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은 조선 성종조에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로,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김숙자(金叔滋)이다.
각 가문마다 선조들의 묘사를 지내는 계절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예림서원과 인근의 생가와 묘역, 그리고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종택을 둘러본다.
1.예림서원
밀양 예림서원
예림서원은 1567년(명종 22) 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동면(현 산외) 자씨산(慈氏山) 아래에 덕성서원(德城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하였으며, 1634년(인조 12)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면서 서원 명칭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1680년(숙종 6) 밀양 부북면 후사포리로 다시 이건되어 지금에 이르런다.
예림서원(禮林書院) 전경
1669년(현종 10) 사액(賜額)서원이 되었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874년 강당을 복구하고, 1921년 향사(享祀)를 실시하였다.
1971년에 강당을 중수, 1974년에 육덕사(育德祠)와 정양문을 복원하고,
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완공하였다.
서원 정문인 독서루(讀書樓)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육덕사, 3칸의 강당(강당건물은 6칸),
각 3칸의 돈선재(敦善齋)와 직방재(直方齋), 2칸의 전사청(典祀廳),
몽양재(蒙養齋)·독서루(讀書樓)·삼문(三門)·고사(庫舍) 등이 있다.
안에서 보는 독서루
예림서원(禮林書院) 강당 건물
강당 건물의 편액들
예림서원 강당 마루
유생들이 강독을 하던 강당 마루
서원중에 이처럼 마루바닥이 반질반질하게 관리가 잘되고 있는곳은 아주 드물다
위 사진(동서재) : 왼쪽 돈선재(敦善齋), 오른쪽 직방재(直方齋)
아래사진 : 왼쪽 몽양재(蒙養齋), 오른쪽 열고각(閱古閣)
돈선재와 직방재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전사청은 향사(享祀: 제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열고각(閱古閣)은 서고(장서각)로 점필재 문집과 이준록 책판을 보관하고 있다.
매년 3월 상정(上丁: 첫 번째 丁日)과 9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며, 재산은 전답 5,500평, 대지 500평 등이 있다.
육덕사(育德祠)와 전사청 등
(위 왼쪽 : 사당의 출입문인 내삼문(정량문), 오른쪽 : 사당인 육덕사
아래 왼쪽 : 전사청)
묘우(廟宇)인 육덕사(育德祠)에는 김종직을 주벽(主壁)으로
양쪽에 박한주(朴漢柱)와 신계성(申季誠)을 배향(配享)하고있다.
육덕사에서 보는 서원 강당과 전사청
서원강당에서 보는 독서루와 동.서재
2.점필재 김종직 생가
김종직생가 출입문
추원재 앞의 점필재 김종직선생 흉상과 신도비
김종직선생은 단종 1년 태학에 들어가 주역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해 동료들의 경복을 받고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다.
1482년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상관에 임명된 후 두루 벼슬길에 올랐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과 함께 사림파를 형성해 훈구파와 대립했다.
연산군 4년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의 내용으로 인해
사화가 일어나고 결국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생가터에 건립한 추원재(追遠齋)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파의 우두머리인 김종직과 아버지 김숙자가
평생 살았던 곳으로, 추원(追遠)은 조상의 덕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의 계보로 이어지며
김종직은 성리학을 뿌리 내리게한 위대한 사상가였으나,
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 화를입어 부관참시 당하자 자손들이 흩어지고
생가도 보존되지도 못한채 낡고 허물어지자, 중종 때 죄가 신원(복권)된 후
1810년 사림과 후손들이 6칸 맛배지붕으로 추원재를 지었다.
뒷편 묘역으로 가는길에서 보는 생가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김숙자는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김종직은 길재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3.김종직선생 묘역
김종직선생 묘소 입구
김종직은 형인 김종석(金宗碩) 등과 함께 김천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김종직의 문인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김종직선생 묘소
김종직선생은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그리고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청하여 함양군수로 나왔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거쳐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다.
문인석등 (신.구)석물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 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묘소 뒷쪽에서
본 부인인 조위(曺偉)의 누나가 병으로 사망하고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고향인 밀양에 돌아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4.고령 개실마을의 김종직 종택
김종직 종택 대문
점필재 종택( 문충공파)은 고령군 쌍림면 개실 마을에 있는데
이곳은 무오사화로 김종직 가문이 몰락하게되자 후손들이 밀양,
합천 야로,고령 용담 등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임진왜란을 격었고,
1651년(효종 2년) 김종직의 5대손 남계공 김수휘(金受徽)가
이곳에 자리 잡아 350여 년동안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종택 건물(문충세가,文忠世家) 사랑채
무오사화로(戊午士禍)로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임을 당하고
조위,정여창·김굉필·이종준 등이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로 다시
죽임을 당하거나 부관참시되는 등 사림파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종택건물의 편액과 안채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신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는 김종직의 시호인 문충(文忠)이 회복되었고,
이어 1709년(숙종 3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안채
김종직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을 견지한 김굉필,정여창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손,유호인,조위,
또 다른 입장에 선 남효온,홍유손 등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종택의 사당
김종직선생은 밀양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백연서원,
김천 경렴서원, 개령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점필재집, 유두류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사당 건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김종직선생의 글들과 유품들은
대부분 불에 태워 없어지거나 유실되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친필 편지
'문화유산산책 > 누.정.서원.향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도 금호서원(琴湖書院) (0) | 2024.01.11 |
---|---|
단장천 밀양 반계정(盤溪亭) (0) | 2024.01.03 |
영천 임고서원의 500년된 은행나무 단풍 (0) | 2023.11.11 |
합천 호연정(浩然亭) (0) | 2023.07.18 |
함창향교와 청암서원, 효령대군 영당 (0) | 2023.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