹립한 공으로 좌시중에 오른 조민수(曺敏修)의 동생이다.

1389년 조민수가 조정의 탄핵으로 창녕으로 유배되면서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개경에 살았던 조경수의 3남인 조심도 벼슬을 버리고 김천 봉계로 낙향했다.

이성계와의 대립으로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처지가 되자

처가가 있던 봉계로 입향한 조심(曺深, 參議公).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김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로 낙향했던 정윤홍.

그가 죽자 다섯 아들은 지관을 불러 명당을 찾았다.

지관이 가리킨 곳은 지금의 김천 봉산면 예지리 외입석마을(바깥선돌)에 위치한 방목산자락이었다,

지관은 이 터를 두고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황악산을 안산(案山)으로,

샘골과 큰골을 각각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삼은

현침혈(縣枕穴)의 명당"이라고 설명했다.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온 조심의 아내 서산 정씨는

아버지의 묏자리가 대 명당이라는 지관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미 지역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은 친정보다

이제 갓 봉계로 입향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댁을 생각하면 명당에 욕심이 났다.

서산 정씨는 시댁이 명당을 양보받기 위해 꾀를 냈다.


현침혈 명당에 자리한 입향조 조심(曺深, 參議公) 의 묘


 친정아버지의 출상 일에 앞서 지관이 잡아놓은 묏자리에다

밤새 옆에 위치한 옹달샘에서 물을 길은 뒤 묘광(墓壙)에 물을 채웠다.

출상 일에 상여가 묘역에 당도해보니 전날 파놓은 묘광에 물이 가득했고 상주들이 매우 놀랐다.

논의 끝에 "아무리 명당이라고는 하나 물이 솟는 땅은 불길하니

다시 지관을 불러 살피게 하자"고 결정하고 다시 터를 잡은 곳이 산 너머 분통골이다.

훗날 조심의 아내인 서산 정씨는 남편이 죽자 친정에 부탁해 방치돼 있던

방목산 친정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해

남편인 조심(曺深)의 묘가 바로 이 자리에 모셔지게 되었고, 뒷날 자신(서산정씨)도 같이 모셔졌다.


입향조 조심의 묘앞 비석

-증통정대부병조참의조공지묘(贈通政大夫兵曹參議曺公之墓)

숙부인서산정씨(淑夫人瑞山鄭氏)-


명당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는 모르나

조심이 처향(妻鄕)인 봉계에 입향한 이래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무수히 배출하며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반면 당시 봉계에서 명문으로 번성하고 있던 서산 정씨는

봉계에 사는 후손을 지금 찾기 힘들다.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친정아버지의 묏자리에 남편의 묘를 들인

서산 정씨 부인에 대해 "출가한 여인의 몸으로서 이미 명문가로 자리매김한

친정보다는 갓 뿌리를 내리려는 시댁의 번성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밤새 물을 날랐으니 오히려 가상하다"고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