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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광주.전라권

정감록의 십승지를 찾아서~4)부안 감불산 굴바위(호암)일원

by 안천 조각환 2022. 8. 23.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하나로 꼽은 변산의 호암 즉 굴바위 일원을 찾았다.

부안 보안면 우동리에서 서북쪽으로 우동제(저수지)를 따라 가다 왼쪽에 굴바위가 있다.

굴바위 입구가 호리병 모양 같이 생겼다하여 호암이라고도 하며 도적굴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선생이 은거한 곳이기도 하다. 

계곡입구에 대불사가 있으며 사찰옆 등산로를 따라 5분정도면 닿을수 있다.

 

굴바위(호암 또는 도적굴)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 천연적으로 뚫린 굴의 높이는 8m, 깊이는 30m 쯤 된다.

굴 안쪽에는 사람이 웅크린 듯한 모습의 움푹 파인곳이 있는데,

혹자는 여인의 자궁을 연상하게 하는 형태라고도 한다.

그리고 바위바닥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물 흐르는 소리와 파도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굴의 깊이가 얼마나 긴지 알수없어 여기에서 불을 지피면

그 연기가 열흘 후 80리 떨어진 변산해수욕장 해창으로 나온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계폭포(仙界瀑布)와 바위절벽

 

바로 인근의 남대봉기슭에는 비가오면 바위절벽 위의 선계사 절터애서

60m 높이의 폭포수가 쏟아지는데 이를 선계(仙界)폭포라 한다.

또한 이성계가 성계골에 머물며 수련을 했다하여 성계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1608년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이곳 어딘가에 있던

정사암(靜思庵)을 고쳐짓고 살면서 유명한 홍길동전을 집필하였다.

암벽위의 세계는 속세를 떠나 신선들이 사는곳이라고 선계라 하였음직 하다.

 

등산로옆 대불사 샘터

 

저수지 아래 우반동에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선생이 

1653년부터 은거하면서 오랜세월에 걸쳐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을 완성한 곳이다.

이곳 반계선생유적지에는 반계서당과 우물 정자 등이 남아있다.

또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허생전도 이곳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등산로는 왼쪽으로, 굴바위는 다리건너 오른쪽으로

 

대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굴바위

 

굴바위 입구

 

굴바위 안쪽

 

여기에서 불을때면 연기가 변산해수욕장 해안으로 나올지도 궁금하다

 

굴 안쪽에서보는 바깥풍경

 

굴바위 바깥의 담쟁이덩굴

 

감불산 굴바위(호암)

 

굴바위 입구의 대불사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선생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덕부(德夫)이다.

서울 정릉(貞陵)에서 태어난 유형원은 1653년(효종 4)에 조부 유성민(柳成民)을 따라

부안현 남쪽 기슭 우반동으로 옮기고 이곳 지명을 따서 아호를 반계(磻溪)라 하였다.

 

우동리 반계서당

 

예전에는 우반동(愚磻洞) 또는 반계라 불리던 보안면 우동리의 반계선생유적지 일대에는

반계정(磻溪亭)과 반계서당(磻溪書堂), 그리고 유형원이 팠다고 전해오는 우물도 있다.

반계선생은 이곳에 은거하며 평생 학문 연구에 힘을 쏟아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하였다.

반계수록은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실사구시의 주장을 펴서

정약용 등 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반계 유형원선생 시(1653년)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리지 않고 날지 않으니  /  저들과 어울려 함께하며 살아야겠네.

 

대구 둔산동 옻골 경주최씨 집성촌 백불고택

 

1770년 영조임금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에게 왕명을 내려 반계수록을 교정하게 하였다.

최흥원은 자택에서 최초로 교정본을 완성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대구 둔산동 옻골 경주최씨 백불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