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군 진동면 임진강 건너 휴전선 민간통제구역 안에 있던
묵재공 휘(諱) 익(瀷) 선조 유해가 2025년 4월 마암산 선영묘역으로
이장(移葬)되어 선대 영령들과 함께 영면에 들게 되었다.
묵재공 휘(諱) 익(瀷) 묘소(이장 후)
묵재공 세계(世系) 약보
始祖 ①曺繼龍 ― ② 應神 ― ③ 壽享 ― ④ 敦 ― ⑤ 欽 ― ⑥ 謙
中祖 ⑥謙(高麗太祖駙馬) ― ⑦ 瑞 ― ⑧ 延祐 ― ⑨ 漢知 ―⑩ 之賢 ―
⑪ 思詮 ― ⑫ 正鱗 ― ⑬ 仲龍 ― ⑭ 義文 ― ⑮ 自奇 ― ⑯ 允恭 ―
⑰ 碩 ― ⑱ 誼 ― ⑲ 挻文 ― ⑳ 瑀 ― (21) 松茂
更起(갱기) ①世 松茂 ― ② 俊 ― ③ 人取 ― ④ 元桂― ⑤ 遇禧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좌찬성 경수 (敬修) |
참의공 심 (深) |
선무랑 승중 (承重) |
|||||||
울진공 계문 (繼門) |
문장공 위 (偉) |
별제공 사우 (士虞) |
영월공 윤희 (胤禧) |
묵재공 익 (瀷) |
좌랑공 효창 (孝昌) |
||||
참판공 제창 (悌昌) |
우졸당 유 (逾) |
지사공(世虎) 인제공(世龍) 삼석재(世鳳) 시직공(世鵬) |
묵재공 휘(諱) 익(瀷) 선조는 송무(松茂) 12세손이고
시조 조계룡의 32세손이며 환(煥)자 항렬(行列) 기준은 12대조가 되신다.
2007년과 2008년 성묘당시
1950년 6.25 이후 휴전선 출입통제구역 등으로 성묘조차 하지못하고
묵혀있던 묵재공산소는 고 조경환(曺景煥) 형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근 60여 년만에 찾아내어 2007년 10월 18일 첫 성묘를 하였다.
참나무 숲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산소의 나무 일부만 베어내고
이듬해인 2008년에는 작은 장비를 준비하여 남은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넘어져 있던 문인석을 일으켜 세우는 등 다소의 면모를 갖추고 성묘를 했다.
성묘 후 기념촬영(이미 두분은 고인이 되었고)
이후 몇년간은 매년 성묘를 하였으나 거리가 너무멀어 사정상
격년으로 성묘를 하던 중, 코로나 사태와 고령으로 인해 그마저 중단되고
점점 성묘조차 어려워지게 되자 드디어 이장을 결정하게 된것이다.
2025년 4월 2일 이장을 위해 1667년 장례 이후 359년만에 개장
묵재공 휘 익 행장(黙齊公 諱 瀷 行狀)
묵재공의 휘(諱)는 익(瀷), 자(字)는 중택(仲澤), 호(號)는 묵재(黙齋)이다.
소학(小學)으로써 일신(一身)을 단속하였고, 또 효우(孝友)의 행(行)이 있어
조고(祖考) 군수부군(郡守府君)이 상(喪)에 죽(粥)만을 마시고 삼년동안
시묘(侍墓)하였으며, 매번 기일을 만나면 초상 때처럼 애통해하였다.
이장 작업장면
사당에 들어서면 정숙과 공경을 다하여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듯
하였으니, 날마다 관대(冠帶)차림으로 사당을 참배하였고,
몸에 질병이 있지 않으면 이를 폐지한 적이 없었다. ~ 중략~
~전략~ 선군은 평소 보첩(譜牒)에 유심(留心)하여 가보(家譜)의 착오된
부분을 수정하였고, 또 제보(諸家)의 보첩을 널리 수집하여
팔고조(八高祖)의 계첩(系牒)을 만들려다가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금산 구가(金山 舊家)에 주거하여 문을 닫고
거업(擧業)을 폐지하였으므로 친족들이 초야(草野)에서의 은둔(隱遯)을
민망하게 여긴 나머지 매계의 봉사손(奉祀孫)이라는 단자(單子)를
예조(禮曹)에 내고 홍문관의 현보(懸保,보증인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를
시켜 초사(初仕)의 계제를 만든 뒤에 이 사실을 선군에게 알리자 선군이
노하여 주관자에게 글을 보내 나무라고 그 단자를 속히 빼 버리도록 하였다.
자제(子弟)를 가르치는 데는 으레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맨 먼저
소학(小學)을 읽혀 쇄소(灑掃)하는 절차를 익히게 하였고 일과를 정하여
글을 가르치되 간단(簡單)이 없도록 하였으며 선현들의 격언을 베껴서
벽상(壁上)에 부쳐 놓았고, 밤에는 으레 서사(書史)를 강독하여
그 정수(定數)를 채우되 하루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였으며,
평소의 훈계는 조상을 받들고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고
벗과는 신의로써 입심(立心), 입각(立脚)하는 기본을 삼았다.
처사 창녕조익지묘(處士 昌寧曺瀷之墓) , 공인 평산신씨부(恭人 平山申氏祔)
~중략~ 선비(先妣)는 가족이 매우 많은데다가 사무(事務) 또한
번다(繁多)하고 종족과 빈객이 항상 안팎으로 가득 찼으나
선비(先妣)가 의연한 표정으로 물과 밥을 마련하였으며,
아무리 끼니가 어렵게 되더라도 음식이 으레 풍결(豊潔)
하였으므로 빈객들이 모두 만족해하는 마음으로 돌아갔다.
향로석 설치장면
자부(子婦)가 혹 이를 싫어하거나 괴로워할 적에는 선비가
항상 타이르기를, “조상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를 외면한다면 어찌 금수(禽獸)처럼
높이 날아가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에 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타인이 우리 문전(門前)을 지나면서 들어오지 않게 된다면
그 주인의 현불초(賢不肖)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고 하였다.
월계석과 향로석
일찍이 불초등에게 훈계하기를, “장부(丈夫)의 행사(行事)는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아서 혐의받을 만한데 끼어들지 말아야한다.
고인(古人)의 오이밭에서는 신을 고쳐신지 말고 오얏나무아래서는
관(冠)을 바루어 쓰지말라. 는 말은 마땅히 일생동안 외워두어야한다,”
하였는데, 불초(不肖)가 이를 가슴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전후(前後)로 범한적이 너무많다,
문인석 설치하기
불초등이 매번 과오를 범할적에는 대뜸 가책(呵責)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에 불러 놓고 의리(義理)를 들어 타이르되
그 말이 마치 부술(斧銊)과 같으므로 땅 구멍을 뚫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되지 않았으며, 매번 과시(科試)에 낙제한 뒤에 자신의 실력이
미진한 것을 생각지 않고 항상 억울해하는 뜻을 품을 적에는 으레
과제(科第)란 운명에 메인 것이니, 그 득실(得失)을 개의(介意)할
필요가 없다,고 위로해 주곤 하였다.
아! 지극한 덕(德)이 있다 해서 후한 복을 받는이가 드문가보다.
선비(先妣)같이 순검(純儉)하고 특이한 행(行)으로도 일생동안
근고(勤苦)만 다하였을뿐 원만한 영락(榮樂)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문인석이 세워지고 이장이 완료되었다
불초가 당가(當家)한 뒤 역시 빈궁하여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또 미덕(美德)을 천양(闡揚)하여 후세에 전하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그 후사(後嗣)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 마음이 아플뿐이다.
불초자( 不肖子) 효창( 孝昌)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파주군 진동에서 옮겨온 돌로 계단까지 깨끗하게 마무리
정리가 완료된 묵재공(1595~1667) 묘소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창녕조공 휘 익 지묘(昌寧曺公 諱 溺 之墓)
배 증 숙부인 평산신씨 부좌(配 贈 淑夫人 平山申氏 祔左)
새 유택에서 간단한 제수로 한잔술을 올리며 명복을 빕니다.
묘소 축대
새로 안장된 묵재공 묘소
지난해(2024.4.13) 서울 고척동에서 이장한 별제공 휘 사우(1503~1542) 묘소
별제공 묘소와 새로 세운 묘비
행 선교랑전설사 별제(行 宣敎郞典設司 別提)
창녕조공 휘 사우지묘(昌寧曺公 諱 士虞之墓)
배 의인 거창신씨(配 宜人 居昌愼氏)
후배 의인 평산신씨 합부(後配 宜人 平山申氏 合祔)
지난해(2024.4.13) 별제공과 같이 이장한 영월공 휘 윤희(1534~1616) 묘소
영월공 묘소 측면
영월공 묘소의 새로 세운 묘비
행 통훈대부 예빈시정(行 通訓大夫 禮賓寺正)
창녕조공 휘 윤희지묘(昌寧曺公 諱 胤禧之墓)
배 숙부인 전주이씨(配 淑夫人 全州李氏)
후배 숙부인 전주이씨 합부(後配 淑夫人 全州李氏 合祔)
선영 묘역
벗꽃 핀 마암재(馬巖齋)
'뿌리와 예의범절 > 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3대가 영상(領相)에 추증된 조탁(曺倬) 가문 (1) | 2024.11.21 |
---|---|
의령 상정리 창녕조씨 고가 (0) | 2024.11.04 |
봉계마을 조응방 정려각과 율수재,나화랑생가 (0) | 2024.10.21 |
창녕조씨 김천입향조 참의공묘소 개축 (0) | 2024.10.20 |
김천 황악산 기슭 학하재(鶴下齋) (0) | 2024.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