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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한국 성씨의 뿌리

(구)안동김씨 중시조 김방경의 음수재(飮水齋)

by 안천 조각환 2024. 9. 21.

(구)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손자 김숙승(金叔承)

시조로 하는 안동 김씨로, 일반적으로 안동 김씨로 칭하는데,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 안동김씨(후 안동 김씨)와의 구별을 위해

구 안동 김씨(선 안동 김씨, 또는 상락 김씨)라고도 한다.

 

구(상락) 안동김씨 음수재(飮水齋) 전경

 

고려 후기 몽골과의 전쟁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맹활약한

명장인 문하시중.첨의중찬을 지낸 김방경(金方慶)이 중시조이다.

선(구)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몰락에 가까운 위기에 처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김자점(金自點)은 1623년 3월(광해군 15) 이괄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 6품직에 오르고 후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된다.

 

음수재(飮水齋) 정문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도원수가 되어 토산 전투에서 대패하자

삭탈관직 당하고 호란이 끝난 뒤 조야의 처벌 요구로 유배당한다.

1639년(인조 17년) 사면되고 1640년(인조 18년) 복직되지만 효종 때

 산당 세력에게 탄핵당해 1650년 파직되고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당한다.

 

음수재(飮水齋)

 

이후 김자점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당하지만

그 후에도 손자며느리인 효명옹주 저주사건, 아들과 손자들의

군사반란이 발각되면서 역모죄로 사형당하고 가문은 몰락한다.

주요 인물로는 좌승지 김구만(龜萬), 도승지, 병조참판을 역임한

김광국(光國)을 비롯한  삼도수군통제사가 총 9명이 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선생 등이 있다.

 

왼쪽 : 상락군 개국공 능동 사적비(上洛郡 開國公 陵洞 事蹟碑)

오른쪽 위 : 충열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기념비

오른쪽 아래 : 단모부 답부(旦暮賦 答賦) 비

 

단모부 답부(旦暮賦 答賦)란 상락공 김방경이 1296년 이승휴로부터

단모부를 받고, 이승휴의 삶과 행적에 대한 답부를 보낸 내용이다.

 

옛 재사(재실) 건물

 

옛 재실

 

음수재 측면

 

음수재 뒤의 사당

 

안동김씨 중시조 상락공 김방경의 묘

 

 

좌 : 새로 세운 묘비,  오른쪽 : 옛 묘비

 

고려 추충정난정원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첨의중찬 세자사 상락군

(高麗 推忠靖難定遠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僉議中贊 世子師 上洛郡)

개국공 익충열 김방경 지묘(開國公 謚忠烈 金方慶 之墓)

 

김방경 묘역 석물

 

김방경 묘 바로 위에 있는 묘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 참판공 김효로(金孝盧,1454~1534) 부부의 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 의금부사 성균생원 김공지묘 

정부인 양성이씨 지묘

 

1534년 안동 예안에 살던 광산김씨인 김효로(金孝盧,1454~1534)가

죽게되자 자식들이 선친의 묘를 조성하던 중 땅속에서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김효로의 집안에서는 급히 구 안동김씨 종중에 알리고 원만히 합의하에

김효로의 묘는 자리를 옮겨 그 윗자리에 다시 땅을 파고 묘를 썼다.

 

위의 쌍분은 김효로 부부의 묘, 아래는 김방경의 묘

 

이때 발견된 묘지석은 구 안동김씨 상락공 김방경의 묘지석 이었으며

이 터가 실전되었던 김방경의 묘역임이 우연히 확인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위에는 광산김씨 묘가, 아래에는 구 안동김씨 묘가 있게 되었다.

 

바로 앞이 광산김씨 김효로의 묘, 아래에는 상락공 김방경의 묘

 

묘에서 내려오며 뒤에서 보는 음수재 전경

 

상락공 김방경과 참판공 김효로 묘소 오르는 계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