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선생은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킨 조선의 유학자로,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퇴도,
도수이며 1548년 단양군수, 풍기군수를 지내다가 이듬해
병을 얻어 안동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공부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으며,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 수양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사잠, 논어집주, 주역등을
진강했으며 성학십도를 저술해 바쳤으며, 이듬해인 1570년
낙향했다가 병이 깊어져 음력 12월,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한것은 49세때이며 이때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이즈음 이황은 정실부인에 이어 두 번째 부인과도 두해전에 사별한 뒤
홀아비생활을 하고있었는데, 부임 1개월 만에 둘째 아들 채(寀)마저 잃었다.
이렇게 외롭고 마음 아파하던때에, 단양의 관기로 있던 두향은
어린 나이지만 매화를 기르는데 뛰어나고 거문고도 잘 탔으며
게다가 시도 잘 지어 이황에게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이황은 대학자이자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으며, 특히 매화를 매우
사랑했고, 또 금보가(琴譜歌)를 쓰기도 할 만큼 음률에도 밝았는데
많은 것을 두루 갖춘 두향의 매력에 점점 빠져 들어갔다.
이황은 비록 곧은 성품이었지만 두향과 더불어
시화(詩畵)와 음률(音律)을 논하게 되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 달그림자
이황(李滉, 1501~1570)
뜰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 (보섭중정월진인 / 步躡中庭月趁人)
매화 언저리 몇 번이나 돌았던고 (매변행교기회순 / 梅邊行趫幾回巡)
밤 깊도록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 (야심좌구혼망기 / 夜深坐久渾忘起)
꽃 내음 옷에 가득 달그림자 몸에 흠뻑 (향만의건영만신 / 香滿衣巾影滿身)
때마침 이른 봄이라 두향(杜香)은 애지중지하던 분매(盆梅)에
매화꽃이 곱게피어 퇴계 이황선생의 처소에 옮겨 놓으니,
이를 본 퇴계 이황은 은은하게 풍기는 매화향에 반기는듯 했으나
곧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줄것을 명한다.
이에 두향은 퇴계 이황선생이 6년전에 지은 매화시를 읊으며 아뢰길,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가 없고,
추운때에 아름답게 꽃을 피우며,
운치와 향기가 호젓하여 격조와 기품이 있으며,
비록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 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려도 곧은 마음이 변치 않기에 곁에 두시고
심신의 안정을 찾아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주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퇴계 이황선생은 두향의 간청을 더 이상 물리치지 못하고
두향으로 부터 받은 청매를 동헌의 뜰에 심게되었다.
당시 두향이 선물한 매화나무를 보고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황의 시다.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 / 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 걸렸구나 / 梅梢月上正團團
구태여 소슬바람 다시 불러 무엇하리 / 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뜰에 가득한데 / 自有淸香滿院間
또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 전신응시명월(前身應是明月)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 기생수도매화(幾生修到梅花)
단양은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상· 중· 하선암, 구담봉, 옥순봉 등 단양팔경을
비롯해 기암괴석과 옥류계곡이 곳곳에 널려있는 산수가 빼어난 아름다운 곳이다.
이황은 두향과 함께 사인암등 절경들을 둘러보면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 단양팔경은 이황이 당시 두향과 같이 다니면서
직접 이름을 정해 붙이며 선정한 것이라 전한다.
단양팔경 중 옥순봉과 관련해 두향이 기지를 발휘한 일화가 전한다.
옥순봉 근처에서 태어나 자란 두향은 옥순봉이 단양 땅이 아니라
청풍 땅임을 아는지라, 이황에게 옥순봉의 관할이 청풍임을 알리면서
청풍군수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면
단양 땅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당시 청풍군수는 아계(鵝溪)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이었다.
이황은 두향의 말에 따라 청풍군수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한 결과,
옥순봉은 단양군 관할로 바뀌고 단양팔경에 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이황은 옥순봉 아래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자신의 글씨를 새기게 해 단양의 관문임을 표시했다.
이 단구동문 암각은 안타깝게도 충주호를 건설하면서 물속에 잠겨있다.
이황과 두향은 특히 남한강가에 있는 강선대(降仙臺) 바위에 올라
종종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는데,
이런 꿈같은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고 가을이 미처 다 가기도 전인 10월,
두 사람이 만난지 불과 9개월 만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서 이별하게 되었다.
이 발령은 이황의 형인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오게 되면서
형제가 같은 지역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른 것이었다.
퇴계와 두향이 이별을 앞둔 마지막날 밤,
퇴계는 두향의 치마폭에 시를 써준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生別常惻惻)
"내일이면 떠난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이에 두향은 말 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 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황과 헤어진 두향은 관기의 신분에서 물러났다.
이황을 향한 마음을 순수하게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봄, 강선대(降仙臺)가 내려다 보이는 기슭에
작은 초막을 마련한 뒤 이황을 생각하며 홀로 살았다.
노년에 퇴계선생은 안동의 도산서당에 머물었는데,
단양을 떠날 때 두향이가 준 청매를 이곳에 심었으며,
서원 입구에 절우사(節友社)란 화단을 꾸며
정자를 짓고 매화,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어 즐겼다 한다.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일수정매설만지/一樹庭梅雪滿枝)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풍진호해몽차지/風塵湖海夢差池)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옥당좌대춘소월/玉堂坐對春宵月)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홍안성중유소사/鴻雁聲中有所思)
또한 두향이 매화를 도산으로 보내면서 치마폭을 함께 보냈는데
그 치마폭에 다음과 같이 단시를 써주었다.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相看一笑天應許)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有待不來春欲去)
이 시는 단양을 떠나올 때 써준 시와 합하면 전구와 결구가 완결된다.
퇴계 이황이 1552년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는데
이해에 두향을 그리워하며 상사별곡이라는 시를 지어 보낸다
상사별곡
옛날 책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黃券中間對聖賢)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아 있노라 (虛明一室坐超然)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다시 보니 (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하지 않으리 (莫向瑤琴嘆絶絃)
비록 두향을 가까이 둘 수 없으나 매화를 보며
두향을 생각한 퇴계선생의 속 마음을 엿 볼 수 있는시다.
이황은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귀향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570년 음력 12월 8일 아침에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했다.
이황의 제자 이덕홍은 스승의 임종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초여드렛날 아침, 선생은 일어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후가 되자 맑은 날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흰 눈이 수북이 내렸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일으켜 앉히자 선생은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곧 구름이 걷히고 눈도 그쳤다.
두향은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작은 초막을 마련한 뒤
그곳에서 21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어느날, 이황의 부음을 듣는다.
두향은 부음을 듣자 바로 초당을 나서서 안동 도산서당으로 갔었지만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시절인지라, 문상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애도를 한 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강선대 위 초막으로 돌아온 두향은 빈소를 차리고 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3년상이 끝나던 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황의 뒤를 따른 것이다.
강선대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고도 하고, 부자차를 끓여 마시고
죽었다고도 전해지며, 유언은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강선대 아래에 있던 두향의 무덤은 1984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인근 마을 유지들이 의견을 모아 원래 무덤에서
200m쯤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 무덤은 해마다 두향제를 지내는 충주호 장회나루 휴게소에서
건너다보면 작게나마 보이는데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강선대는
충주호의 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 한다.
두향이 세상을 떠난 후 200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조선시대의 시인 이광려(1720~1783)가 두향의 무덤을 찾아 시를 읊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있고(孤墳臨官道)
버려진 모래밭엔 붉은 꽃 피어있네(頹沙暎紅)
두향의 이름 잊혀질 때(杜香名盡時)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仙臺石應落)
조선 후기 문신인 수촌(水村) 임방(1640~1724)이 남긴 시도 있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 일점고분시두향(一點孤墳是杜香)
강 언덕의 강선대 아래에 있네 / 강선대하초강두(降仙臺下楚江頭)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 방혼상득풍류가(芳魂償得風流價)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 절승진랑장호구(絶勝眞娘葬虎丘)
노산(蘆山)
이은상(李殷相)은 1966년 기행문 "가을을 안고" 에서
다음 시를 지어 두향의 넋을 기렸다.
두향아 어린 여인아 박명하다 원망치마라
네 고향 네 놀던 터에 조용히 묻혔구나
지난날 애국투사 못돌아 온 이가 얼만데
강선대 노는 이들 네 무덤 찾아내면
술잔도 기울이고 꽃송이도 바친다기에
오늘은 가을 나그네 시 한 수 주고 간다
산사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 산사모종(山寺暮鐘)
퇴계 이황
저녁 무렵 절간은 푸른 봉우리에 숨었는데 / 박모선거은취봉(薄暮禪居隱翠峯)
있는 듯 없는 듯 종소리가 들려오누나 / 종성내자유무중(鐘聲來自有無中)
솜씨좋은 화공이여 저녁 풍경 그리려건만 / 천공욕화연종경(倩工欲畫烟鐘景)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를 어찌 하려는고 / 기내성성입태공(其奈聲聲入太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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