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호계서원은 1575년(선조 8) 퇴계선생이 젊었을 때 독서를 하던
안동 동북쪽 월곡 여산촌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고,
문순공(文純公) 퇴계 이황선생(退陶李先生)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여강서원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고,
1606년 북쪽으로 100보를 옮긴 위치에 중창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김성일(金誠一)과 유성룡(柳成龍)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676년(숙종 2)에 호계(虎溪)서원으로 사액(賜額)되면서 명칭도 바뀌었다.
그뒤 이황은 도산서원, 김성일은 임천서원, 유성룡은 병산서원에 주향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다가 7년 뒤 강당만 새로 지은 채 남겨졌었다.
1973년 안동 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자 임하댐 아래 임하리로 이건됐었다.
임하리는 임하댐하류로, 습기가 많아 건물훼손이 우려되자
지역 유림 등에서 이건과 복원을 요청해 왔었는데,
경상북도에서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원을 들여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상단에 이건 및 복원을 추진해, 2019년 말 복설했다.
이건 및 중건된 호계서원은 1만㎡의 부지에 총 93칸, 13동의 서원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여강서원 건립 당시와 같은 규모이다.
여강서원 건립 때는 퇴계선생을 봉향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서원의 규모도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대표서원이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사당인 존도사(尊道祠)가 6칸, 신문(神門) 3칸,
신주(神廚) 5칸, 강당인 숭교당(崇敎堂)이 15칸, 동재인 구인재(求仁齋) 4칸,
서재인 명의재(明義齋) 4칸, 진학문(進學門) 1칸, 동몽재(童蒙齋) 15칸,
유사방(有司房) 5칸, 재주(齋廚) 15칸, 보상고(寶上庫) 15칸 등92칸이나 되었다.
또 동협실을 사성재(思誠齋), 서협실을 주경재(主敬齋)라 하였다.
그리고 이 호계서원은 ‘병호시비’라는 영남유림 간 오랜 갈등의 징표였었는데
이는 퇴계 선생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위패의 서열, 즉 누구를 상위인 좌측에 봉안하느냐의 문제로 양문파간의
다툼인데, 이런 좌.우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생한 3차례의 시비를 말한다.
이번 복설을 하면서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좌)에, 김성일을 서쪽(우)에,
그 옆에 김성일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합의하면서 오랜 갈등도 해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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