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 김천문중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매계문학관 건립 추진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대해 먼저 환영과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매계문학관 건립을 위해 앞장서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종친관계자 여러분과
김천시 등 관계기관 관계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창녕조씨 김천 입향조이신 참의공파 전 후손들과 특히 건립추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있는 문장공파(매계) 임원진은 물론 우리 후손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솔선하여 적극적인 후원과 참여가 있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이다.
매계 조위선생 영정
매계문학관 건립 추진 경위를 살펴보면
매계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매계백일장이 이미 43회나 개최하였으며
매계문학상과 매계학술발표회도 코로나로 인한 미개최기간을 제외하고도 6회를 넘어섰다.
진작에 서둘러 추진되었어야 할 문학관이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지난 2022년 하반기부터 각계로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우리 문장공파에서는 지난 2023. 2. 4일 정기종회시에 정식 의제로 거론하기에 이르렀고
전원 찬성의사를 표함과 동시에, 문중 자체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하여 즉석에서 자체 종중 추진위원을 추천 선정한바있다.
매계구거(매계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옛집으로, 문화재자료 제541호,2008.9.18 지정)
이 자리에서 1)매계문학관 건립 위치는 김천 봉계 율수재(매계구거)앞
구 매하당 일원으로 하고, 2)예산은 국,도,시비를 최대한 확보 추진하기로 하며,
3)이를 추진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토록한다.
단 추진위원은 지역의 공감대 형성과 원만한 업무처리를 위하여, 지역 국회의원,
도.시 지방의원, 학계, 향토역사계, 문화계, 관계기관 관계자 등과 종원 일부를 포함한다.
4)추진위원회의 기본적인 사무처리를 위하여 우선 종중(우졸당)에서 최소한의
필요경비를 지원하고, 필요시 각 지파 종중 또는 종원들의 후원을 받도록 한다.
2022년 9월 7일 제6회 매계문학상 시상식과 학술발표회,
제43회 매계 백일장 개최 현수막(율수재 앞)
지난 2023. 2. 24일 종중 자체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개최하여
1)정기종회 때 거론되었던 필요경비 지원을 확정하고
2)공식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 초빙 대상을 논의 하였으며,
3)이 자리에는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이 직접 참석하여 행정적인 절차등을 설명하였다.
4)금년도 예산에 최소한 기본계획 용역비 정도라도 반영하기 위해서는
추진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하여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배롱나무꽃이 피는 녹음속의 매계구거(梅溪舊居)
이후 관련자들이 협의한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명단(안) 인데
이 외에 우리 종원이나 외부인사 중에서도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에 도움을 줄 수있는
저명인사들을 추천하거나 직접 희망하여 도움을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명단(안)
성 명 | 소 속 | 직 위 | 비 고 |
송언석 | 대한민국 국회 | 국회의원 | 고문 |
이명기 | 김천시의회 | 의장 | 고문 |
이신화 | 김천예고 | 설립자 | 고문 |
박선하 | 경상북도의회 | 도의원 | 고문 |
최병근 | 경상북도의회 | 도의원 | 고문 |
이우청 | 경상북도의회 | 도의원 | 고문 |
조용진 | 경상북도의회 | 도의원 | 고문 |
이기양 | 김천문화원 | 원장 | 위원장 |
이광준 | 김산향교 | 전교 | 위원 |
정 택 | 개령향교 | 전교 | 위원 |
박정주 | 지례향교 | 전교 | 위원 |
이동재 | 공주대학교 | 사범대학 학장 | 위원 |
남권희 | 경북대힉교 | 전 문헌정보학과 교수 | 위원 |
김용만 | 경상북도 | 문화재위원 | 위원 |
권숙월 | 경북문인협회 | 전 회장 | 위원 |
이부화 | 김천초등학교 | 전 교장 | 위원 |
이갑희 | 김천향토사연구회 | 회장 | 위원 |
조창현 | 경상북도 | 전 문화관광체육국장 | 위원 |
조승모 | 창녕조씨문장공파대종회 | 회장 | 위원 |
조지환 | 창녕조씨문장공파대종회 | 총무 | 위원 |
조상환 | 나화랑생가보존회 | 회원 | 위원 |
송기동 | 김천문화원 | 사무국장 | 간사 |
뒤편에서 본 매계구거(梅溪舊居)
매계(梅溪) 조위선생(曺偉先生)은 1454년 7월 10일 김천 봉산면 인의동(봉계리)
극락산 동편기슭 율수재(구거)에서 태어 났으며, 어릴때의 이름은 오룡(五龍)이었다.
선생은 타고 난 자품이 탁월하여 이미 7살에 시를 지어 주위에서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대가 컸으며 어린 시절부터 자형인 김종직에게 학문을 사사받았고, 당숙인
충간공 조석문(曺錫文)에게서 소학을 전수받고 학문하는 방법과 경세의 도를 배웠다.
매계 조위선생 영정
선생이 18세가 되던 1471년 8월, 생원(生員), 진사(進士) 초시(初試)를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이듬해 정월, 사마시(司馬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였고, 147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제수 받았으며,
1481년(성종 12)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어 왕명으로 중국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한글로 번역하는 두시언해(杜詩諺解) 사업에 참여하여 서문(序文)을 썼다.
순천 임청대
선생은 1493년(성종 24)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올랐고, 1494년 충청도 관찰사,
1495년 성균관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1498년 동지중추부사,경연특진관이 되었으며,
그 해 4월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8월 귀국길에 무오사화에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찬집한 죄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용만(지금의 의주)으로
유배되었다가, 1500년(연산군 6)에 전남 순천으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서문밖 옥천가에 임청대(臨淸臺)를 세우고 학문과 도덕을
강론하며 진솔회(眞率會)를 결성하여 이곳 선비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만분가(萬憤歌)
선생은 1477년(성종 8) 왕명으로 독서당기를 지었고, 1478년 채수,허침,성현 등과 함께
송도(개성)를 유람하며 공동 시문집인 유송도록(遊松都錄)을 편집하였으며,
1481년 왕명으로 두시언해를 완성하고, 1484년 함양군수 재직시 목민관의 자세와
처신을 강조한 금산동헌 중수기(金山東軒 重修記)를 지었으며, 1491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간사(印刊史)를 알 수있는 해인사 중수기를 지었다.
1493년 왕명으로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문집을 찬집하였고,
1500년 유배지 용만에서 일편단심 충정을 드러낸 규정기(葵亭記)를 지었고,
1501년 이배지 순천에서 한글로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가사인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학문과 강학의 여가에 문인들의 시평과
일화 등을 소개한 매계총화(梅溪叢話)를 지었다.
문장공 매계 조선생 휘 위 지묘(文莊公 梅溪 曺先生 諱 偉 之墓)
선생은 50세 되던해인 1503년 11월 26일 순천 배소에서 질병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문인으로서 학문과 경세에 관한 글과 많은 시문을 저술하였으나, 갑자사화 때
죄가 추가되어 부관참시를 당하고 가산이 적물되어 지은 시문이 모두 산실되었다.
매계선생 유고(건,곤, 乾,坤)
후에 동생 적암 조신(曺伸)이 일부를 수집하여 찬차(撰次,가려 뽑아서 차례를 정함)해서
집안에서 보관해오다, 선생이 신원(伸寃,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 버림)된 뒤,
1718년(무술년, 숙종 44) 금산군수(현 김천)였던 김무(金楙)가 저자의 후손 조세붕(曺世鵬)과
함께 본문 4권과 연보와 유사를 부록으로하여 5권 2책으로 목판본 매계집(梅溪集) 초판을
간행하고 그 판각을 직지사(直指寺)에다 두었었는데, 그 뒤 화재로 인해 불타 없어졌다.
매계집(梅溪集) 건,곤(乾,坤)
1928년(무진년,戊辰) 후손 조경승(曺璟承)·조병태(曺秉台)·조세우(曺世雨) 등이
경연일기(經筵日記), 사화록(士禍錄) 등에서 발췌한 것을 합해 다시 간행하였다.
권두(책머리)에 정호(鄭澔)·권상하(權尙夏)·김영한(金寗漢)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유(金楺)·김무·김재로(金在魯), 그리고 저자의 후손 조술(曺述)·
조임(曺霖)·조경승·조병태·조세영(曺世永) 등의 발문이 있다.
매계집(1988년 계명문화사 간행본)
이는 권1에 연보, 권2∼4에 시 353수, 권5에 시 26수, 서(書) 1편, 서(序) 5편, 기(記) 10편,
권6에 묘지명 1편, 묘표 2편, 소(疏)·전(箋) 각 1편, 잡저 3편, 권7에 계(啓)·의(議) 각 수 편,
권8∼10에 부록으로 사화실기(史禍實記)·행록(行錄)·호당록(湖堂錄)·잡지(雜識)·제문·
묘지명·묘표·행장·시장(諡狀)·신도비명·송계서원봉안문(松溪書院奉安文)·경렴서원상량문
(景濂書院上梁文)·경렴서원봉안문·청시소(請諡疏)·시연운(諡筵韻)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매계선생 친필 시
유선의 깃발과 부절이 하늘에서 내리니 儒仙旄節下靑冥(유선모절하청명)
멀리 해를 잡고 지극한 정성 의지하네. 遠搏扶桑仗至誠(원박부상장지성)
만리에 고생하니 해가 솟은 듯 하였고 萬里間關廓日出(만리간관확일출)
천년에 즈음하여 황하의 맑음을 만났네. 千年際會値河淸(천년제회치하청)
수심으로 병든 비를 보고 나르는 솔개 떨어지는 듯 하였고 愁看瘴雨飛鳶阽(수간장우비연점)
기쁨으로 바람만난 돛대보고 춤추는 새가 가볍게 나는 듯 하네. 喜見風帆舞鷁輕(희견풍범무익경)
이번에 고향을 버리는 듯 가신 본래 뜻은 此去桑弧聊素者(차거상호료소자)
남자로서 다만 공명 때문이 아닐 것이로다. 男兒不獨爲功名(남아부독위공명)
매계 조선생 문집 서
선생은 중종반정 직후인 1507년(중종 2) 신원(복원)되어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1709년(숙종 35) 순천 유생들의 상소로 문장(文莊)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았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선생은 두시를 언해하여 우리민족의 문화로
재정립하는데 이바지하였고, 선생이 유배지에서 지은 만분가는
국문학 사상 유배가사의 효시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이후 새로운 시문학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매계집(梅溪集)
~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조위의 한시와 산문 ~
공주대학교 이동재 교수 옮김
이 매계집은 한시로 되어있던 시문을 모두 한글로 번역한 후
원문도 동시에 게제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선생의 시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화류씨 묘지명 지석(墓誌銘 誌石)
이 묘지명 지석은 2001년 대항면 복전리에 있는 매계 조위선생의 어머니이신
정부인 문화류씨의 묘소 보수작업중 상석밑에서 발견된것이다.
1495년(연산군 원년) 문화류씨가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위가
어머니의 덕행을 후세에 전하기위해 묘지명(墓誌銘)을 직접 돌에 글씨를 써고
새긴 후 묘소 앞에 묻었던것으로 무려 505년만에 출토된 귀중한 자료이다.
묘지명 지석(墓誌銘 誌石)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되어있다.
국역 적암유고집
적암(適菴) 조신(曺伸,1454.8.15.~1529)은 매계 조위선생의 동생으로
자는 숙분(叔奮)이요, 호는 적암(適庵), 시호는 효강공(孝康公)이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7.10.~1503)는 조신(曺伸)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형이다.
적암 조신은 조계문(曺繼門)의 측실(첩)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조선시대는
적자(적실소생)와 서자(측실소생)의 차별이 엄중하여 서자로 태어나면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도 나가지 못하던 시대였으나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랐으며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 올라서도, 평생을 그림자처럼 함께하며 지냈다.
양천 허균(陽川 許筠)이 쓴 적암유고 서문
적암은 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하여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빼어난 문장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교 문서 전문가로 활동하였으며,
1479년(성종 10) 내시 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이후 신숙주의 수행원 등으로
네 차례의 일본 왕래와,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 수행도 일곱 차례나 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공적이 인정되어 정3품(당하관)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중종은 서출이자 역관출신인 조신(曺伸)에게 파격적으로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諡號)도 내렸다.
적암 조신선생 신도비 (율수재입구)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고 조위가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를 가게 되자, 조신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다가
1503년 11월 조위가 유배지인 순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김천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이후 매계의 가산 적몰로 지은 시가 산실(散失,흩어져 잃어 버림)되자
조신(曺伸)이 일부를 수집하여 보관해오다 훗날 매계집을 간행힐 수 있게 된것이다.
조신은 1529년(중종 24)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매계선생의 생애와
시문학은 조신을 빼 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공헌이 지대하다.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사적비 제막(2019.10.29)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단일 이름으로는 가장 많이 등재되어있고
전국 곳곳에 그의 흔적들이 남아있어, 매계문학관건립 자료는 차고 넘칠정도로 많다.
이번 매계문학관은 전국 그 어떤 문학관보다 규모가 짜임새있게 잘 건립되기를 기원하고
다시한번 종원은 물론 관계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응원이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후 지난 2023년 4월 5일 11시 드디어 매계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창립회의를 개최하고 본격적으로 문학관건립의 힘찬 발걸음을 내 디뎠다고 합니다.
창립회의 참석자 기념촬영 (조지환 우졸당종회장 제공)
매계문학관건립추진 창립회의 개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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