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 한란(韓蘭)은 충북 영동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40세 무렵에 청주
방서동(方西洞)으로 이주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방정리(方井里) 무농평(務農坪)의 농토를 개척한 호족이었다.
청주한씨 시조 재실 정문(솟을 삼문)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당시 가뭄으로 왕건의 군사와 군마 등이
모두 지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자신의 군사와 군마 그리고 10만 대군이 먹을 수 있는 군량미를 제공하고,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담너머로 본 세일재(歲一齋) ~ 청주시 향토유형문화재 제151호
그 공로로 한란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
재실 측면
"청주한씨 세보"에 의하면 마한 9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인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각각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청주 한씨(淸州 韓氏), 행주 기씨(幸州 奇氏)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는다.
재실앞의 우물 방정(方井)
청주 한씨 시조 한란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징벌하려고
그의 집앞을 지나갈 때 맞이하여 집 앞의 우물물을 식수로 공급하는 등
삼한 통합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태위가 되고 개국 벽상공신에 올랐다.
그 우물이 네모가 져서 태조 왕건이 방정(方井)이라 하였다고 한다.
청주한씨 시조 한란의 묘역 입구
청주한씨 시조 한란(韓蘭)의 묘는 청주 국사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청주한씨 시조 한란의 신도비각
한란의 묘 입구 신도비는 한익모(韓翼謩,1703~1781)가 찬하여
1768년에 세웠으며, 한익모의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
조선후기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한란의 신도비와 해설문 비
청주 한씨 시조 한란(韓蘭)의 묘
원래 무덤은 1659년에 파손된것을 1663년 개장하고
1690년에 복원 하였다고 하며, 매몰되었던 묘비와 상석을 찾아
세웠으며, 개축할 때 세운 문인석과 용마석이 있다.
장명등(長明燈)
장명등은 능(陵), 원(園), 묘(墓)의 봉분 앞에 세워 놓은 석등(石燈)이다
청주 한씨 시조 한란의 묘비
고려통합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위 한란지묘
(高麗統合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太尉 韓蘭之墓)
문인석, 용마석 등 석물
석물(좌)
석물(우)
한란의 묘 뒤편에서
산신 제단
한란의 묘역 솔숲
청주한씨는 전국 각처에 75만 여명 넘게 살고 있으며
역사적 인물로는 고려 시대에 삼한벽상공신 한란, 한상경,
한충 등의 인물들을 배출하며 고대에도 명문가였다.
묘 아래에서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15명, 상신(相臣) 12명, 공신(功臣) 24명,
대제학 1명, 왕비 6명, 부마 4명을 배출하였으며, 한확(韓確)과 한명회가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진다.
신도비각과 한란의 묘역
특히 조선의 신의왕후(神懿王后,1337~1391)는 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정비로 2대 정종 이방과, 3대 태종 이방원을 낳았다.
그리고 세조의 장남인 덕동의 왕비인 소혜왕후(인수대비),
예종의 첫 왕비인 장순왕후, 계비인 안순왕후,
성종의 첫 왕비인 공혜왕후,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 등 6명이다.
청주 한씨 선대 묘역
대한민국에서는 37대 한명숙, 38대 한덕수, 39대 한승수 총리 등
3번 연속 국무총리를 배출하였고, 특히 한덕수 총리는 현재(2024년)도
48대 국무총리를 맡고 있으며, 한동훈 국민의 힘 당 대표 등
근.현대에도 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고있는 명문거족이다.
증통훈대부 사복시정 청주한공 휘 진영(諱 震英) 부부묘
증통훈대부 청주한공 익형(益亨) 부부묘
증통훈대부 사복시정 청주한공 휘 진영 호 여명 사적비
(贈通訓大夫 司僕寺正 淸州韓公 諱 震英 號 蠡溟 事蹟碑)
청주 한씨 선대 4대 설단(四代 設壇)
청주한씨 시조 묘역과 재실
고려통합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위 청주한씨 시조 휘란 위양공 유기묘소 심득기
(高麗統合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尉 諱蘭 威襄公 遺基墓所 尋得記)
"원래 무덤은 1659년에 파손된것을 1663년 개장하고
1690년에 복원 하였다고 하며, 매몰되었던 묘비와 상석을 찾아
세웠으며, 개축할 때 세운 문인석과 용마석이 있다." 의 상세 내용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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