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서원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아래 있는 서원으로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으며,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이다.
이 서원은 1561년(명종 16)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건립한것이 시초이다.
이후 임진왜란때에 소실되었던 것을 1600년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옛 터에 초사(草舍)를 다시 지어 전란을 피해 보존된 위패를 모셨다,
1602년 부윤 이시언(李時彦)이 사당 중건을 시작하였고, 1610년 강당과
동재, 서재,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새로 지었다.
1623년 조정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646년 부윤 이민환이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였고, 이후 수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정은 경주의 옛 신라 때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특히 통일 사업의 큰 공훈이 있는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과 각간(角干) 김유신에 대해서는
그 무덤을 수리하는것뿐 아니라 이들을 받드는 사당을 세우고자,
자신의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까지 세울 필요는 없으며 각간(김유신)에 대해서만 사당을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퇴계의 의견을 따라 이정은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되었는데, 이것이 서악정사(西岳精舍)이다.
이후 경주 유생들에 의해 홍유후 설총(薛聰)과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의 위패(位牌)도
합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이정은 다시 이퇴계와 의논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퇴계가 서악정사라는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외삼문(도동문)의 현판 글씨는 사액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에 우뚝서있는 영귀루
시습당(강당)은 서재, 동재와 대칭으로 된 평면을 하고 있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첫머리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悅呼)에서 따온 것이다.
대청에는 여러개의 현액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만력 경술(1610년) 가을 문소후인 김득질이 찬한다
(萬曆庚戌秋聞韶後人金得秩撰)이라 적은 것으로
서악서원을 중수할 때의 상량문이고, 나머지는 중수기등이다.
연대 순서대로 「상지 10년 계유(1873년) 가을 8월 상한에
부윤 이만운이 찬한다(上之十年癸酉秩八月上澣府尹李晩運撰)」,
숭정 기원후5 임오(1882년) 6월 하완에 여강 이능정이 기록하다
(崇禎紀元後五壬午流月下浣驪江李能政記)
상지 29년 임진(1892년) 12월 일에 부윤인 원장 민영수가 찬한다
(上之二十九年壬辰十二月日府尹院長閔泳壽撰)
사우(祠宇)는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하나로 제향을 위한 곳
서악서원을 창건한 경주부윤(慶州府尹) 구암 이정(李楨)을 기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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