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의 시문학

by 안천 조각환 2009. 7. 2.

 

 

 

 매계 조위선생은 본관이 창녕이고 호가 매계이다.

단종2년(1454)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에서 태어났다.

조위의 아명은 오룡인데 서제(庶弟)인 조신과 함께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일곱살에 시를 지을줄 알았다

그러나 조위의 학문은 김종직과의 만남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가 열살때 누나가 김종직에게 출가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김종직의 문인이 됐다

 자형 김종직 에게서 예기와 문장을 배운 조위는 18세때 생원진사에 3장 장원급제했다

21세때 문과급제하면서 관계에 진출했다. 승문원정사 예문관검열을 거처

23세때 성종의 명으로 갓생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때 조위는 양희지,조호인,권건등과 장의사에서 글을 읽었는데 조위가 제일 나이가 적었다.

그의 뒤를 이어 김일손 강위등 문우들이 속속 호당에 들어와

마치 세종때 집현전학사들이 사가독서 하는 것과 방불했다

 조위의 벼슬은 누진되어 25세에 홍문관 교리와 박사가 되어 임사홍을 탄핵했고

이듬해엔 경차관으로 평안도 삼봉도의 난민을 수습했다.

또 김흔과 함께 일본 통신사 이향원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무렵 조정에서는 세종때 착수했던 중국 만당의 시성 두포의 시를

언해하는데 심혈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성종은 이작업의 최고 책임자로 명문장가이며 국문에 조예가 깊은 조위를 임명했다

성종이 두시언해를 국가적 사업으로 완결지우려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교일국을 내걸고 개국한 조선은 착착 그기반이 다저졌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은 건국이념인 유학의 핵심인 정통사상과 대의 명분을 뿌리체 흔들어 놓았다

 이점을 염려한 성종은 우국충절의 내용이 풍부한 두보의 시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므로서

민심을 국왕과 국가에 돌리려고 했다  원래 두보의 시는 세종때 영천사람 유윤겸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란 이름으로 주석해 놓은것이 있었다

유윤겸은 두시의 대가이자 父인 유방선의 가학을 이어 두시에 능통 했는데

이때 조위의 소개로 두시언해 작업에 참가했다  

성종12년 조위가 28세 때 유윤겸 義砧등과 함께 완성한 두시언해는 조위가 서문을 쓰고 활자로 인쇄했다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을 역임한 조위는 31세때 부모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자청해 고향부근인 함양군수가 됐다.

조선초 이래 유학자들에 의해 널리 숭상된 이같은 위친걸군(爲親乞郡)은

김숙자 김종직을 거처 문인 유호인 조위 정여창등이 실천에 옮겨

성리학 윤리를 실천하고 지방교육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역임한 함안 선산 합천 의성 고령 등지를 중심으로 문풍이 크게 진작됐다.

 영남이 명실상부한 인재의 보고로 불리게 된것도 이때부터 비롯됐던것이다  

소학 대학 실천윤리를 중시하는 영남사학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이 성리학과 사장을

겸비했던만큼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도학과 문장의 두계보로 나눌수있다  

김굉필 정여창이 도학에 치중하여 만년에는 詩作에서 손을 때다싶이 한 반면

조위 유호인 김일손등은 문장과 경사에 뛰어났다.

특히 조위는 詩老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20대에 성종 제일의 충신이 됐다

 김종직이 성종23년에 죽자 조위는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었는데 이것이 후일 유자광 이극돈에게 역신으로 몰리는 단서가됐다

   연산군4년에 서제 조신과 함께 중국에 성절사로 갔다오던 조위는 요동에서 무오사화의 비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는 즉시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진것을 알았다.

일행은 몰라 어쩔줄 몰라하는데 그는 태연히 갈길을 재촉했다

 마침 요동에 점을 잘치는 추원결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신이 찾아갔다.

 추원결은 <천충의 물결속에서 몸을 뛰처나와 모름지기 바위밑에서 세밤을 자겠다>하는 시를 써주었다

 일행이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건너니 뜻밖에도 이극균의 극간으로 조위의 사형이 취소되고

의주로 귀양가게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추원결이 <천층 물결속에서 뛰처 나온다>고 한것은 바로 압록강을 건너서도

살겠다는 뜻이었으나 아래구절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뒷날 조위가 순천에서 죽은후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덤앞 바위밑에서 부관 참시돼

3일간 시체를 늘어놓자 사람들은 추원결의 점괘가 딱 들어 맞은데 놀랐다고한다  

의주로 귀양간 조위는 몇평안되는 귀양지에 해바라기 수십그루를 심고

띄풀로 역은 작은 정자를 지어 규정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죽은 성종에 대한 사모의 정을 해를 그리는 해바라기로 나타낸것이었다

 

地方敎育힘쓰고 文風진작

 순천으로 다시 귀양간 조위는 玉川가에 臨淸臺라는 단을 쌓고는

같이 귀양온 문우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짓기도했다. 이무렵 그는

   천상백옥경의 십이루 어듸메오/   오색운 깊은곳의 자청천이 가려시니/

   천문 구만리를 꿈이라도 갈동 말동 /   차라리 죽어져서 억만번 변화하여 /

   남산 늦은 봄의 두견의 넋이되어 ...라는 만분가 를 지어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길없는 비분을 천상의 옥황(성종)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가 지은 이 만분가는 국문학 사상 유배가사의 효시로서 높이 평가 받고있는 것이다

 현재 조위의 고향인 김천시는 조위를 기리는 뜻에서  매계 조위의 태생지인

봉산면 인의동 매계구거인 율수제에서 매년 매계백일장을 열고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대동야승,  

도움말 : 경북대 문경현 교수(한국사)김천문화원 이긍규씨  <여은경 기자> -일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