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溪舊居 전경
-이 글은 2012.7.27일자와 8.4일자 매일신문에 각각 게재된 글을 옮긴것이다-
1.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0)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상)"
성종 "문예는 조위가 최고" 극찬, 사화 광풍 속에서 희생 | |||||||||||||||||||||||||||||||||||||||||||||||||||||||||
‘천상 백옥경이 어디멘고. 오색운 깊은 곳에 자정천이 가렸으니 구만리 먼 하늘을 꿈에라도 갈똥말똥. 차라리 죽어서 억만번 변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여….’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로 일컫어지는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쓴 만분가(萬憤歌)이다.
조위는 김천을 대표하는 선비의 표상이다. 조선 초기 김산(金山`현재 김천)이 영남 제일 문향으로 불릴 때 조위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도승지를 지냈다. 그러나 무오`갑자사화를 거치며 조선의 선비들이 도륙을 당할 때 조위도 연좌제의 회오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위는 유배가사 ‘만분가’를 지었고 당나라 두보의 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두시언해’를 내놓을 만큼 뛰어난 시`문을 자랑했다. 이들 작품은 현재도 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두시언해`만분가를 지은 뛰어난 문장가인 매계 매계 선생의 유향을 취하기 위해 김천 율수재(聿修齋)를 찾는다. 김천 시내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하게 길이 난 추풍령 옛길을 더듬어 올라간다. 면사무소 못 미쳐 김천의 대표적 반촌(班村)인 봉계마을을 만난다. 봉계리는 ‘인의리’ ‘예지리’ ‘신리’ 등으로 나뉜다. 마을 이름에서조차 ‘인의예지신’이란 유교의 마음가짐을 닮으려고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개울을 따라 오르다 다리를 건너 오솔길로 들어가면 매계 요람지인 율수재가 있다. 무더위가 한창인 7월 하순에 찾아간 율수재 입구에 벽오동과 소나무` 히말라야시더(雪松) 등이 푸르름을 자랑한다. 율수재 입구에 이르자 만개한 무궁화 꽃이 먼저 인사를 한다. 나라꽃 무궁화가 활짝 펴 마치 선생이 찾아온 선객을 반갑게 맞는 듯하다. 도덕문(道德門)이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하게 조성된 연못을 만나고 아치형 돌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梅溪舊居’(매계구거)라고 힘차게 쓰인 편액을 마주한다. 지금은 불에 타 없어졌지만 이곳이 선생이 태어나 학문을 익힌 곳이다. 선생은 1454년(단종 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남달랐다. 7세 때 능히 시문을 지어 이름이 났다. 10세 때 영남사림의 종사(宗師)이자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일취월장했다. 11세 때 종숙부(從叔父)인 영의정 충간공 조석문(曺錫文)에게 소학을 배웠다. 18세 때 성균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21세 때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와 예문관 검열(檢閱)을 지냈다. 그는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문예에는 조위가 제일이고, 무예에는 임득창이 제일이다”라고 임금이 말했을 정도다. 1481년(성종 12년) 28세 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당나라 두보의 시를 언해하는 책임이 맡겨졌다. 심혈을 기울여 ‘분류두공부시언해(杜詩諺解)’를 25권 17책으로 완성하고 그 서문을 썼다. 이것이 두시언해 초간본으로 우리나라 고문, 고어 연구에 있어 국문학 사상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의 학자들이 한문만을 숭상하고 우리의 글을 천대하던 때 조위는 한글에 대한 뛰어난 조예를 바탕으로 유창한 필치와 풍부한 어휘로 번역을 완수해 냈던 것이다. ◆무오`갑자사화에 연류돼 부관참시되는 형벌도 받아 1495년(연산군 원년) 선생이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된다. 이때 사관인 김일손이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담아 올리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록에 수록하게 한다. 이는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선생의 나이 45세 때인 1498년(연군 4년)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오게 되었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던 중 7월에 유자광 등이 소위 사림파를 몰아내기 위해 무오년에 사화를 일으켰다. 점필재의 처남이며 문하였던 그도 화를 면할 수가 없었다.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을 원문 그대로 수록한 점을 들어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매계가 압록강을 건너면 즉시 참하라는 왕명이 하달돼 있었다. 조의제문이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의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이다. 이는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었던 것이다. 이를 훈구파가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여 반대파인 사림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했다. 매계는 이를 원문 그대로 사초에 실었으니 반대세력의 화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땅에서 이 소식을 접한 선생은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초연했다고 전한다. 역관으로 동행한 이복동생 조신(曺伸)이 답답한 마음에 요동 땅에 이르러 추원결(鄒元潔)이라는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 점을 쳤는데 '천층낭리번신출, 야수암하숙삼소'(千層浪裡飜身出, 也須岩下宿三宵`천길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아래서 3일간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이상한 점괘를 받았다. 앞구절은 알 듯도 한데 뒷구절은 도무지 짐작되는 바 없었다.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자 포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매계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형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재상 이극균(李克均)이 나서 연산군에게 목숨을 걸고 간하기를 “매계 조위는 선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신하였으니 처형함은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점괘의 첫 구절처럼 겨우 목숨을 건져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전남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태연자약하게 학문에만 정진했다. 순천 서문 밖 옥천변에 살며 돌을 모아 대(臺)를 쌓아 임청대(臨淸臺)라 했다. 기문을 지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곳에 올라 임금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연군의 충정과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이곳에서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를 지었으며 매계총화(梅溪叢話)도 집필한 것이다. 매계는 유배지에서 식음을 잃을 정도로 학문에 전념하고 간신배들에 의해 나라가 위태로워짐을 걱정하다 병을 얻어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한훤당 김굉필은 읍민을 이끌고 예를 다하여 상례를 치르고 동생 신(伸)이 고향으로 운구하여 김천 대항면 복전리 마암산(馬巖山) 선영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그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 전번 죄를 다시 묻는다 하여 이미 장사 지낸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시신을 흩어 놓아 사흘 동안 거두지 못하게 했다. 이때서야 점쟁이가 써준 점괘의 뒷구절 '也須岩下宿三宵'(모름지기 바위 밑에서 3일을 기다린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무덤이 있는 선영은 말바우란 산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등에도 잘 묘사돼 있다. ◆지금 고향에선 '매계백일장' 열어 높은 학문과 덕 기려 매계 조위는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죄가 사면되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1527년(중종 22년) 이행(李荇)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선생의 주옥같은 시문과 기문 21편을 수록하였으며 동문선(東文選)에도 많은 시문이 수록돼 있다. 숙종 때 순천 유생들이 나서서 선생의 관직을 높이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니 “매계의 학문과 도덕이 참으로 크고 높은데 죽어서 화가 무덤까지 미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이조판서로 추서하고 '문장공'(文莊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 1718년(숙종 44년) 선생의 시문이 수록된 '매계문집'이 간행됐다. 매계 조위는 조선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당시 신진사류의 지도자인 점필재 김종직과 함께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명문장가에다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연산군 때 불어닥친 사화의 광풍 속에서 포부를 다 펴보지도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율수재는 1686년(숙종 12년)에 선생의 생가 터에 후손들이 정면 4칸 측면 2칸 '一'자형 건물로 지었는데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라 전한다. 율수재는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541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1980년부터 '매계백일장'을 열어 조위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고 있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이 글은 매일신문 2012.7.27일자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0)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상)에 실린 내용이다.
2.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1)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하)"
이 글은 매일신문 2012.8.일자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31 김천 선비의 고장 매계 조위(하)에 실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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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32)청백리 중 청백리 老村 李約東 쥐가 먹었다며 속이고 공물 가로채 탐관오리 소금 먹여 엄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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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잡지 ‘청춘'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렴결백한 관리로 노촌 이약동을 꼽았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부패를 근절하고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약동은 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예로부터 제주도에서는 매년 2월 백록담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있었다. 제사 때가 되면 많은 백성들이 동원돼 며칠씩 제사를 준비해야 했다. 날씨가 춥고 한라산을 오르는 길이 험해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백성이 얼어 죽거나 사고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약동이 부임해 이런 폐단을 알고 산천단(山川壇)을 한라산 중턱 아라동 현 위치에 옮겨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중략 “너희 같은 큰 쥐들이 소금 한 바가지도 먹지 못하는데 새앙쥐들이 대체 얼마나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입안에 소금을 먹지 못한다면 너희가 중간에 공물을 가로챈 것으로 알고 큰 벌을 내릴 것이다”고 했다. 관리들은 결국 소금을 먹지 못했고 큰 벌을 받았다. 이 사건 후 제주도에서는 관리들이 중간에서 공물과 세금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 중략..... 이약동이 제주목사를 마치고 귀임할때 ... 일행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했다. “고을 백성이 사또님을 위해 바친 금갑옷을 실어두었습니다. 나중에 갑옷을 입으실 일이 있으면 드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이에 이약동은 “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갑옷을 바다에 던져라”고 했다. 갑옷을 바다에 던지자 즉시 파도가 그쳤고, 곧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갑옷을 던졌던 곳을 ‘투갑연’(投甲淵`갑옷을 던진 물목)이라고 부르고 생사당(生祠堂`백성들이 고을 수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모시던 사당)을 지어 모셨다. ◆고향 하로마을에는 청백리를 기리는 서원 세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에 노촌 선생을 모신 김천 양천동 ‘하로서원’(賀老書院)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고 차례로 비석 4기가 서 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한 신도비와 산천단 유적비 등이다. 이 중 산천단 유적비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돌로 조성했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인들이 공을 잊지 못해 직접 제주도에서 돌을 가져와 세운 비다. 신도비를 지나면 길 건너편에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머리에 착용하는 사모(紗帽)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원래 황악산 끝자락인 모암산 절벽에서 하로마을을 보고 있었다. 사모 형상을 한 바위의 정기를 받아 하로마을에서 고관들이 대거 배출돼 이들이 수시로 고향을 내왕하니 수발을 들어야 하는 역리들이 번거로움을 면할 요량으로 바위를 깨뜨렸다. 바위가 깨어진 뒤 마을이 침체되자 주민들이 나서 사모바위를 하로마을 앞으로 옮겨 정성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면 단정하게 조성된 하로서원을 만난다. 이약동 선생은 처음에는 점필재 김종직, 매계 조위, 동대 최석문, 남정 김시창 등 5현과 함께 경렴서원에 모셔졌는데 이 서원은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84년 지역 유림과 문중에서 나서 지금 자리에 하로서원을 중건하고 청백사(淸白祠)를 지어 이약동 선생을 모셨다. 노촌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년)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26세 때인 1442년(세종 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사헌부 감찰, 청도군수를 거쳐 제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73세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말년에 고향인 하로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평정(平訂)이다. 그는 76세에 낙향할 때 비가 새는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고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그는 유산으로 아들에게 아래 시(詩) 한 수를, 부인에게는 쪽박 하나와 질그릇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家貧無物得支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일세(惟有簞瓢老瓦盆)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珠玉滿籯隨手散)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不如淸白付兒孫)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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