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세계문화유산.유적

세종대왕릉(영릉)에 얽힌 이야기

by 안천 조각환 2024. 1. 17.

세종대왕릉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교과서라 일컬어질 만큼

여러가지 조건을 두루갖춘 명당중의 대명당자리라 꼽는다.

이러한 세종대왕릉에 얽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세종대왕릉 입구의 세종대왕상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8일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31년 6개월간 임금으로 재위하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450년 4월 8일 향년 54세로 승하하였다.

 

세종대왕릉(영릉,英陵)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그리고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눈이 덮여있는세종대왕릉 경내

 

세종은 승하후 태종의 현릉 서쪽에 소헌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그런데 세종의 수릉(壽陵)을 정할 당시 당대의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이

묏자리를 두고 ''여기는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

라고 반대해서 논란이 되었었는데, 정인지 등이 헛소리로 치부하며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그냥 자신을 향한 충언 정도로 받아들이며 기분 좋게 넘어갔었다.

홍살문과 세종대왕릉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최양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했다.

이 때문에 예종은 조부인 세종대왕의 능을 여주로 이장하기에 이른다.

이장코자 세종의 수릉을 파내보니 수의마저 썩지 않은 채로

물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정자각(丁字閣)과 세종대왕릉

 

세종대왕릉(영릉)의 이장은 세조 때부터 논의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와서 현재 자리로 천장(옮김)하여 오늘에 이른다.

예종은 이장할 묘소를 지금의 서울 땅에서 100리(40킬로미터) 이내에서

찾도록 했는데, 이때 지관이 천거해 천장한 곳은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는

천선강탄(天仙降誕)형, 또는 신선이 앉아 있는 선인단좌(仙人單坐)형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여주 영릉(英陵, 세종대왕릉)이다.

 

세종대왕릉(영릉,英陵)

 

이곳이 천하의 대명당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대단한 자리이다.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자리이다.

그래서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영릉(세종대왕릉)에서 바라보는 안산

 

한편 예종의 명으로 세종의 천장 자리를 보러 나온 지관 안효례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여주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할 곳을 찾은데가 광주 이씨 문중에서 지난해에 세운 재실이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것이었으며, 고민하던 그는 산도(山圖)를 그려 예종에게

이인손의 묘택이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고하면서 세종의 묘로 추천했다.

그 자리는 군왕의 묘택으로서는 적합하지만 정승의 묘택으로는 과분하다는

설명도 첨언했는데, 결국 이렇게 해서 세종대왕릉이 자리하게 되었다.

 

영릉의 구 재실

 

이인손은 원래 광주 이씨 3세손으로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해

우의정에 이르렀고, 그의 부친은 청백리로 유명한 이지직이고,

조부는 고려 말의 절의와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던 둔촌 이집이다.

현재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은 둔촌 선생이 있었던 곳이라 해 붙은 이름이다.

 

새로지은 영릉재실

 

둔촌은 충목왕 3년(1347) 문과에 급제한 뒤 정몽주,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과 교유했으며, 이후 합포종사를 지내고

1368년 신돈을 탄핵하려다 발각되어 이집을 죽이려고 체포령을 내리자 

늙은 아버지를 업고 영천으로 피신해 천곡 최윤도의 집에서 3년 동안 기거했다.

이때 최윤도는 두 명을 다락에 숨겨두고 부인과 여종 연아 등

가족들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영릉 입구의 세종 때 제작한 발명품들(간의, 소간의)

 

이듬해인 1369년 이집의 부친인 이당이 다락방에서 별세했으며,

최원도는 자기 모친인 영천이씨의 묘소 아래 정성껏 장사를 지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광주이씨 시조묘이며 지금도 뒤에는 영천이씨 묘가 있다.

이곳 광주이씨 시조묘는 왕의 묘가 아님에도 광릉으로 불리고 있는데

무덤이 능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소간의(왼쪽), 혼천의, 관천대와 적도의,

 

(위) 현주일구, 혼상,  (아래) 정남일구, 천평일구

 

자격루, 앙구일부, 일성정시의(오른쪽)

 

수표(왼쪽), 일구대, 천상열차분야지도

측우기, 세종대왕상, 풍기대(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