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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서울,경기.강원권

여주 봉미산 신륵사

by 안천 조각환 2022. 4. 8.

한강 강천보를 둘러보고 인근의 유서깊은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찾았다.

신륵사는 여주시 북내면 봉미산(鳳尾山) 지락,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사찰로

삼국시대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에 있는

다층전탑이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신륵사 강월헌(江月軒)

 

신륵사가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인데,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 일주문

 

1382년에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을 건립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는데, 대장경 불사(佛事)는 이색이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이때 전국적으로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으며,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

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나, 1469년 영릉(英陵,세종대왕 능)이

여주로 이장된 후,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에는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으며, 그 이듬해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이 후 여러번의 중건과 중수를 하였다.

 

불이문

 

신륵사에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의 영정 봉안)과

보물 제225호인 대리석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

(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의 석등, 

보물 제1791호인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이 있다.

 

이외에도 1800년에 완공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인 극락보전,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고, 나옹의 친필이라고 전해지는

극락보전 정문 위의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쓴 현판이 있다, 

 

또한 나옹선사의 화장지인 동쪽 강변 바위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과

그 옆에는 강월헌(江月軒) 이라는 6각 정자가 있는데,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로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과 1749년, 1860년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며, 그 외에도 적묵당, 심검당, 봉향각, 칠성각,

의 삼층석탑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있는 사찰이다.

 

고운 앵두꽃 봉오리

 

남한강변의 개나리꽃

 

나옹선사의 화장지로 알려진 삼층석탑과 강월헌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선사의 당호이다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였던 장소로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구룡루(九龍樓)

 

구룡루는 원효대사가 지금의 절터인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자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는 창건설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구룡루 측면

 

은행나무

 

신륵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600여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나무중간의 부러진 줄기가 관세음보살을 닮아 소원을 비는 은행나무가 되었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높이 940cm로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이 탑의 수리비에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

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神勒寺大藏閣記碑, 보물 제 230호)

 

대장각기비 비문(보물 제230호)

 

이 비는 1383년(우왕 9)에 건립하였으며, 높이는 1.33m이다.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 즉 대장경을 인출(印出) 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이 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權鑄)가 정간선을 긋고 자경 2㎝의 해서로 썼다.

 

판돈녕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

 

극락보전앞 향나무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극락보전앞에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여러층의 탑신을 쌓아올렸는데,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는 각 부재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현재 8층의 옥개석 위에는 작아진 옥개석과

옥신석이 1개씩 남아 있어 더 많은 층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극락보전 앞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 보물 제180호)

 

조사당앞 향나무(보호수, 수령 600년이상) 

 

범종각

 

은행나무(수령 600년 이상)

 

수조

 

신륵사를 모두 둘러보고 다시 불이문을 돌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