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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함안 무기연당과 주씨고가

by 안천 조각환 2020. 11. 28.

함안 무기연당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1길에 있으며

주재성의 생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08호이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로,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산의 모양을 본떠 놓았다.

 

이후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이라 하고 호를 삼았으며,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였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풍욕루(風浴樓)와 하환정(何換亭)을 지었고,

최근에 충효사(忠孝祠)를 지었다.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다.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정원문화(庭園文化) 연구에 좋은 자료이기도 한 이곳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무기연당의 구조와 형태는 직사각형으로 그 한가운데 당주(當洲)가 있는데

봉래산(蓬萊山)을 연상시키는 가산(假山)이다.

연당 북쪽에는 하환정(何換亭)과 풍욕루(風浴樓)를 지었다.

연당 서쪽에는 영귀문(詠歸門)이라는 일각문이 있고

서쪽에는 1745년에 건립된 충효사(忠孝祠)가 자리잡고 있다.

연당 주위의 담 서쪽은 1700년대에 지어진 함안 무기리

주씨고가(경남민속자료 10)로서 감은재(感恩齋)·영정각(影幀閣) 등이 있다.

감은재는 국담의 장남인 주도복(周道復)의 서실로서

국담문집책판(菊潭文集冊板:경남유형문화재 242)이 보관되어 있다.

 

연당 왼쪽이 영귀문, 마주 보이는 건물이 하환정, 소나무 뒤는 풍욕루이다
영정각
충효사
굽은 소나무와 하환정
풍욕루

풍욕루는 "바람에 몸을 씻는다" 라는 의미라고 한다

 

중앙의 공경할 경(敬)자는 "선비의 올바른 몸가짐과 학문의 목표를 말해준다" 라고

하는데 아마도 선대인 주세붕선생의 경자를 이어 받은듯 하다

 

풍욕루 마루
풍욕루앞 굽은 향나무

 

풍욕루 전경
연못 남쪽 오른쪽 건물이 영정각. 왼쪽은 충효사이다
11월에 활짝피운 쪽동백꽃

 

하환정(何換亭) 전경

이 하환정은 조정에서 반란을 평정한 공로가 있는 주재성에게 벼슬을 내리자

자연과 더불어사는 삶을 어찌 벼슬과 바꾸겠는가? 라고 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무기리 주씨고가 사랑채

무기리 주씨고가는 무기연당과 영귀문을 사이에 둔 고가로

이 건물은 조선 영조 때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이 지은 이후

주씨문중의 종가로 내려 왔으며 18세기경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10호이다. 

이 주택은 대문과 중문, 사랑채로서의 감은재(感恩齋), 살림채로서의 안채

사당으로서의 부조묘(不祧廟)를 갖춘 종가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이 집에 부속된 별당인 무기연당의 하환정(何換亭)·풍속루(風俗樓)

·국담(菊潭) 등을 갖추고 있다.

 

연당 출입문

살림채 뒷편에 있는 부조묘(不祧廟)는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주재성의 기제사(忌祭祀)를 영구히 받들라는 왕령에 따라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랑채인 감은재는 주도복(周道復)의 서실로서 이곳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국담문집판각과 영종대왕 복상도가 보관되어 있다.

또 주재성의 창의에 대한 공훈으로 내려진 충신정려와

아들 주도복의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1859년(철종 10) 내린

효자정려가 함께 있어 충효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이라고 일컫는다.

 

주씨고가 대문

주재성(周宰成, 1681~1743)은 조선 영조때의 학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주세붕(周世鵬)의 방손으로, 주각(周珏)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 관찰사 황선(黃璿)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다.

또한, 그 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하여 가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어놓았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훈고(訓詁)에 전심하였으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조정에 주재성을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쪽동백나무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