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 김천 입향조이신 참의공 조심(曺深) 묘소를 개축중이다.
참의공의 유택은 김천 봉산면 예지리 방목산자락으로 봉황이
물위에 떠있는 봉황부유형(鳳凰浮遊形)의 명당으로 불리는 곳이다.
덕원재(德源齋) ~ 보수 예정으로 어수선하여, 시사도 관리동에서 봉행
참의공이 개경에 살다가 1389년 처가곳(서산정씨 친정)인
김천으로 낙향하게 된것은 위화도 회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기인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한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좌군도통사 조민수 등은 9일만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하며, 그 공으로 조민수는 좌시중에 오른다.
참의공 묘소 ~ 개축공사가 진행중인 상태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 등, 정책 마찰로
조민수(曺敏修) 장군이 1389년 조정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유배되면서
그의 동생인 찬성공 조경수(贊成公 曺敬修)도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렀으며, 이성계와의 대립으로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처지가 되자, 이때 조경수의 3남인 참의공(參議公) 조심(曺深)도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던 봉계로 입향하게된다.
참의공이 잠들어계신 이곳은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황악산을 안산(案山)으로, 샘골과 큰골을 각각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로 삼은 현침혈(縣枕穴)의 명당"이라고 한다.
증통정대부 병조참의 조공지묘, 숙부인 서산정씨 부자좌
(贈通政大夫 兵曹參議 曺公之墓, 淑夫人 瑞山鄭氏 祔子左)
원래 부인이신 서산정씨의 친정 아버지인 정윤홍(鄭允弘)의
묏자리로 잡아 놓았던 자리인데.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새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 묘광(墓壙)에 물을 채웠다.
묘비(구, 신)
이튿날 정윤홍의 상여가 도착하여 보니 묘광에 불이 가득한지라
명당이라고는 하나 불길하다고 여겨 산 너머 분통골로 자리를 옮겼으며,
훗날 남편이 죽게되자 친정에 부탁, 조심의 묘를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문인석(좌,우)
김천 입향조 참의공 조심(曺深)선조는 두 아들을 두셨는데, 첫째가 선무랑
조승중(宣務郞 曺承重)이고, 둘째가 울진공 조계문(蔚珍公 曺繼門)이시다,
문장공 매계 조위(曺偉)선생은 조계문의 아들로 조심의 손자이다.
개축 후
개축 전
참의공 묘소 아래로 이장(移葬)한 선무랑 이하 후손 묘역
선무랑 후손 묘제 장면
선무랑 묘비(구,신)
선무랑 창녕조공 휘 승중, 배 공인 안동권씨 지묘
(宣務郞 昌寧曺公 諱 承重, 配 恭人 安東權氏 之墓)
선무랑 문인석(좌,우)
선무랑(宣務郞) 후손(9세손~18세손 외) 공동 묘소
묘비(9세손,14세손,18세손 외 실전 묘비)
선무랑 휘 승중(宣務郞 諱 承重)은 김천 입향조 휘 심(諱 深,7세)의
맏 아들이며, 울진공 휘 계문(諱 繼門)은 둘째 아들이다.
선무랑 후손은 승중(承重,8세) - 보(保,9세) - 헌우(獻虞,10세) -
균(筠,11세)-백량(伯良,12세)-인(訒,13세)-인원(仁元,14세)-수(璹,15세)
- 한일(漢逸,16세) - 계(枅,17세) - 명일(命一,18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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