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우(曺致虞,1459~1529)는 조선전기에 정언, 대구부사, 예천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요 효자이며, 재임 중 선정으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중종(中宗)은 조치우(曺致虞)가 선정과 노모봉양의 효심 또한 지극하여
소학(小學)을 내리고, 1529년(중종 24) 그의 사후에는 청렴결백한
덕을 표창하고자 옥으로 만든 옥비(玉碑) 두좌를 하사하였다.
영천 내사옥비각(內賜玉碑閣,2023.12.28)
그 한 좌는 조치우에게 내린 청옥(靑玉)으로 현재의 영천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松靑山) 유후재(遺厚齋) 안 내사옥비각에 안치되어있고,
다른 한 좌는 부인인 숙인 창원 박씨에게 내린 백옥(白玉)으로
부인묘소가 있는 창원시 북면 지개동 구룡산(九龍山) 아래
모선재(추감재,追感齋) 옆 어사옥비각(御賜玉碑閣)에 안치되어있다.
어사 청백리 조치우 옥비(御賜 靑白吏 曺致虞 玉碑)
이 비는 조선전기에 옥으로 만든 비석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고,
맑고 깨끗한 덕을 높이 평가받아 왕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점도 돋보인다.
비각은 철종 5년(1854년)에 세워졌으며, 유후재(遺厚齋)는 조치우(曺致虞)를
기리기 위해 중종 34년(1539년)에 묘역아래 세워진 재실이다.
유후재(遺厚齋)
조치우(曺致虞,1459~1529)의 본관은 창녕, 자는 순경(舜卿)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옹원정을 지냈으며,
연산군 초기 성균관전적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유후재 마루위의 편액들
1498년(연산군 4) 정언을 지냈으나 뒤에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정세가 바뀌자 다시
기용되어 대구부사로 나갔으며, 이어 1519년(중종 14) 예천군수를 지냈다.
유후재와 내사옥비각 전경
재임 중 선정으로 이름이 높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뒤에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효행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소학"을 하사받았다.
55세 때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하고
7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애통 끝에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했다.
청백리 정우당 조치우(靑白吏 淨友堂 曺致虞) 묘와 묘역(2023.12.28)
창원 어사옥비각(御賜玉碑閣)
어사옥비(御賜玉碑)
이 비는 창녕조씨 재실인 모선재(추감재,追感齋) 옆 어사옥비각에 안치되어있다.
조치우선생의 부인에게 내린 비로 임금이 하사한 비라 하여 "어사옥비"라 한다.
비는 비몸과 머릿돌을 한돌로 다듬어 세워 놓았다.
비문은 위에 가로로 "어사옥비(御賜玉碑)"
세로로 "숙인 창원박씨지묘(淑人 昌原朴氏之墓)"로 새겨져 있다.
원래 묘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훼손 등의 우려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모선재(慕先齋), 또는 추감재(追感齋,2023.12.29)
시계반대 방향으로, 큰길옆 어사옥비 안내표지판,
모선재 아래,모선재입구,어사옥비각입구,어사옥비각
재실앞의 고목(왼쪽은 엄나무)들은 조치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조치우와 증손 조광익은 모선재가 있는 바로 이곳 지개리에서 태어났다.
밀양 오봉서원(五峯書院) 전경(2023.12.29)
오봉서원(五峯書院)은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에 있는 서원이다.
1780년(정조 5)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조광익(曺光益)의 향사를 올렸었는데
1790년(정조 15)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조치우(曺致虞)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여, 다음 해 정조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합사하였다.
오봉서원의 사당인 청효사(淸孝祠)
조광익(曺光益,1537~1580)은 창원 지개리에서 태어났으며,
오봉서원이 있는 이곳 밀양 오방리와는 5~60리(22km) 거리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 또는 죽와(竹窩).
아버지는 조윤신(曺允愼), 증조가 청백리 조치우(靑白吏 曺致虞)이며,
지산 조호익(曺好益)의 형이다.
담 너머로 본 오봉서원 강당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69년 형조좌랑, 감찰을 역임,
1576년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조호익을 검독(檢督)에 임명,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불량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에 유배되었다.
시계방향으로, 오봉서원 입구 표석, 서원 정문, 사당과 묘역, 묘역에서 본 오봉서원,
이에 조광익은 선조 11년(1578년)에 강동(江東)에 있는 아우 조호익을 만나려고
평안도 도사의 직책을 얻어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선조는 그 우애를 가상히 여겨 정문(旌文)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록"에 수록하게 하였으며, 그의 저서로는 "취원문집(聚遠文集)"이 있다.
조광익 묘역과 묘비
오방리 강동구(江東邱)
조광익이 죽자 시신을 이곳 오방리로 옮겨와 장사를 지냈는데,
이때 강동(江東)의 많은 백성이 형제의 우의에 감복하여 흙을 짊어지고
조문하러 천릿길을 왔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이므로 가지고 온 흙 일부는
묘위에 뿌리고 남은 흙으로 둔덕을 만들었는데 이를 "강동구"라 하였다.
강동구는 오방리와 범평리 사이의 길 양쪽에 마주보고 2곳이 있다.
강동구 비각, 강동구 석비, 비각 옆 범평리 강동구(언덕)
선조(宣祖)는 이들의 우애를 가상히 여겨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싣도록 하였다.
1834년에는 형제의 우애를 기리는 비각을 둔덕(강동구)옆에 세웠다.
조광익 효자 정려각(曺光益 孝子 旌閭閣) 전경
조광익 효자 정려각(曺光益 孝子 旌閭閣) 내부
이 정려각은 효자 조광익(曺光益,1537~1578)의 대효를 표창하라는
왕명으로 세워진 "효자 조봉대부 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조광익 려"
(孝子 朝奉大夫 刑曹正郞 兼 春秋館 記主官 曺光益 閭)
1634년 12월 일(숭정 7년, 崇禎 七年 十二月 日) 이다.
우리 모두 새해에는 가족간, 일가간에는 우애가 가득하고,
친구간 이웃간에는 정감넘치는 가슴찡한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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