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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광주.전라권

정감록의 십승지~5)무주 무풍동(무풍면 철목마을) 일원

by 안천 조각환 2022. 9. 7.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적인 장소에서 살기를 원하며 생각하고 꿈꾼다.

이러한 생각은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속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천국과 에덴동산, 도교의 무릉도원, 삼신산, 청학동,

서양의 샹그릴라, 길지(吉地), 낙토(樂土),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

모두 사후나 현실에서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들로 그 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는 말이다.

 

동쪽으로 대덕산이 보이는 무주 무풍면 철목마을

 

승지(勝地)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지만,

조선 중․후기에는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를 뜻하였다.

특히 정감록에서는 십여장소를 골라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표현하였으며,

 당시에는 정감록을 믿고 십승지를 찾아 나서거나 실제 피난, 보신(保身)의 삶을 일구어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후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다.

 

철목마을의 무풍승지 샹그릴라 (레스토랑)

 

오늘(2022.9.6)은 새벽에 태풍 힌남노가 막 지나가고 난 뒤라 물은 많지만

하늘이 너무 맑아 정감록의 십승지중 하나인 무주 무풍동 일원을 찾아 나선다.

 

백두대간 줄기인 철목마을 동쪽의 대덕산

 

철목마을의 무풍승지 방문자센터

 

체험시설

 

무풍 신선길 9부능선쯤에 사선암이 있다

 

사선암 가는길의 꿀풀

 

사선암 가는길 안내판

 

2km정도 왔는데 여기서 사선암까지 아직 1.2km 가 남았고, 새벽의 태풍 힌남노가

몰고온 폭우로 계곡물이 넘쳐 건너가는것을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되돌아 온다

 

폭포로 변해버린 계곡

 

철목마을의 사과밭

 

철목마을 죽림서원

 

 

 

보호수인 수령 350여년의 느티나무 세그루

 

인근 현내리의 백산서원 전경

 

무풍면 현내리에 있는 백산서원은 1821년(순조 21) 하연(河演)과 부인 성산이씨의

영정을 봉안하는 사우를 건립한 후 타진사(妥眞祠)라고 명명하였디.

그 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5년 복원되고

하위국(河衛國)을 추가배향하였으며, 무주 안성면 죽계서원(竹溪書院)에서 훼철된

하징도(河徵道)·하정도(河呈道)·하형도(河亨道)·하현도(河顯道) 등 4현(四賢)의 위패를 봉안하고자

백산사(柏山祠)를 창건하고 구액(舊額) 백산서원을 게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산서원 건물과 사당

 

타진사(사당)에는 하연 부부의 위패와 영정이 주벽으로, 동벽에는 하위국의 위패가

백산사(사당)에는 하징도·하정도·하형도·하현도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백산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0호, 하연 부부의 영정은 동 유형문화재 제81호이다.

 

하연(河演,1376~1453)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이며

성리학 전파에 앞장서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조선 초기 유학자이다.

 

하씨 사형제유허비(河氏 四兄第遺墟碑)

 

문종 대에 이르러 정승의 반열에 올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평생 조정에 복무하면서 세종을 보필했으며 안평대군이나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1451년(문종 1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하연은 1453년에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인천 소래산 묻혔으며, 이듬해인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현내리 앞 들판

 

백산서원앞 회나무 세그루

 

오래된 회나무둘레 이끼와 돈나물

 

돌아오는길 장전폭포 

 

새벽의 힌남노 폭우로 세찬 물줄기가 내려치고

그 물보라가 너무 강해 가까이 접근도 못하는데도 잠시 렌즈에 물방울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