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현문
옥천서원
玉川書院記
嘉靖 癸亥년에 龜巖 李公(李楨)이 昇平府使로 나왔을 때 寒暄 金先生이 이곳에 와서 謫居하다가 서거 하였다.
하여 慨然히 선생을 추모하였다. 마침 臨淸坮記 한편을 입수하고는 선생의 小作으로 여겼는데,
赴任즉시 이른바 임청대의 옛터를 尋訪(심방)하고 또 本府 사람들에게 물어본 뒤에야
그 記文이 梅溪 曺公의 小作임을 알았다.
드디어 그 옛터에 三칸의 집을 짓고 “景賢”으로 이름한 뒤에 大升이 이 일의 顚末을 알고 있다 하여
記文을 부탁하는 한편 退溪 李先生에게 글을 올려 자문을 구하고 아울러 寫額(액자를 쓴다는 뜻)을 청하였는데
이 사실이 景賢錄과 記語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 乙丑(1565)년에 士子들이 李公을 拜謁하고 나서
만약 精舍를 다시 세워 수호하게 한다면 이 堂도 서로 유지하여 오래도록 湮沒되지 않을 것이다 고 하였더니,
李公이 승낙하고 堂의 우측에 있는 民家를 터로 결정, 官田을 주어 보상한 뒤에 설계를 내어 착공한바,
기꺼이 공사에 부역하는 자가 많아 겨우 5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그 규모는 중앙을 堂으로 하여 兩翼은 廂이,
左右는 齋가 되고, 廚庫는 그 뒤에 위치하였는데 堂은 玉川精舍로 齋는 志道와 依仁으로 이름 하였으니,
이는 다 退溪선생이 명명하고 또 친필 한 것이다. 낙성하는 날에 李公이 士子들을 인솔,
景賢堂에 先聖(孔子)의 위패를 위시하여 寒暄선생과 梅溪曺公의 위패를 배설하고 祭를 드린 뒤에
다른 위패는 철수하고 한훤선셍의 위패만을 경현당 좌측 一칸에 봉안, 경현당을 祠宇로 삼고 祭를 드리는 의식을
규정하여 매년 2월과 8월 다음 丁日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또 제자들을 모아 精舍에 머물게 하고
거기에 소요되는 器物, 식량과 서적, 노비에 대해서도 온갖 힘을 기울였으며, 吾道를 주창하고 賢人을
기대하는 데에는 더욱더 근실하였다. 이어 이듬해에 李公이 母喪을 만나 그만 두고 扶寧 金侯 啓가 와서
이를 관장, 이전의 규모를 둘러보고는 선생의 위패가 한쪽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사람을
이공에게 보내 자문을 받고 위패를 다시 경현당 중앙에 奉安하니, 儀式이 일신하고 條理가 구비되었다.
隆慶 戊辰(1568)년 여름에 士子들이 精舍의 건립이 위에 알려지지 못한 때문에 國家에서의 恩典이 다른 書院과
동일하지 않다고 여기고 疏를 올려 간청하여 玉川書院이란 縣額이 정식으로 내려지고 四書가 頒賜(반사)되었으니, 이곳 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정진하고 뒤이어 오는 府使들도 다 여기에 마음을 두어 指晝하므로 院中의 모든 일이
완벽해서 조금의 모자람도 없게 되었다. 처음에 李公이 寒暄선생의 遺事와 堂을 건립한 始末을 기록하여 景賢錄을 만들었으나 精舍 건립에 대해서는 미처 기록되지 못하였었다. 이번에 本 府使 李侯 選(?)이 大升(기대승)에게 글을 보내 부탁하기를, 경현당에 대해서는 자네가 이미 기문을 썼으나 그 사이에 書院으로 연혁된 까닭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이를 마쳐주기 바란다고 하였고, 院生 許上舍 思曾이
跋涉(발섭-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는 뜻)의 수고를 불구하고,
두 차례나 幣廬(폐려-자기의 집을 낯춰서 일컫는 말)를 찾아 와서 더욱 강력히 간청하고 나서,
이어 이는 李使君의 뜻일뿐 아니라 龜巖의 뜻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大升이 이를 감히 굳이 사양할 수 없으나
身病이 깊고 人事가 번거로워 오랫동안 붓을 잡을수 없으니 항상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한편 李侯와 諸生들이
이 보잘것 없는 글을 구하기 위하여 누차 간청해 마지 않는데는 그만한 의의가 있겠지만 所見이 워낙 어둡고
고루하여 기대에 부응되지 못할까염려이다. 우리 東方이 본시 文獻의 나라로 三國이래 豪傑스런 인사가
없지 않았으나 그 遺德의 光榮이 영원하여 후세까지 照耀(조요)한 이는 대개 드물다.
그런데 한훤선생이 수천년 이후에 배출 挺然히 우뚝서서 고인의 학문에 전력하여 그 遺風과 餘韻이 충분히
인심을 바르게 하고 世道를 붙잡을 수 있으니, 지금이 배우는 이로서 聖賢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
스스로 禮儀의 가르침에 격려한다면 어찌 그 本源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늘이 이 국가를 도와서 道學이
점차 밝아지고 書院의 건립이 곳곳에 있으니, 이는 참으로 태평을 장식할만한 도구이다. 다만 諸生들의 힘쓰는
학문이 능히 성현의 遺法을 체득하고 국가의 고육하는 美意에 위배되지 않는 지 모르겠다. 그으기 듣건데
옛적의 배우는 이는 자기를 위하는데 지금의 배우는 이는 남을 위한다고 한다. 대저 배워서 자기를 위하면
聖賢에 이를수 있고, 배워서 남을 위하면 명예나 祿俸을 위하는 계책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낭패가 아니겠는가?
지금에 斯文이 불행하고 哲人이 萎落하여 退溪先生이 後學을 버렸고 龜巖公도 갑자기 가버렸으니,
吾徒로서 어찌 무척 슬프지 않겠는가? 龍號가 喪亡하고 世事 또한 예측할 수 없으니 諸生들도 吾道의 흥망이
좌우되는 이즈음에 처하여 감동됨이 있을런지 모르갰다. 대저 人心과 天理는 도저히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일상생활에 수시 發顯되곤 한다. 諸生들이 능히 좌절하거나 변동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학문에 힘껏
종사한다면 성현은 이미 멀리 갔으나 그 道는 언제나 여기에 있으니 어찌 그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諸生들은 제발 힘쓰도록 하라.
隆慶 辛未(1571)년 九月 日에 後學 高峰 奇大升이 삼가 記하다.
옥천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순천부사 이정이 김굉필을 위하여 경현당을 지은 것이 시초이며
고봉 기대승이 '경현당기'를 썼다. 그 후 선조 1년(1568)에 순천부사 김계의 상소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호남 사림의 요람이 되었다.
임청대 또한 순천부사 이정이 조위와 김굉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인데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조선(朝鮮) 연산군(燕山君)(1494∼1506), 재위) 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先生)과
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 두 분이 귀양살이 하면서 돌을 모아 대(臺)를 만든 것이다.
'임청(臨淸)'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대 이름은 조위 선생이 지은 것이라 한다.
그후 명종(明宗) 18년(1563) 구암(龜岩) 이정(李禎) 선생이 이곳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으로부터 임청대(臨淸臺)란 친필을 받아 비석(碑石)을 세우고,
비석 뒷면에는 연산군 8년(1502)에 조위 선생이 지은 글인 임청대기를 새기려 했으나
돌의 질이 좋지 못하여 새기지 못하고, 그 내력만을 음기 하였다.
현 위치에서 동쪽 약 30m 지점에 있던 것을 1971년 5월 19일 이곳으로 옮기었다.
다음은 무등일보에 게제된 내용의 일부이다.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이 심해지고 있는 연산군 6년(1500년) 여름 어느 날,
전라도 순천의 옥천(玉川) 시냇가를 배회하는 두 선비가 있었다.
한 사람은 근엄하고 사색하는 표정이었고 또 한 사람은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이들이 바로 김굉필(1454-1504)과 조위(1454-1503)이다.
한훤당 김굉필.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그는 평안도가 흉년이 들자
순천으로 귀양을 왔다. 그는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일찍이 소학동자라 불리었다.
사람들이 나라 일을 물으면 “소학 읽는 아이가 어찌 큰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였고
'소학을 읽고(讀小學)'라는 시에서 보듯이 항상 소학을 실천하였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책 속에서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하려 하노니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스승 김종직이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오를 자로 평하였듯이, 그는 군자가 되기 위한 도를 실천하는
유가의 도학자이었고 평소에 한빙계(寒氷戒)를 계율로 삼았다.
한빙이란 뜻은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갑다’는 의미이다.
그가 삶의 지표로 삼은 한빙계 18계율은 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 세워 착한 본성을 따르라),
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등이다.
이렇듯 김굉필은 유배 중에도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항상 갓을 쓰고 있었으며
밤늦게 까지 책을 읽으면서 파루 종이 울린 다음에야 잠을 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났다.
그리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가 조광조의 스승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17세의 조광조는 평안도 어천 찰방(지금의 역장)으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서 살았는데,
인근의 희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2년간 공부를 배웠다.
김굉필은 순천에 유배 와서도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계린, 최산두 등이 그의 제자이다.
유계린은 '표해록'을 쓴 최부의 사위이고 기묘사림 유성춘과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의 아버지이다.
최산두는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가서 김인후, 유희춘을 가르쳤다.
한편 매계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으로서 김굉필과 같이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는 시를 잘 지어서 일찍이 성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그는 성절사로 중국에 있었는데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조위가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첫 머리에 수록한 것은 매우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 참소하였다.
연산군은 크게 노하여 조위가 강을 건너는 즉시 베어 죽이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동행한 조위의 이복동생 조신이 요동에 있는 점쟁이 추원결을 찾아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만 한 구절의 글을 적어 주었는데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으나(千層浪裡翻身出)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 하지(也須巖下宿三宵)”라 하였다.
조위가 압록강에 이르자 다행히 목숨은 면하고 평안도 의주에서 귀양을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다”는 점괘는 알 수 있었으나 다음 구절의 뜻은 알지 못하였다.
조위도 김굉필과 마찬가지로 같은 때에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서문밖에 살면서 옥천을 자주 노닐었다.
여러 늙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바둑을 두기도 하였으며 시도 읊조렸다.
그는 옥천의 노거수 위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이름을 ‘임청(臨淸)’이라 하였다.
임청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개울(임청류)에 임하여 시를 짓노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유유자적한 조위였으나 마음에는 울분이 가득하였다.
성종임금이 그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시로 이러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유배가사 '만분가(萬憤歌)'이다.
만분가는 129구의 장편가사로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 간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하계(下界)로 쫓겨난 것에 비유하였다. 두견의 넋이 되어 남산 배나무에 앉아
밤낮으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원통한 사연을 하소연하고, 구름이 되어 옥황상제로 비유된
성종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쌓인 말을 실컷 아뢰겠다고 했다.
국문학자들은 이 가사가 나중에 송강 정철이 지은 국문가사 '사미인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학자 김굉필과 시인 조위는 옥천변에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런데 조위는 연산군 9년(1503년) 11월에 병으로 죽는다. 울분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굉필이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너무나 쓸쓸하였다.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이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듣자 조광조는 조위를 애도하는 시를 남기었다.
매계가 먼저 가시고 한훤당이 조사(弔辭)를 지으시니 야사에 올해는 슬픔도 가득하다고 하리라.
도를 찾는 일 양지바른 강가의 어린 아이처럼 서릿발 가득한 하늘에서 누런 꽃 보는 것 같구나.
그로부터 1년 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김굉필에게도 화가 미치어 참수령이 떨어졌다.
그는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한 채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고
순천 저자거리에서 초연히 참수를 당하였다. 1년 전에 죽은 조위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그의 관(棺)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베어져서 묘 앞 바위 아래에다 3일 동안 뒹굴었다.
점쟁이의 두 번째 점괘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하지”가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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