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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 묘비 505년만에 다시 일어서다

by 안천 조각환 2023. 8. 28.

1518년(중종 13) 신(申) 부인이 신(伸)에게 명하여 표석을 세우라고 하셨다.

매계(梅溪)공은 평생토록 자신을 낮추고 실력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것을 

스스로의 경계로 삼았는데,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먼 변방으로 내침을 당했으니 실로 나의 죄가 크다.

내가 죽거든 절대로 나의 행적을 선양하지 말고 다만 묘석(墓石)에

관위(官位)와 성명만 쓰라" 고 하였다.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 묘소(2023.8.25)

 

여기서 신(申)부인은 매계선생의 정부인(貞夫人) 평산신씨이고,

신(申) 부인의 명을 받은 신(伸)은 조위선생의 서(庶) 동생인 적암 조신(曺伸)선생이다.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임금은 연산군을 일컫는다.

  

1518년(중종 13) 적암 조신이 제작하여 세웠던 묘비 

 

1503년 별세후에도 죄인의 신분이되어 묘비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1507년(중종 2) 신원(복권)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1518) 묘비를 세우게 된것이다.

1713년(숙종 40) 문장(文莊)이란 시호가 내려지면서 기존의 묘비를 내리고

 1740년(영조 17,경신,庚申)에 묘비명을 문장공으로 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 울진공 묘소와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 묘소,

매계 선생묘소와 정부인 신씨 묘소 등 네분 산소의 묘역을

일제히 정비하면서 봉분도 키우고 묘비도 더 크게 제작하여 세웠다.

 

1518년에 제작했던 묘비를 다시 세우는 중(2023.7.31)

 

1518년에 신(申)씨 부인의 명으로 적암 조신이 세웠던 묘비는

문장공의 시호가 내리기 전의 묘비로, 한쪽 구석에 별도로 둠으로서

깨지고 부러지는 등 훼손이 심했으나, 제작연대가 명확하고 500년이 넘어

역사적 문화재적으로 보존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인정되어,

우졸당 종회장인 지환씨가 훼손부분을 최대한 복원하여 505년 만인

2023년 7월 31일 매계선생 묘역에 다시 세워 보존하게 되었다.

 

묘비(왼쪽 1740년, 중간 2001년, 오른쪽 1518년)

 

매계 조위선생은 1454년(단종2년) 7월 10일 금산(현 김천 봉산면)

봉계리 율수재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의 자는 오룡(五龍)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응교 등을 역임한 후 사헌부 장령, 도승지, 호조참판에 이른다.

 

1518년의 묘비를 다시 세우기전의 매계선생 묘소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김종직의 시문(詩文)을 찬집했으며,

1498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중국에 성절사가 되어 갔다가 귀국하던 중

무오사화가 발발하면서 김종직의 시문찬집 건에 연루되어 그 해 9월 9일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순천으로 이배되어 1503년 유배생활 중 병사하였다.

 

마암재(馬巖齋)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507년 신원(복권)되었다.

1713년 문장(文莊)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1518년 묘비를 세우게 되며,

사후 200여년이 지난 1718년에야  매계문집이 드디어 발간된다.

1747년 폐허가 되었던 매계 구거(옛집)자리에 율수재를 복원하였다.   

 

전.현(前.現) 묘비

 

(왼쪽) 1518년(중종~정덕,正德13) 묘비 " 가선대부 호조참판 성균대사성 조공지묘

(嘉善大夫 戶曹參判 成均大司成 曺公之墓)

 

(중간) 1740년(영조17,경신,庚申) 묘비 : 문장공 매계 조선생 휘 위지묘

(文莊公 梅溪 曺先生 諱 偉之墓)

*1713년 "문장(文莊)"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묘비와 묘비명을 바꾸어 새로 세움

 

(오른쪽) 2001년 묘비 : 묘역을 정비하면서 묘비명은 같으나 크게 만들어 세음

 

매계집(건.곤 2권)

 

매계선생은 수많은 시.학문과 도를 논한 글을 남겼으나, 애석하게도 그가 다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고 가산이 적몰당할 때 모두 일실되었다.

후에 서제인 조신(曺伸)이 산일(흩어지고 잃어버림)된 유문을 수잡.편차하여 간행하였는데,

이 본은 원본이 현존하지 않고 영본 1책(권1)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매계산생문집(의,예,지,신 4권)

 

그 후 초간본이 일실되어 전하지 않자 1718년(숙종 44년 무술년)에 

당시 금산군수(현 김천시장)로 있던 김무의 주선과 노력으로 조신이 엮은

원고를 바탕으로 저자의 5대손 조술(曺述.경매당)이 가장(집에 보관)해온

초본을 얻어 정호의 서문과 권상하의 발문을 책의 머리에 싣고, 김무 자신의 발문,

여기에 그의 형인 김유의 발문과 후손인 경매당 조술(曺述)의 발문을 더하여 간행하였다.

 

김천 봉계의 율수재(매계구거)

 

이곳은 매계 조위선생이 태어나고 어릴때 자란곳이나

이곳 역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고 가산이 적몰당했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507년 신원(복권)되고 나서야

1747년 후손들이 매계 구거(옛집)자리에 율수재를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