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목단)은 예로부터 꽃 중의 제일이라고 하여 꽃의 왕
또는 꽃의 신으로, 또 부귀를 뜻하는 부귀화(富貴花)라고도 불렀다.
그 모란(牧丹)이 곱게 꽃을 피우는 모란의 계절이다.
모란 봉오리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金永郞,1903~1950)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꽃은 향기는 없어도 꿀은 있어 벌들이 찾아든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을 쓴
김영랑(金永郞,1903~1950)시인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서 거사 계획을 하던 중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될때까지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모란(牧丹)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동학교 영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귀국했다.
1930년 정지용과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무렵에 쓴 시이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고, 이 후 "독(毒)을 차고"
"가야금" "달마지" "춘향"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으며, 일제강점 말기에는
지조있는 시인으로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보수파 정치인으로서 정계에 입문하여
1945년 고향 강진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대동청년단 지단장에 취임하였지만 활동하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성향에 질려 금방 그만두었다.
그래도 강진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덕분에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다가
서울 수복 다음날인 1950년 9월 29일 적군이 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꿈 밭에 봄 마음" 등이 있으나 본인의 쓴시에 제목을
붙인것은 하나도 없으며, 시집은 "영랑시집" "영랑시선" 두 권이 있다.
사후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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