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상주 조우인선생 문학비와 낙동강 어풍대

by 안천 조각환 2023. 12. 25.

이재 조우인(曺友仁,1561~1625)선생은 조선조에 선조광해군인조등 

3대 임금을 섬기며 시글씨그림등 3절로 이름났던 선비였으며,

특히 매호별곡(梅湖別曲)·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거나

EBS 수능특강, 고교모의고사나 수능고사 등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상주 매호리 낙동강변에 있는 조우인 문학비와 어풍대 등을 둘러본다.

 

이재 조우인선생 문학비(頤齋 曺友仁先生 文學碑)

 

이재 조우인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이재(頤齋)이며 예천에서 출생.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의 증손자이다.

조우인은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혀있던 중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이곳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그의 가사집 이재영언(頤齋詠言)에는 매호별곡(梅湖別曲)·

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특히 매호별곡은 1624년경 그가 노경에

은거하던 바로 이곳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소박한 선비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매호별곡(梅湖別曲) 시비

 

(중략)

이끼 낀 바위에 기대어 앉아 보며

그늘진 송근(松根)을 베고도 누워 보며

한담(閑談)을 못다 그쳐 산일(山日)이 빗겨시니

심승(尋僧)을 언제 할고 채약(採藥)이 저물거다.

 

그도 번거로워 떨치고 걸어 올라

두 눈을 치켜뜨고 만 리를 돌아보니

외로운 따오기는 오며 가며 다니거든

망망속물(茫茫俗物)은 안중(眼中)에 티끌이로다.

 

부귀공명 잊었거니 어조(魚鳥)나 날 대하랴

낚시터에 내려앉아 백구(白鷗)를 벗을삼고

술동이를 기울여 취토록 혼자먹고 

흥진(興盡)을 기약하여 석양(夕陽)을 보낸 후에

 

강문(江門)에 달이 올라 수천(水天)이 일색인 제

만강풍류(滿江風流)를 한 배 위에 실어 오니

표연천지(飄然天地)에 걸린 것이 무엇이랴

두어라 이렁성그러 종로(終老)한들 어이리.

 

*이 가사는 2021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 전국연합에 출재된 일부 내용이다.

 

(왼쪽)문학비 뒷면의 조우인 생애  (오른쪽) 문학비와 문학비 입구 안내표지판

 

"자도사"는 광해군을 풍자했다가 옥고를 치른 1621∼1623년(61~63세)에

지은 것으로, 임금을 사모하는 충성스런 신하의 마음을 노래한것이다.

"속관동별곡"은 만년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을 읽고 느낀 점이 있어

전날 젊은 시절에 유람했던 관동지방을 추억하며 쓴 기행가사다.

 

어풍대 가는길

 

"출새곡"은 1616년 가을에 경성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봄에

변방의 산천풍토와 봄놀이를 두루 즐긴 뒤 쓴 기행가사이다.

서울의 흥인문을 떠나 임지인 경성에 다다르기까지의 노정에서 보고

느낀것과 임지에서의 봄놀이, 그리고 변방 목민관의 고독감 등을 노래했다.

 

상주 매호리앞 낙동강

 

출새곡(出塞曲)

북방 이십여 주에 경성이 문호인데 / 군사 백성 다스리기를 나에게 맡기시니

망극한 임금의 은혜 갚을 길이 없구나.

서생의 일은 글쓰기인가 여겼더니 / 늙은이의 변방부임 진실로 뜻밖이로다.

​임금께 절하고 칼을 짚고 돌아서니 / 만 리 밖 국경에 내 한 몸 다 잊었다.

 

흥인문 내달아 녹양평에 말 갈아타고 / 은하수 옛길을 다시 지나간단 말이냐.

​회양 옛 사실 소문만 들었더니 대궐을 /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장유(汲長孺)가

회양 태수로 선정을 베풀었던 일 / 홀로 떠나는 적객은 무슨 죄인가.

임금곁을 떠나 경성으로 부임하는 자신의 신세 / 높고 험한 철령을 험하단 말 전혀 마오.

 

세상살이에 비하면 평지인가 여기노라 / 눈물을 거두고 두어 걸음 돌아서니

서울이 어디요 대궐이 가렸도다 / 임금을 떠나는 안타까움

안변 북쪽은 저쯤에 오랑캐 땅인데 / 오랑캐를 정벌하여 천 리 밖 몰아내니

윤관 김종서의 큰 공적 초목이 다 알도다.

 

용흥강 건너와 정평부 잠깐지나 / 만세교 앞에 두고 낙만루에 올라앉아

옥저의 산하 하나하나 돌아보니 / 함경도 함흥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국가

천년의 풍패에 상서로운 기운 어제인듯 하구나.

함관령 저문 날에 말은 어찌 병들었는가 / 모래바람 자욱한데 갈 길이 멀었구나.

 

홍원 옛 고을의 천관도를 바라보고 / 대문령 넘어서 청해진에 들어오니

함경도의 요해지요 남북의 요충지라 / 충신과 정예 병사 무기를 늘어 놓고

강한 활과 쇠뇌로 요충지를 지키는 듯 / 태평세월 백년동안 전쟁을 잊으니

철통같은 방어를 일러 무엇하리오. 

 

*출새곡은 조우인이 56세 되던 해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임명되어 떠날 때

변방으로의 부임 과정과 임지 생활에서 느낀 소회 등을 기록한 기행가사로

2023년 9월 고1 모의고사는 물론 고교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가사이다.

 

어풍대(御風臺)

 

어풍대는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 낙동강변 둔치에 있는 대(臺)이다. 

조우인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落鄕)하여 매호리에 있을 때

 인조께서 이재(頤齋)같은 충절지사(忠節之士)가 지리풍수학적으로

여생을 보낼만한 안식처가 될 곳인지 어풍(御風, 임금이 보낸  풍수)을

보내 관찰하라고 하셨는데, 어풍이 왕명을 받고 매호에 도착하여

이 바위에서 산세와 지형을 관찰하고 갔다하여 "어풍대"라 이름하였다.

 

어풍대 안내와 내력

 

조우인의 상계(上系, 윗대)를 잠시 살펴보면

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인 조계룡(曺繼龍)이며,

중시조(中始祖)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사위인 조겸(曺謙)이시다.

이후 혼돈의 시기를 거쳐 갱기(更起)로 다시 정리하여, 조겸의 16세(世)인 

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 삼형제 1세로 하고있디.

 

이 중 송무(松茂)· 송학(松鶴)의 후손이 약 97%를 차지하며

송군(松君)의 후손들이  약 3%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송군의  7세손인 조흥(曺興) 고려말 중훈대부(中訓大夫) 

태복시경을 역임하였으며,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그는 계림(桂林),상림(上林),중림(中林)의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첮째인 조계림(曺桂林)의 후손들은 진해지방에 세거하고 있다.

 

얼음이 꽁꽁언 낙동강과 강변둔치의 어풍대

 

조흥(曺興)의 둘째 아들인 조상림(曺上林) 무당상절제사(武堂上節制使)

역임한 고려의 충신이었으며, 조선 태조로부터 상호군(上護軍)으로

명받았으나 사양하고, 지금의 창녕군 대합면 개복리로 귀향하였다.

상림의 아들 조명수(曺命壽)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증(贈) 병조참의다.

명수(命壽)의 아들 조순(曺珣)은 부사직을 역임했으며 증(贈) 이조참판이다.
아버지인 조명수(曺命壽)까지는 창녕에 세거했으나, 아들인 조순(曺珣)

상주(尙州)로 이사를 해서 상주(尙州)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매호리 풍경


순(珣)의 차자(次子)인 조계형(曺繼衡)은 종2품 호조참판종2품

가선대부 좌부승지를 역임했고, 창성군(昌城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조계형(曺繼衡)의 재실은 상주 공검면에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계형(繼衡)의 장자(長子)인 조언홍(曺彦弘)은 증(贈) 병조참의이며,

언홍(彦弘)의 차자(次子)인 조몽길(曺夢吉)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내고 

증(贈)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판관이고 합천 입향조(入鄕祖)이다.

 

조계형(曺繼衡) 초상화

 

이재 조우인(曺友仁)의 증조부는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1470~1518)이고,

조부는 조언홍(曺彦弘)이며, 조언홍은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몽석(夢錫,무후), 둘째는 몽길(夢吉,합천), 셋째가 증 이조판서인

조몽신(曺夢臣,1532~1593)으로 예천군 노포리(현 예천 개포면)에서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을 낳았다.

4,5,7,8대 국회의원의 조일환(曺逸煥)은 둘째인 몽길(夢吉)의 15세손이며,

조국(曺國) 전 법무부장관은 조흥의 둘째 아들인 조상림(曺上林)의 후손이다.

 

매호리 마을 입구

 

매호리는 이재 조우인선생이 1623년 승지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인조로부터 국록으로 매악산 국사봉과 "매호십리강산"을 하사받은 곳으로

매호정사를 짓고 지내면서 "매호별곡"을 읊으며 여생을 보낸곳이다. 

 

매악산 국사봉과 매호십리강산

 

매호십리강산은 퇴강에서 운성진까지로 어풍대,임호대,임호정,

문학비,임어재,별묘,활공장 등 낙동강과 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곳으로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지금까지 450여 년간을 살아오고 있다.

 

담양 한국가사문학관에 전시된 이재 조우인의 자도사

 

조우인의 자도사(自悼詞)

임 향한 일편단심 하늘에서 타고나니 /  삼생의 인연이요, 지은 마음 아닙니다.
내 얼굴 내 못 보니 예쁘다고 할까마는 /  민낯이 곱든 밉든 생긴 대로 지녀 있어
연지와 백분도 쓸 줄을 모르는데 /  하얀 이 붉은 입술을 두었노라 하겠는가.
이 임을 만나 뵙고 섬길 일 생각하니 /  젊은 외모 믿자 하니 미모가 얼마이며(이하 생략)

 

*이 자도사는 3년간 감옥살이를 할 때에 억울하고 애절한 심정을

남녀관계에 빗대어 노래한 가사로서 제목의 "자도사(自悼詞)"는

스스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로서 곧 죽음을 각오하고 쓴 글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우인의 가사들은 교과서나 시험문제 등에 자주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