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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전.충청권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만수산 무량사

by 안천 조각환 2020. 7. 16.

부여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기슭에 아담하게 자리한 무량사는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말기에는 고승 무염(無染)이 일시 머물렀으며

조선조 초기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震默)이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도도한 시심(詩心)을 펼쳤던 사찰이다.

 

천왕문 안으로 보이는 그림같은 무량사 풍경

무량사에는 보물 제185호인 무량사오층석탑, 제233호인 무량사석등과

제356호인 극락전, 제1565호의 동양최대 불좌상인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보물 제1265호인 무량사 미륵불괘불탱(扶餘 無量寺 彌勒佛掛佛幀)

또 영정각에 있는 보물 제1497호인 김시습의 영정 등 많은 보물이 있다.

천왕문앞의 거대한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의 부도등의 문화재도 있다.

 

산문 입구인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숲속길을 지나
조그만 다리를 건너고
천왕문에 다다르면 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꺼번에 마주하는 보물들(석등,오층석탑,극락전)
무량사 석등(보물 제233호)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
극릭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호)

1633년 작으로 높이는 본존불상 540cm, 협시보살상 480cm이다.

 

영정각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학자이면서 문인이며,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방랑한 천재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며,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

또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시습 영정(보물 제1497호)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이듬해, 상왕 복위의 음모를 꾸몄다고

정창손이 주동이 되어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을 잡아들여 참형시켰다.

사육신 등의 시체는 길가에 버려져 있었고 가족은 모두 잡혀가 있어서

누가 시체를 거두지도 못할 절박한 현실이었는데,

이때 한 승려가 나타나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남쪽 언덕에 묻었다고 하며, 이 승려가 바로 김시습이라고 한다.

 

 

영정각 건물

김시습이 1493년(성종 24) 이곳에서 죽자 승려들이

그의 영각(影閣)을 절 곁에 짓고 초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이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궁(學宮) 곁에

사당을 짓고 청일사(淸逸祠)라 이름하고 그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영산전

이후 김시습은 전국을 떠둘아 다니며 방랑자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부여 만수산 무량사로 발길을 돌려 삶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다.

하루는 무량사의 여러 스님들이 설법을 청했다.
“빈승들이 대사를 받든 지 오래되었으나 설법을 한 번도 들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사의 청정하신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

빈승들이 향할 곳을 알지 못하니 눈에 가린 것을 금집게로 긁어주소서.”
“너희들은 크게 설법의 자리를 열라.”
김시습은 가사를 걸치고 법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리쳤다.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소 먹일 꼴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소 꽁무니에 놓아두거라.”
소와 꼴이 놓이자 그는 다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불법을 듣고자 함이 이와 같다.”
설법은 이것으로 끝이었고 중들은 얼굴을 붉히고 수군거리며 물러났다.

무식한 승려들을 비웃는 뜻으로 선승의 설법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량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도통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기가 넘치고 독선적이었고 불의나 남의 허물을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원통전

무량사에서 어느 날 그는 붓을 잡고 자화상을 그렸다.

그리고 자화상 위에 이런 글귀를 써넣었다.

“너의 모양은 조그마하고 너의 말은 크게 분별이 없구나.

너는 구덩이 속에 처박아두어야 마땅하다.”

인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말이었다. 처절한 자기성찰의 글귀였다.

이 글귀 밑에는 ‘청한(淸寒)’이라는, 또 하나의 자기 호를 새긴 도장을 찍어두었다.

 

삼성각과 청정당

그의 나이 쉰아홉 되던 해, 봄날인 3월, 조용히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지 말고 임시로 관을 절 옆에 두어라.”

제자들은 유언대로 그의 관을 절 옆에 그대로 조용히 모셔두었다.

3년 뒤에 장사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스님들이 놀라 모두 성불했다고 말했다. 불교의식대로 다비를 했더니

사리가 나와서 그 사리를 담아 무량사에 부도를 만들어 안치했다. (이이의 김시습전)

김시습은 여기 어디쯤에서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명부전
범종각
당간지주(충남 유형문화제 제57호)
아름다운 무량사를 둘러보고 다시 일주문(나올때는 광명문)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