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세계문화유산.유적

세계유산 한국의 전통마을 ~ 안동 하회마을(2)

by 안천 조각환 2024. 6. 27.

하회마을 충효당(忠孝糖)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종택으로 보물 제414호이다.

이 건물은 류성룡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모인 수많은 유림들이

 장손인 졸재 류원지공을 도와 17세기에 지어진 전형적인

조선 시대 사대부 양식의 고택이다.

 

충효당 고택(종택)

 

충효당은 사랑채, 안채, 사당,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총 52칸으로, 류원지공이 처음 안채를 지었고,

그의 아들 눌재 류의하가 사랑채를 완성하였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외양간, 광, 방, 마굿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효당 앞뜰의 구상나무

 

이 구상나무는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에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것이다.

구상나무는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 등 표고 500~2,000m에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종으로 추위를 잘 견디는 굳건한 힘을 지니고 있어

우리 민족의 힘찬 기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굳건하고 우아한 모습은 여왕의 품격과도 잘 어울린다.

 

충효당 대문간채

 

충효당의 사랑채(12칸)

 

사랑채 대청 ~ 충효당 편액 등

 

서애 류성룡선생 유훈

 

숲 속의 새 한 마리 쉬지 않고 우는데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권하노니 자손들은 반드시 삼갈지니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

 

"충효당"의 당호는 평소 류성룡 선생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했다.

 

충효당 옆면

 

임간일조제불식(林間一鳥啼不息) / 문외정정문벌목(門外丁丁聞伐木)
일기취산역우연(一氣聚散亦偶然) / 지한평생다괴작(只恨平生多愧怍) 
면이자손수신전(勉爾子孫須愼旃) / 충효지외무사업(忠孝之外無事業)  

 

사랑채와 냉방(냉방 뒤쪽이 안채)

 

사당 전경

 

영모각 앞의 사당(내삼문)

 

영모각(永慕閣)

 

영모각에는 류성룡의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모각 입구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자는 이현, 호는 서애, 의성 사촌 출생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송은 김광수의 딸이다.

 

성장과정 등 전시물

 

이황의 문인으로 김성일과 동문수학했고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뒤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부제학,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왕명으로 황화집서를 찬진했다.

 

유품 들 

 

다시 부제학이 돼 비변오책을 지어 올렸으며,

이 후 함경도관찰사,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경상도 관찰사,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 제학을 겸했다.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다.

 

독서하는 모형

 

1592년 4월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군무를 총괄했으며,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였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됐다.

 

숭록대부 풍원부원군 교지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 경상. 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돼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조봉(吏曹奉)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북인들의 탄핵(주화오국,主和誤國)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됐지만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징비록(懲毖錄)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서애집, 징비록, 운암잡기 등이 있고

편저로는 황화집, 문산집, 포은집, 퇴계집,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국보인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전시공간 

 

류성룡의 묘는 풍산읍 수동 뒷산에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동의 병산서원, 빙계서원, 남계서원, 삼강서원 등에 제향됐다.

 

사당과 영모각 사이의 만지송(萬枝松)

 

하회마을 작천고택 ~ 국가민속문화유산

 

 

민속놀이 마당

 

하회마을 빈연정사(賓淵精舍) ~ 국가민속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 빈연정사(賓淵精舍)는

1583년(선조 16)에 건립된 정사로 겸암 류운룡이 서재로 사용했다.

 

빈연정사 마루

 

1919년 풍남국민학교 개교로 현 위치인 학교 서측으로 이건되었다.

북측에 일각문을 세워 북측에서 출입하도록 하였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 성리학자의 원림 공간이다.

 

 빈연정사 일각문

 

빈연정사의 주출입문은 일각문(一脚門) 구조인데, 서측의 만송정

솔숲의 풍광을 즐기는 문이라는 뜻으로 완송문(玩松門)이라 했다.

빈연정사는 북향하여 만송정과 화천(花川), 그리고 화천 너머

부용대와 겸암정사를 보고 있다.

 

운세 보는집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숲(천연기념물 제473호)

 

만송정(萬松亭) 숲은 수령 90∼150년 정도의 소나무 단순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회구곡 중 제5곡 만송(萬松)이다.

이 숲은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조성되어 있는데, 선조 때 문경공 류운룡(柳雲龍)이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수령 400여 년된 소나무(보호수)

 

용틀임하는 소나무

 

전시관

 

안동 하회마을 원지정사(遠志精舍) ~ 국가민속문화유산

 

 하회마을 북촌의 화천(花川)과 부용대(芙蓉臺)를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한 이 정사는 류성룡(柳成龍)이

34세 때 은거하였고, 병환 중 요양하던 곳이다.

 

원지정사(遠志精舍)와 연좌루(燕坐樓)

 

원지정사의 서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누(樓)로 된

연좌루(燕坐樓)가 자리 잡고 있는데, 올라서면 부용대와 화천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또 하회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원지정사(遠志精舍)

 

연좌루(燕坐樓)

 

원지정사와 연좌루 뒤에서

 

다시 마을안으로 

 

하회마을 화경당(和敬堂,북촌) ~ 국가민속문화유산

 

화경당 고택은 1797년(정조 21) 류사춘이 사랑채, 날개채, 대문채를 짓고

1862년(철종 132)에 증손자 석호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채, 사당을 지었다.

화경당은 화(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화경당 북촌유거(北村幽居)

 

하회마을의 고택

 

그 옛날의 사다리(초가지붕 이을(덮을) 때 필수품)

 

처마끝에 메달은 마늘말리기

 

하회마을 하동고택 ~ 국가민속문화유산

 

하동고택은 류성룡의 9대손으로 예천 용궁현감을 역임한

류교목(柳敎睦)이 1836년에 건축하여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953년 류시익(柳時益)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길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하회마을 동쪽에 있다하여 하동고택이라 부른다.

 

하회마을 골목

 

하회마을에는 2024년 5월 부터 기반시설 정비사업으로

세대 내 LPG 배관망 구축, 광케이블 선로구축, 도로 재포장 등으로

골목마다 파고, 깔고, 덮고 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하회마을 민현재(敏賢齋)

 

무더위 한파 쉼터(하회마을 경로당)

 

마을 앞 연밭(아직은 연꽃이 한 두개만 보인다)

 

낙동강건너 부용대(중간 바위절벽)

 

부용대 오른쪽에는 화천서원과 옥연정사가, 왼쪽에는 겸암정사가 있다.

 

낙동강변 제방숲길

 

화천서원 입구

 

앞은 화천서원 출입문이고, 오른쪽은 부용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화천서원 출입문

 

화천서원 지산루(地山樓) 측면

 

화천서원(花川書院) 강당 ~ 경상북도 기념물 제163호

 

화천서원은 1786년(정조 10)에 류운룡(柳雲龍), 류원지(柳元之),

김윤안(金允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건물로는 경덕사(景德祠), 강당, 신문(神門), 전사청(奠祀廳),

장판각(藏板閣), 전학재(典學齋), 심원재(尋遠齋), 지산루(地山樓) 등이 있었다.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강당과 주사만 남았다가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1996년 복원하였다.

 

강당 측면

 

동재인 전학재(典學齋)

 

서재인 존현재(尊賢齋)

 

강당에서 보는 지산루(地山樓)

 

신문(神門,내삼문)

 

경덕사(景德祠,사당)

 

경덕사 담장위의 기와

 

담장밖에서 보는 유도문(由道門,정문)과 지산루(地山樓)

 

화천서원 전경

 

화천서원에서 옥연정사로 가는길의 낙동강 풍경

 

옥연정사 입구의 류성룡선생 시비

 

소나무를 심고 / 종송(種松)

 

스무아흐렛날 자재들과 재승 및 사람을 시켜서

능파대 서쪽에 소나무 삼사십 그루를 심었다. ~ 중략 ~

올해 내 나이 예순 셋인데 새삼 나무를 심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 중략 ~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나 비록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은 알겠지.

천년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조선 선조 37년(1604년) 2월 29일 류성룡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玉淵精舍) ~ 국가민속문화유산

 

옥연정사는 하회마을의 화천(花川,낙동강) 북쪽 부용대(芙蓉臺)

동쪽 강가에 있어, 과거에는 나룻배로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선생이 징비록(懲毖錄,국보)을

집필한 곳으로 1586년(선조 19)에 류성룡이 건립하였다.

 

담너머로 보이는 낙동강과 하회마을

 

옥연정사는 대문간채, 살림채, 사랑채, 별당채로 구성되고,

이들은 각각 독립된 건물로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채는 동남향하여 정면 6칸, 측면 1칸이고,

이곳에는 측간(厠間)과 광들이 자리 잡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쪽 서쪽으로 동서향으로 면한

살림채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앞뒤로 반 칸 폭의 퇴를 두었는데,

동쪽은 벽체로 막아 방에서 쓰고, 서쪽은 개방하였다.

 

옥연정사 앞뜰의 소나무

 

옥연정사에서 보는 하회마을

 

옥연서당(玉淵書堂)

 

 별당채의 서남쪽에는 一자형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크기로 동쪽부터 방 1칸, 대청 2칸,

방 1칸을 두고, 앞뒤로 반 칸 폭의 퇴를 두었다.

 

옥연서당(玉淵書堂)과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 편액

 

서쪽의 일각문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

 

일각문 바깥에서 보는 옥연정사

 

옥연정사 길목의 자귀나무꽃

 

겸암정사 입구 유운룡선생 시비

 

퇴계선생시의 운을 따서 / 경차(敬次)

 

가파른 암벽 붉은 벼랑은 아득하고 깊은데

구름 안개 사라지니 천길이나 푸르구나.

중천에 달은 밝고 산은 고요하고 적적한데

나는 듯이 뛰어 올라 소리 높이 읊었네.

 

 초벽단애요복심(峭壁丹崖窈復深)

운연명멸벽천심(雲烟明滅壁千尋)

중소월백산공적(中宵月白山空寂)

비보요대발호음(飛步瑤臺發浩吟)

 

* 이 시는 1564년 4월 류운룡이 퇴계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갔다가 퇴계선생 시의 운을 따서 읊은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 겸암정사(謙嵓精舍) ~ 국가민속문화유산

 

 겸암정사(謙嵓精舍)는 1567년(명종 22)년 서애 류성룡의

맏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건립한 정사로

학문 정진과 제자 양성을 위해 지은 것이다.

 

* 겸암의 암자가 퇴계 선생의 겸암정 편액 글씨는 謙菴(책력 암),

원진해의 겸암정사는 謙嵓(바위 암), 류성룡의 한시에는 謙巖(바위 암),

백과사전 류운룡의 호는 謙唵(머금을 암)으로 각각 다르다.

 

겸암정(謙菴亭)

 

"겸암(謙菴)" 이라는 호는 스승인 퇴계 이황이 지어 준것이다.

정면의 "겸암정(謙菴亭)" 편액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고,

대청에 걸린 겸암정사(謙嵓精舍)는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다.

 

 

겸암정사는 하회마을 북쪽, 부용대(芙蓉臺)의 서쪽,

옥연정사 오른쪽에 있으며, 뒤로는 소나무 숲이 감싸고 있다.

 

겸암정사 옆 류성룡 시비

 

이 시는 서애 류성룡이 맏형인 겸암 류운룡을 위하여

겸암정사(정자)를 지은데 대한 그리움과 감회를 읊었다.

 

우리 형님 정자 지어시어 / 겸암이라 이름 붙였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 내리고 /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발 끝에 향 그런 풀 냄새 모이고 /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 강물도 소리내어 밤새 흐르네.

 

아형유정관(我兄遺亭館) /  겸암유구명(謙巖有舊名)

죽영정임계(竹影淨臨堦) / 매화개만정(梅花開滿庭)

유종방초합(遊踨芳草合) / 선로백운생(仙路白雲生)

창억공수루(愴憶空垂淚) / 강류야유성(江流夜有聲)

 

겸암정사에서 보는 하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