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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3대가 영상(領相)에 추증된 조탁(曺倬) 가문

by 안천 조각환 2024. 11. 21.

경헌 조몽정(敬軒 曺夢禎,1535~1593)과 그의 아들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1552~1621)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손자 율촌 조명욱(栗村 曺明勗,1572~1637)은 좌의정에 추증되어 

삼대(三代)에 걸쳐 영상(領相)에 추증(追贈)되는 영광을 안은 가문이다.

 

경헌 조몽정(敬軒 曺夢禎)의 묘 

 

성남시 서현동에 있는 조몽정 묘역은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5호이다.

조몽정(1535~1593)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응길(應吉). 호는 경헌(敬軒).

 무과를 거쳐 부사를 지낸 조등(曺璒)의 증손이고, 문과에 합격하여

관찰사를 지낸 조한필(曺漢弼)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문과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을 역임한 조언박(曺彦博)이며, 어머니는 윤유(尹瑠)의 딸이다.

 

조몽정의 묘와 신도비

 

이곳은 조선 중기 사대부 묘역이면서 조선시대 관례로 종2품 이상

당상관에 한하여 건립이 제한된 신도비가 있어 문화재적 연구의

가치가 높으며, 특히 신도비 비문은 좌참찬 오억령(吳德齡)이 짓고,

전액은  당시 조선을 대표한 송설체의 서예가 남창 김현성(金玄成)과

전서체의 좌성 김상용(金尙容) 문체로 제작되어 

한국의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몽정 신도비

 

조몽정의 신도비는 봉분 좌측 서쪽에 북향하여 세워져 있는데

흰색 화강암의 비좌와 비신 월두형(月頭形)이며, 비신의 비문은 앞면에만

있으며 상부의 전액(篆額)은 증영의정조공신도비(贈領議政曺公神道碑)이다

건립연대는 1615년(광해군 7)이며, 비의 총 높이는 239㎝로비좌 높이 22,

 너비 150,두께 92,비신 높이 217,너비 상 97, 91,두께 28㎝이다.

 

조몽정의 전처 남양홍씨와의 합장이며 쌍분이다

 

일부자료에는 조몽정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것으로 되어있으나

음보(蔭補,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에 의해 벼슬을 받는 것)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내직을 거쳤고, 외직으로 나아가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성남 중원구 상대원동에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묘역은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종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조몽정의 묘 측면

 

조몽정은 효성이 지극하여 13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어린나이에도 묘 아래에 재실을 짖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래왕하였다.

임진왜란때는 피난의 어려움속에서도 어머님을 위한 지극한 효성을

보였으며, 품행과 도의가 뛰어나 향천으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어머니를 받드는 일과 자손을 공부시키는 일에만 중시했다.

 

신도비와 문인석(좌)

 

조몽정(曺夢禎)의 아들인  조탁(曺倬)은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는 치재(恥齋)이며.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선조 3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95년(선조 28) 의금부도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서정이

문란하고 피폐해졌으므로 소를 올려 시무십책(時務十策)을 개진하였는데,

그 소가 매우 간곡하였으므로 선조가 가상히 여기고 윤허하였다.

 

문인석(우)

 

1599년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가을

문과에 오른 뒤 예조,호조,병조의 좌랑,정랑을 역임하고,사간원정언,

시강원사서를 거쳐, 1603년(선조 36)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었다.

 

조몽정의 어머니 파평윤씨 묘(조몽정 묘 뒤)

 

이어 수찬,교리,사옹원정 등을 역임하고, 1610년 (광해군 2)

우승지가 되었으며, 사신이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황해도관찰사,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공조참판에 이어 한성부좌·우윤이 되었다.

그 뒤 관직을 떠나 두문불출, 오직 독서에 심취하다 70세에 사망했다.

 

파평윤씨 묘의 부러진 묘비

 

그가 소장했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나라에 바쳐 임금으로부터

표피(豹皮)를 하사받았으며,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의

공로로 원종1등공신이 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의서(醫書)로 이양편(二養編)이 전하고 있다.

 

조몽정의 후처 안동권씨의 묘와 묘역(조몽정의 묘 앞)

 

특히 조탁(曺倬)선생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최초의 대동보인

병오보(丙午譜)를 1606년(선조 39)에 친필로 간행하였다.

이전에 가문별로 가승보는 있었으나 대동보를 간행하기 시작한것은 

1476년(조선 성종7년)에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와

1565년(조선 명종 20)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 정도이며

다음으로 우리 창녕조씨의 대동보가 조탁(曺倬)의 친필로 간행되었으며,

이때부터 각 문중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게된다.

 

창녕조씨 최초의 대동보인 병오보 서문

 

~전략 ~우리 조씨가 신라 진평왕 때부터 시작, 고려를 거쳐 본조에까지 일천여년

전수해 오는 동안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 배출된 학문, 도덕, 영웅, 호걸, 공복,경상 등을

 어찌 다 헤일 수 있으랴? 자세한 사적은 보첩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새삼 언급하지 않는다. ~중략 ~그 파계를 묻고 또 평소에 알고 있던 안밖의

친족들을 탐방하여 약간의 사적을 수록, 겨우 일책을 만들었으니,

이전의 보첩에 비교하면 그 분량이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다음에 자손들이 

보첩이란 보편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면

이를 표본으로 다시 탐방하고 수집하여 더욱 자세하게 될 터이니,

보첩을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만 완성되기를 바라겠는가?  

 

 병오보 서문 말미

 

중략 ~ 옛사람의 말에 인륜을 돈독히 하는 데는

세계(世系)를 밝히는 일만한 것이 없다하였으니 보첩을 만드는 일은

종족과 화목 하는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없지 않을 것이다. 

 

조탁의 묘(펌) ~ 직계 후손의  절손으로 묘지관리가 허술하고 신도비도 유실 

 

그 당시의 서문(序文)을 통해서나마 선대들이 우리 조문(曺門)의

통합을 위하여 애쓰신 흔적을 되짚어보고 삼가 경의를 표할 따름이다.

 

안동 풍산읍 만운리 종미골 ~ 조탁 선조와 그의 아들 조명욱 묘소가 있는곳

 

조명욱(曺明勖)은 조선시대 수찬, 남양부사, 이천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여우(汝偶), 호는 율촌(栗村)이며,

할아버지는 조몽정(曺夢禎)이고, 아버지는 참판 조탁(曺倬)이다.

 

풍산읍 종미골입구 만운저수지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5년 별제(別提)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검열·정언으로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한 후, 1610년(광해군 2) 경기도사가 되고, 그 뒤 수년간

취임하지 않았으며, 1613년 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1636년(인조 14)

이천부사가 되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해서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다가 과로로 사망하였으며,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