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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종택,고택,생가

영주 삼판서 고택(정도전 생가)

by 안천 조각환 2024. 11. 30.

영주 삼판서 고택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세 명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고택의 첫 주인은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 해당)를 지낸 정운경(鄭云敬,1305~1366)으로

정운경은 그의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1343~?)에게,

황유정은 다시 외손자인 이조판서 김담(金淡,1416~1464)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때부터는 김담의 후손들이 계속 살았다.

 

영주 삼판서 고택

 

이 고택에서는 3명의 판서를 비롯하여,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이며

정운경의 아들인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정도전 외에도 사헌부 지평 황전(黃銓), 집현전 교리 김증(金曾) 등 많은

학자와 명신(名臣)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삼판서의 후손들이다.

 

삼판서 고택 가는길

 

삼판서 중 김담(金淡)은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20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16년 동안 국립천문대에 해당하는 간의대에서

천체를 관측하며 칠정산 내외편 등 수많은 천문-역서를 편찬하였다.

 

언덕에 올라서면 서천과 멀리 소백산이 한눈에

 

칠정산은 중국의 북경이 아닌 한양을 기준으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 역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언덕에서 보는 삼판서 고택

 

삼판서 고택은 원래 구성공원 남쪽에 있었으나, 

1961년 대홍수로 기울어져 수년 후 철거되었으며,

그뒤 시민들의 뜻을 모아  2008년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 구학공원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삼판서 고택 대문

 

사랑채와 중문채

 

정도전(鄭道傳,1342~1398)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며, 선향(先鄕)은 영주이다.

출생지는 단양 삼봉(三峰) 또는 영주 삼판서 고택으로 전해진다.

 

사랑채인 집경루(集敬樓)

 

정도전정치인이자 학자,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조선전기에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등을 역임했다.

 

사랑채 측면

 

고려 말 개혁적 신진사대부로 활동했으나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어

혈통 문제로 고난을 겪었으나,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조선의 건국을

기획하고 구현해냈으며, 조선조의 국가경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킨 조선조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사랑채 툇마루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 지제교,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중문채

 

1388년 6월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장군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안채

 

1398년 8월 26일 정도전은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송현방(남은 첩집)에서

거사를 논의 하며 술이 거나해질 무렵,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밖에

이방원의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휘두른 칼에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은 즉사했고, 남은과 정도전은 생포되었는데, 이방원은 가차없이

참수를 명했으며, 정도전은 체념한 채 시 한수를 짓고 칼을 맞았다.

사후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도전의 절명시(絶命詩)

 

조심히 성찰하고 한결같은 공력을 더해

서책 속 성현의 교훈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이

송현방 정자속에서 한 번 취해 허사가 돼버렸도다.

 

조존성찰양가공(操存省察兩加功)

불부성현황권중(不負聖賢黃券中)

삼십년래근고업(三十年來勤苦業)

송정일취경성공(松亭一醉竟成空)

 

안채 대청마루

 

그는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1375), 심기리편(1394),

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와 경세론으로는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 경제문감별집 등이 있으며, 병법에 관한 것으로는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

강무도(講武圖), 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으며,

악사(樂詞)로는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시문으로는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 등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는 등 다재다능했다.

 

대들보 상량문

 

단기 4341년(서기 2008년) 8월 1일 상량

 

대청에 걸린 시판과 중수기 등 편액들

 

대청에서 보는 중문

 

삼판서 고택 전경

 

삼판서 고택과 뒷편에 있는 제민루

 

삼판서 고택 바로 뒤의 제민루(濟民樓)

 

제민루(濟民樓)는 경세제민에서 따온 말로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의국(醫局) 역할을 하던곳으로  소백산 등지에서 자생하는

진귀한 약재들을 저장하여 위로는 태의(太醫)에 공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공공의료를 수행하였다.

 

 

제민루는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하륜이 군수로 부임하여 학교를

세우고,  5칸의 누각을 세웠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후 건물이 무너지자, 

조선 초기인 1418년(태종 18)에 군수 이윤상이 3칸 규모의 의국(醫局)

 마련하여 운영하였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폐지되었으며, 이후 1443년(세종 15)에

군수 반저(潘渚)가 향교의 옛 터에 동재(東齋)와 남루(南樓)를 세웠다

 

서천변

 

제민루는 이후 1961년 대홍수로 붕괴된것을 시민들의 뜻을 모아

서천 언덕에 이건하였다가,  2007년 현재의 위치에 개축하였다.

 

서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