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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국가지정 민속문화재가 된 상주 수암종택

by 안천 조각환 2022. 9. 22.

상주 수암종택(尙州 修巖宗宅)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을 불천위로 모시는 풍산유씨 우천파(愚川派) 종택이다. 

상주 중동면에 있는 이곳은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맥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2022년 8월 22일 문화재청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수암종택 전경

 

류진(柳袗, 1582∼1635)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인조 1)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고,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으며, 1634년 지평을 역임하였다.

중년부터 상주(尙州) 시리(柴里)에 우거했는데, 매번 관직을 마치고 돌아오면

둥글게 친 담장이 적막하고 전죽(饘粥)도 연명하지 못했지만,

선생은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분수를 따라서 만족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했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안채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 건물로 경북 북부지방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안채 대청 우측 마루방의 지면을 들어 올려

누마루처럼 꾸민 점은 다른 고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안채 대청 

 

또한 안채 대청 상량묵서에 건립연대(1858년)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등

조선시대 중ㆍ후기 상주지역 상류주택에서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비교적 원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하게된 사유이다.

 

녹사청

 

본채 앞의 ㄱ자형 녹사청은 수암 류진의 7대손인 류후조(柳厚祚, 1798∼1876)가

봉조하(奉朝賀)를 제수받은 후,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들을 맞이하거나

묵게하는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이러한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희소한 사례이다.

봉조하(奉朝賀)란 70세 내외 2품관 이상의 퇴직관료에게 특별히 내린 벼슬로

 봉조하 제수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는 인물은 68명이다.

 

본채와 연결된 사랑채

 

류후조(柳厚祚)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류성룡(柳成龍)의 8대손으로

철종 9년(1858) 6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67세에 공조판서,

70세에 좌의정이 되는 늦은 환로(宦路)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이른다.

그가 79세에 죽자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강정사의 이강이란 낙동강과 위천을 일컬음 이리라 

 

야사에 의하면 파락호(몰락한 세도 집안의 자제)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한때

수암 종택에 머물면서 영남지역 인물들을 파악하며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종가에서 전해오는 죽병(대나무 병풍)이 당시 흥선대원군이 그려준 것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집권 후 남인계 중용책에 따라 류후조는 1864년(고종 1년) 이조참판,

1866년 우의정, 1867년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안채 마당 동편

 

또한 상주 수암 종택에는 류후조와 관련한 재밌는 일화가 전해오는데,

녹봉이 떨어졌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백비탕(白沸湯)을

놋그릇에 담아 정성껏 대접하여 손님에 대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이는 류후조가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절조를 지켜 청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다.

 

안채 마당 서면

 

그리고 이러한 기상은 후손에게 이어져 류진의 11대손 류우국(柳佑國, 1895~1928)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고,

1923년 조선의열단에서 김지섭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북경에서 혁명도보, 혈조와 같은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였다.

1926년 독립운동 자금 조달 차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급병으로 요절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장독대와 창고

 

사당출입문

 

 사당 앞 신문(神門)은 사주문(四柱門)이다. 사당은 단청하지 않았다.

 

사당

 

사당내부 (1)

 

불천위 신주는 별도로 봉안하고 있는듯 보이지 않는다

 

사당내부 (2)

 

사당 뒤에서

 

안채 뒤

 

큰 바위앞에 안채건물이 지어섰다.

 

본채 측면

 

대문채

 

오랜세월 같이 했을 멧돌

 

골목입구의 수암종택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