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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

by 안천 조각환 2012. 8. 2.

 

梅溪舊居 전경

 

 -이 글은 2012.7.27일자와 8.4일자 매일신문에 각각 게재된 글을 옮긴것이다-

 

1.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0)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상)"

 

성종 "문예는 조위가 최고" 극찬, 사화 광풍 속에서 희생

 
 
 
황악산 자락인 김천 대항면 복전리 마암산 창녕 조씨 선영에 조성된 매계 조위의 묘역. 갑자사화가 일어나 장사를 지낸 선생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져 부관참시당하고 3일 동안 이곳 말바우 산에 버려지는 수모를 당한다. 최근 새롭게 단장된 묘역 옆 한쪽에 옛날 비석도 세워져 있다.
 
조위 선생의 생가터에 세워진 율수재. '梅溪舊居'(매계구거)라는 현판이 이색적이다.
 
율수재 입구에 세워진 매계 선생의 이력이 세겨져 있는 신도비.
‘천상 백옥경이 어디멘고. 오색운 깊은 곳에 자정천이 가렸으니 구만리 먼 하늘을 꿈에라도 갈똥말똥. 차라리 죽어서 억만번 변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여….’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로 일컫어지는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쓴 만분가(萬憤歌)이다.

조위는 김천을 대표하는 선비의 표상이다. 조선 초기 김산(金山`현재 김천)이 영남 제일 문향으로 불릴 때 조위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도승지를 지냈다. 그러나 무오`갑자사화를 거치며 조선의 선비들이 도륙을 당할 때 조위도 연좌제의 회오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위는 유배가사 ‘만분가’를 지었고 당나라 두보의 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두시언해’를 내놓을 만큼 뛰어난 시`문을 자랑했다. 이들 작품은 현재도 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두시언해`만분가를 지은 뛰어난 문장가인 매계

매계 선생의 유향을 취하기 위해 김천 율수재(聿修齋)를 찾는다. 김천 시내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하게 길이 난 추풍령 옛길을 더듬어 올라간다. 면사무소 못 미쳐 김천의 대표적 반촌(班村)인 봉계마을을 만난다. 봉계리는 ‘인의리’ ‘예지리’ ‘신리’ 등으로 나뉜다. 마을 이름에서조차 ‘인의예지신’이란 유교의 마음가짐을 닮으려고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개울을 따라 오르다 다리를 건너 오솔길로 들어가면 매계 요람지인 율수재가 있다.

무더위가 한창인 7월 하순에 찾아간 율수재 입구에 벽오동과 소나무` 히말라야시더(雪松) 등이 푸르름을 자랑한다. 율수재 입구에 이르자 만개한 무궁화 꽃이 먼저 인사를 한다. 나라꽃 무궁화가 활짝 펴 마치 선생이 찾아온 선객을 반갑게 맞는 듯하다. 도덕문(道德門)이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하게 조성된 연못을 만나고 아치형 돌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梅溪舊居’(매계구거)라고 힘차게 쓰인 편액을 마주한다. 지금은 불에 타 없어졌지만 이곳이 선생이 태어나 학문을 익힌 곳이다. 선생은 1454년(단종 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남달랐다. 7세 때 능히 시문을 지어 이름이 났다. 10세 때 영남사림의 종사(宗師)이자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일취월장했다. 11세 때 종숙부(從叔父)인 영의정 충간공 조석문(曺錫文)에게 소학을 배웠다. 18세 때 성균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21세 때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와 예문관 검열(檢閱)을 지냈다. 그는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문예에는 조위가 제일이고, 무예에는 임득창이 제일이다”라고 임금이 말했을 정도다. 1481년(성종 12년) 28세 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당나라 두보의 시를 언해하는 책임이 맡겨졌다. 심혈을 기울여 ‘분류두공부시언해(杜詩諺解)’를 25권 17책으로 완성하고 그 서문을 썼다. 이것이 두시언해 초간본으로 우리나라 고문, 고어 연구에 있어 국문학 사상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의 학자들이 한문만을 숭상하고 우리의 글을 천대하던 때 조위는 한글에 대한 뛰어난 조예를 바탕으로 유창한 필치와 풍부한 어휘로 번역을 완수해 냈던 것이다.

◆무오`갑자사화에 연류돼 부관참시되는 형벌도 받아

1495년(연산군 원년) 선생이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된다. 이때 사관인 김일손이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담아 올리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록에 수록하게 한다. 이는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선생의 나이 45세 때인 1498년(연군 4년)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오게 되었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던 중 7월에 유자광 등이 소위 사림파를 몰아내기 위해 무오년에 사화를 일으켰다. 점필재의 처남이며 문하였던 그도 화를 면할 수가 없었다.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을 원문 그대로 수록한 점을 들어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매계가 압록강을 건너면 즉시 참하라는 왕명이 하달돼 있었다.

조의제문이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의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이다. 이는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었던 것이다. 이를 훈구파가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여 반대파인 사림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했다. 매계는 이를 원문 그대로 사초에 실었으니 반대세력의 화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땅에서 이 소식을 접한 선생은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초연했다고 전한다. 역관으로 동행한 이복동생 조신(曺伸)이 답답한 마음에 요동 땅에 이르러 추원결(鄒元潔)이라는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 점을 쳤는데 '천층낭리번신출, 야수암하숙삼소'(千層浪裡飜身出, 也須岩下宿三宵`천길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아래서 3일간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이상한 점괘를 받았다. 앞구절은 알 듯도 한데 뒷구절은 도무지 짐작되는 바 없었다.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자 포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매계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형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재상 이극균(李克均)이 나서 연산군에게 목숨을 걸고 간하기를 “매계 조위는 선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신하였으니 처형함은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점괘의 첫 구절처럼 겨우 목숨을 건져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전남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태연자약하게 학문에만 정진했다. 순천 서문 밖 옥천변에 살며 돌을 모아 대(臺)를 쌓아 임청대(臨淸臺)라 했다. 기문을 지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곳에 올라 임금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연군의 충정과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이곳에서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를 지었으며 매계총화(梅溪叢話)도 집필한 것이다.

매계는 유배지에서 식음을 잃을 정도로 학문에 전념하고 간신배들에 의해 나라가 위태로워짐을 걱정하다 병을 얻어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한훤당 김굉필은 읍민을 이끌고 예를 다하여 상례를 치르고 동생 신(伸)이 고향으로 운구하여 김천 대항면 복전리 마암산(馬巖山) 선영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그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 전번 죄를 다시 묻는다 하여 이미 장사 지낸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시신을 흩어 놓아 사흘 동안 거두지 못하게 했다. 이때서야 점쟁이가 써준 점괘의 뒷구절 '也須岩下宿三宵'(모름지기 바위 밑에서 3일을 기다린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무덤이 있는 선영은 말바우란 산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등에도 잘 묘사돼 있다.

◆지금 고향에선 '매계백일장' 열어 높은 학문과 덕 기려

매계 조위는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죄가 사면되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1527년(중종 22년) 이행(李荇)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선생의 주옥같은 시문과 기문 21편을 수록하였으며 동문선(東文選)에도 많은 시문이 수록돼 있다. 숙종 때 순천 유생들이 나서서 선생의 관직을 높이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니 “매계의 학문과 도덕이 참으로 크고 높은데 죽어서 화가 무덤까지 미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이조판서로 추서하고 '문장공'(文莊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 1718년(숙종 44년) 선생의 시문이 수록된 '매계문집'이 간행됐다.

매계 조위는 조선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당시 신진사류의 지도자인 점필재 김종직과 함께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명문장가에다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연산군 때 불어닥친 사화의 광풍 속에서 포부를 다 펴보지도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율수재는 1686년(숙종 12년)에 선생의 생가 터에 후손들이 정면 4칸 측면 2칸 '一'자형 건물로 지었는데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라 전한다. 율수재는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541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1980년부터 '매계백일장'을 열어 조위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고 있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이 글은 매일신문 2012.7.27일자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0)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상)에 실린 내용이다.

 

 

 

 2.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1)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하)"

 

조위에 상사병 궁녀 애절한 심야 구애 몰래 보던 성종은…

 
 
 
매계 조위를 모신 율수재에 들어서면 연못과 아치형 다리가 조화롭게 놓여 있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건물 앞 배롱나무에는 붉은색 꽃이 만개해 찾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조위가 두보의 시를 한글로 해석한 '분류두공부시언해'.
 
율수재 길 입구에 있는 매계 선생 생가임을 알리는 유허비.
 
매년 5월 말이면 매계 조위 선생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한 매계백일장이 율수재에서 열린다.
얼마 전 TV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인기를 끌었다.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서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 손자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는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에 대한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실존 가능성이 낮은 인물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식적으로 기록된 정사도 있지만 민간에서 주로 쓰인 야사도 있다. 때론 야사가 정사보다 더욱 많이 회자되고 대접받는 경우도 많다. 김천 선비의 표상인 매계 조위(梅溪 曺偉)를 둘러싼 야사도 전하고 있다.

때는 조선 성종조. 당시 나라는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다.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겼고, 임금도 신하를 지극히 사랑했다. 김천 선비인 매계 조위는 한림학사로 있었다. 시문에 뛰어난 그는 신숙주의 손자인 삼괴당 신종호(三魁堂 申從濩`1456∼1497)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친한 만큼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학문을 논할 때는 젊은 혈기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종 10년, 어느 추운 겨울밤. 눈이 내려 궁궐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잠을 뒤척이던 왕은 뜰에 나와 흰 눈 위에 비치는 달빛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궁녀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바삐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심한 밤에 달빛을 받고 걷는 궁녀 모습에 왕은 호기심에 이끌려 그녀 뒤를 밟는다. 여인의 발걸음이 학사들이 공부하는 경연이라 더욱 왕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이때 라이벌 관계인 매계와 삼괴당은 서로 옆방을 쓰고 있었다. 궁녀는 한림학사 조위의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지 않는가?  “매계는 학문이 높아 총애하고 있었는데 궁녀와 놀아나다니… 더구나 경연으로 궁녀를 끌어들인 인물일 줄이야….” 왕은 조위에 대한 실망감을 지나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대궐 안에서 학사가 젊은 나인과 사랑놀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풍류를 아는 성종은 방금 괘씸하게 생각한 것을 잊고 임금의 체면조차 버리고 조위의 방을 엿보기 시작했다. 선남선녀가 벌이는 사랑놀이를 엿본다는 자체가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궁녀의 사랑 고백에 넘어간 선비 조위

그러나 문틈으로 들여다본 광경은 전연 딴판이다. 사랑놀음은커녕 책상을 두고 뒤로 돌아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는 조 학사에게 궁녀가 선 채로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광경이라니….

“조 학사께서 입궐하시던 날 먼발치에서 뵈온 후 남몰래 사모해 온 정을 주체하지 못해 죽기를 각오하고 오늘 밤 찾았는데 이리도 냉정하십니까?” 조 학사는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얼른 나가 주시오. 이곳이 어느 곳인 줄 알고 이러는 게요” 하고 타일렀다.  “상사의 병이 깊어 마지막 소녀의 간절한 심정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장소를 가릴 수가 없나이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은 어느새 애달파 하는 궁녀의 편으로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고지식하기는… 저러다 궁녀 하나가 꽃다운 나이에 가고 말겠구먼, 사람의 목숨 앞에 도학이 무엇이며 도덕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부터 살리게…) 왕은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하는 걸 꾹 참고 지켜보았다. 옆방의 신 학사도 이런 소란을 눈치 채고 있을 텐데 나중 일이 걱정되기도 했다.

방 안에서는 “나는 황공하옵게도 상감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이요. 상감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밖에 없으니 어서 물러가시오.” “서방님 충성스런 마음도 기특하지만 임을 향한 이 하잘것없는 붉은 마음도 헤아려 주소서”라며 애틋한 얘기가 이어졌다.

왕은 내심 흐뭇했다. 학사 조위의 자신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고 기뻤다. 그런데 갑자기 궁녀가 “소녀의 사랑을 끝내 거절하시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라며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한다. 당황한 조위가 칼을 뺏으려고 엎치락뒤치락 결국 궁녀와 함께 나뒹굴고 만다. 그 바람에 호롱불도 꺼지고… 방안은 깜깜하고 옷깃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이내 조용해지고 그 후 방에는 불이 다시 밝혀지지 않았다. 성종은 용안 가득 웃음을 머금고 옆방의 동정을 살피는데 학사 신종호의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자 침전을 향한다. 삼경을 넘어 왕은 손수 자기가 덮는 이불을 추운 방에서 꼭 껴안고 잠든 조 학사와 나인을 덮어주고 몰래 경연을 빠져나왔다.

이튿날 눈을 뜬 조 학사는 용포를 덮고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비백산. 왕의 침전에 달려가 꿇어 엎드렸다. 바로 그때 신 학사도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로 노기등등해 왕을 알현한다. 왕은 용안에 웃음을 띤 채 “신종호는 어명을 받들라”고 한다. 신 학사가 간밤 조위의 난행을 탄핵하려는 의중을 읽고 왕이 이를 가로막고 나선 것. “한림학사 신종호는 평안도 안찰사를 명하니 지체 말고 어명을 받들고 떠나라”고 왕은 말한다. 신 학사가 떠난 후 조위는 “전하, 소신을 죽여 주소서…”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 왕은 “간밤 일은 신 학사가 돌아온 뒤 논하라”며 물러가게 한다.

◆평양 간 신 학사도 기생 매향과 정을 나누고

한편 벼락감투를 쓰고 평양에 다다른 신 학사는 따라간 비장이 마련한 초가집에서 하루 머물게 된다. 저녁상을 물리고 피곤한 몸을 누이려 하는데 주인 아낙이 작은 술상을 봐서 수줍은 듯 들어온다. 술상 위에는 몇 접시의 안주가 맛깔스럽게 놓여 있었다. 술맛 또한 기가 막혔다. 귀한 매화주다. 아낙은 소복을 입었는데 자태가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술 몇 잔에 취기가 더하자 그는 “소복은 무슨 연고인가?”라고 묻는다. “남편 상을 당해 내일이면 복을 벗게 됩니다. 귀하신 분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리는 술잔이오니 크게 탓하지 마소서”라며 얼굴을 붉혔다. “내일이 대상이라… 그럼 상복을 벗고 난 후 나를 따라 서울로 가지 않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여인은 양미간을 찡그리는 듯하더니 “거두어 주신다면 …”이라며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급한 마음에 그는 그날 밤 정분을 맺으려 했으나 “글피면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게 되는데 이틀만 참아 주시지요”라는 말에 군자로서 도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사흘째, 참고 자제한 만큼 두 남녀는 뜨거웠다. 임금의 명도 잊을 만큼 며칠간 단꿈에 빠져 지낸 신 안찰사가 정신을 수습하자 벌써 돌아갈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다. “사실 이번 길은 임금님의 명을 받고 온 길이요. 서울 가서 사람을 보낼 테니 올라오겠소.” “군자의 말씀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하오나 신표(信標)라도…” “신표?… 무슨 신표를 남겨 줄꼬?” “이 치마에 일필이라도 남겨 주시면…” 하고 비단 치마를 펼쳐 놓는다. 신 안찰사는 웃으면서 호기롭게 '세죽청매연수애 동풍춘의만향각((細竹淸梅緣水涯 東風春意滿香閨)`곧은 대나무와 맑은 매화가 물가에 물 흐르듯 연을 닿아, 동풍에 실려 온 향기가 새댁 방에 가득하여 봄뜻을 알겠구나'라는 조부 신숙주 화첩의 시구를 묵향 가득히 묻혀 써 주었다.

◆병풍에서 매향이 짙은 까닭은

그 후 신 안찰사는 어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성종은 안찰사 임무를 마친 신종호를 격려하기 위한 주연을 마련한다. 이 자리에 조위도 불렀다. 어주가 몇 순배 돌아도 두 신하는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분위기가 냉랭하다. 이에 임금이 신 학사를 보며 “평양 기생이 유명한데 기방 출입을 해 보았는가”라고 은근하게 묻는다. 화들짝 놀란 그는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춘색에 빠져 지엄하신 명을 잠시 잊은 죄 크옵나이다”라며 그간의 사정을 아뢰었다. 박장대소한 성종은 “경은 과연 곧은 선비로다. 그런데 병풍 뒤에서 매화 향기 가득하니 무슨 연유인가?”라며 “왼쪽 병풍 자락을 걷어보고 이유를 말하라”고 채근한다. 신종호가 조심스레 나아가 병풍을 걷으니 그곳엔 평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던 과수댁이 있지 않은가. 왕이 친히 오른쪽 병풍을 걷으니 그곳에는 궁녀 비연이 다소곳이 서 있다. 두 신하는 황공하기 그지없었다. 신 학사가 좋아했던 여인은 청상과부가 아니라 평양에선 이름 높은 기생 매향(梅香)으로 성종이 그가 조위를 탄핵하지 못하도록 평양 감사에게 명을 내려 몰래 꾸민 일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어진 임금의 기지로 신하의 충성심은 절로 우러나고

임금은 두 신하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손을 맞잡게 한 후 “두 사람은 과인이 믿는 신하다. 서로 불목하면 짐의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마음을 합하여 이 나라를 밝은 정치로 이끌어 달라”고 했다. 두 신하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다. 이후 둘은 형제와 같이 친함을 나누었다.

풍류를 아는 임금이 기지를 발휘해 충성스런 신하의 반목을 해소하고 동량(棟樑)으로 키워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도록 했다. 여름날 매계 조위를 모신 율수재에는 붉은색 백일홍이 곱게 피었다. 매계를 둘러싼 야사는 선생의 고귀한 성품과 풍류를 아는 조선 선비의 멋을 느끼게 한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이 글은 매일신문 2012.8.일자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1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하)에 실린 내용이다.

 


3.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32)청백리 중 청백리 老村 李約東
쥐가 먹었다며 속이고 공물 가로채 탐관오리 소금 먹여 엄벌
 
 
 
청백리 노촌 이약동 선생을 모신 김천시 양촌동 하로서원. 노촌의 34세손 이종욱(李鐘昱) 씨가 선생이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일화를 설명해 주고 있다. 서원 옆에 청백사라는 사당을 지어 선생의 지고한 덕과 인품을 기리고 있다.
 
하로마을 입구에 옮겨 놓은 사모바위
 
제주도 한라산 산천단에 세워진 노촌 이약동 선생 신도비

..... 전략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잡지 ‘청춘'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렴결백한 관리로 노촌 이약동을 꼽았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부패를 근절하고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약동은 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예로부터 제주도에서는 매년 2월 백록담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있었다. 제사 때가 되면 많은 백성들이 동원돼 며칠씩 제사를 준비해야 했다. 날씨가 춥고 한라산을 오르는 길이 험해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백성이 얼어 죽거나 사고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약동이 부임해 이런 폐단을 알고 산천단(山川壇)을 한라산 중턱 아라동 현 위치에 옮겨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중략

“너희 같은 큰 쥐들이 소금 한 바가지도 먹지 못하는데 새앙쥐들이 대체 얼마나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입안에 소금을 먹지 못한다면 너희가 중간에 공물을 가로챈 것으로 알고 큰 벌을 내릴 것이다”고 했다. 관리들은 결국 소금을 먹지 못했고 큰 벌을 받았다. 이 사건 후 제주도에서는 관리들이 중간에서 공물과 세금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   중략..... 이약동이 제주목사를 마치고 귀임할때 ...

일행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했다. “고을 백성이 사또님을 위해 바친 금갑옷을 실어두었습니다. 나중에 갑옷을 입으실 일이 있으면 드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이에 이약동은 “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갑옷을 바다에 던져라”고 했다. 갑옷을 바다에 던지자 즉시 파도가 그쳤고, 곧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갑옷을 던졌던 곳을 ‘투갑연’(投甲淵`갑옷을 던진 물목)이라고 부르고 생사당(生祠堂`백성들이 고을 수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모시던 사당)을 지어 모셨다.

◆고향 하로마을에는 청백리를 기리는 서원 세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에 노촌 선생을 모신 김천 양천동 ‘하로서원’(賀老書院)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고 차례로 비석 4기가 서 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한 신도비와 산천단 유적비 등이다. 이 중 산천단 유적비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돌로 조성했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인들이 공을 잊지 못해 직접 제주도에서 돌을 가져와 세운 비다.

신도비를 지나면 길 건너편에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머리에 착용하는 사모(紗帽)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원래 황악산 끝자락인 모암산 절벽에서 하로마을을 보고 있었다. 사모 형상을 한 바위의 정기를 받아 하로마을에서 고관들이 대거 배출돼 이들이 수시로 고향을 내왕하니 수발을 들어야 하는 역리들이 번거로움을 면할 요량으로 바위를 깨뜨렸다. 바위가 깨어진 뒤 마을이 침체되자 주민들이 나서 사모바위를 하로마을 앞으로 옮겨 정성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면 단정하게 조성된 하로서원을 만난다. 이약동 선생은 처음에는 점필재 김종직, 매계 조위, 동대 최석문, 남정 김시창 등 5현과 함께 경렴서원에 모셔졌는데 이 서원은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84년 지역 유림과 문중에서 나서 지금 자리에 하로서원을 중건하고 청백사(淸白祠)를 지어 이약동 선생을 모셨다.

노촌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년)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26세 때인 1442년(세종 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사헌부 감찰, 청도군수를 거쳐 제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73세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말년에 고향인 하로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평정(平訂)이다. 그는 76세에 낙향할 때 비가 새는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고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그는 유산으로 아들에게 아래 시(詩) 한 수를, 부인에게는 쪽박 하나와 질그릇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家貧無物得支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일세(惟有簞瓢老瓦盆)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珠玉滿籯隨手散)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不如淸白付兒孫)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