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경상우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1562~1610)과
향산(鄕山) 이백신(李白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청도 금호서원 전경
금호서원은 이운룡의 출생지인 청도군 매전면 명대마을(온막리)에
사당인 상충사(尙忠祠)를 건립하여 향사하다가,
1814년(순조 14)에 이곳 이서면 금촌리로 옮겨 세웠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서원 강당만 대월산 기슭으로 옮겨 세운 후 효충사(孝忠祠)라고 했다.
서원 초입의 "식성군 이운룡공 기적비(息城君 李雲龍公 紀跡碑)"
이운룡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이다.
성장 초기에는 유학을 하다가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운룡의 옥포만호 부임 4년째인 1592년 4월 14일 일본군 선봉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왜란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은
병기와 전함 등을 바다에 버리고 곤양만으로 후퇴하려 하였는데,
금호서원 입구
이때 이운룡의 청으로 호남 수군에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순신은 조정에 장계하고 출동을 결의하여, 5월 5일 고성 앞바다를 지나
5월 6일 한산섬에서 경상우수영군과 합류한 후
7일 정오에 옥포만에 도착하여 합동작전을 펼쳤다.
금호서원 표지석
이운룡은 선봉장이 되어 적선 50여 척을 격전 끝에 침몰시켰다(옥포해전).
이후 영등포해전, 당항포해전, 한산해전 등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으며, 이 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수사로, 뒤에는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금호서원 강당
1604년 선무공신으로 훈록되어 식성군으로 봉군되고
나라에서 토지 등 사물(賜物)을 내리고 불천위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으며,
조상까지 증직하고 자손대대로 유급영세(宥及永世)의 특전을 누리도록 했다.
1607년 함경남도병사로, 1609년에는 충청수사로 재임하다 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종기를 앓다가 1610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위) 동.서재, (아래) 대문채와 금호서원 문화재지정 기념비
서원강당(중앙)과 중수기 등 편액
사당 출입문인 상덕문(尙德門)
이운룡은 사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
청도 금호서원(琴湖書院)과 의령 기강서원(歧江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
현충사(賢忠祠, 사당)
사당에는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1562~1610)과
향산(鄕山) 이백신(李白新, 1539~1604)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원입구의 석비
(왼쪽)식성군 삼도수군통제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이운룡장군 사적비
(중앙)선무원종 공신 어모장군 향산 이백신선생 의적비(懿跡碑)
(오른쪽)식성군 이운룡공 기적비(息城君 李雲龍公 紀跡碑)
*향산 이백신은 1539년(중종 3) 청도 금촌에서 태어났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인근 지역의
동지들을 의병으로 규합하여 진주를 거쳐 전라도 금성까지 출격하여 싸웠다.
전쟁이 종료된 후 1605년 논공행상에서 선무원종 공신으로 녹훈되고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 첨정으로 포상되었다.
서원앞의 풍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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